나의生, 나의 藝

연극배우 김동원 ‘영원한 햄릿’

김동원, 그는 배우였다.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을 위해 자택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햄릿’ 공연사진 앞에 서서 미소로 맞아주었다. 35살 때 한국최초의 ‘햄릿’을 연기했던 그는 88세의 나이에도 귀공자 ‘햄릿’의 미소를 간직하고 있었다. 비디오 촬영을 한다고 하자 옅은 분장까지 했다.

[나의生, 나의 藝] 연극배우 김동원 ‘영원한 햄릿’

배우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배우는 시대와 어떻게 부딪치면서 성장하는가. 이 화두를 놓고 김동원의 연극과 인생을 굳이 간추린다면 다섯개 에피소드로 요약될 듯하다.

첫번째, 배우의 탄생. 배우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는 말은 김동원에게 그대로 들어맞는다. 그는 원래 성악가를 지망할 정도의 미성과 수려한 용모를 타고났다. 이 신체조건이 그를 주역 전문배우, 특히 선한 주인공 단골배우로 만들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어린시절 영화에 빠지면서 영화배우를 꿈꿨다.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변사 김조성의 대사를 한 토막 멋지게 재연해주었다. 그는 배재고보 시절, 연극의 매력에 빠져 연극부를 조직한다. 이때 현대극의 거목인 극작가 유치진을 만났다. 그 후로 유치진 작품의 단골 주연배우가 됐다.

두번째, 주역 전문배우로의 성장. 일본 유학시절 그는 신극단체 ‘동경학생예술좌’에 입단하면서 주연 배우로서의 길을 걷는다. 동경학생예술좌는 작가 주요한·주요섭의 동생인 주영섭의 주도로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과 유치진(고문) 등이 참여해 창립됐다. 특히 김동원이 이도령으로 출연한 ‘춘향전’으로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일본 신극인들에게 알렸다.

세번째, 시대와의 불화. 1939년 일본경찰은 지식인들의 연극활동을 좌익으로 몰아 구속했다. 김동원은 체질적으로 사상운동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유치진·이해랑·주영섭 등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구속돼 온갖 고문을 받았다. “‘춘향전’도 너희가 한 거는 좌익연극이라는 거야. 뭔고하니 이몽룡이가 암행어사로 출두해가지고 때려부수고 변학도 때려부수고. 그게 다 목적 있어 가지고 한 거 아니냐고 한단 말이야.”

이 사건 이후 김동원은 삼양상사에 취직하고 결혼한다. 그러나 배우로서의 운명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유치진이 이끄는 현대극장이 ‘춘향전’을 공연할 때, 이도령 역의 강계식이 갑자기 출연을 못하게 됐다. 당황한 극단측은 김동원을 회사로 찾아와 무대에 서달라면서 사장의 허락까지 받아냈다. 연습 없이 무대에 오를 정도로 김동원은 ‘춘향전’의 모든 대사를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술작업을 진행하면서 필자가 누린 즐거움의 하나는 이런 에피소드가 나올 때마다 대사 연기를 즉석에서 들었다는 점이다.

김동원은 일제시대 최고 명배우로 황철을 꼽았다. 황철은 동양극장 최고의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홍도오빠 역 등 대중극계에선 가장 인기있고 연기력이 뛰어났다. 해방 직후 김동원은 황철과 ‘호접’ ‘뇌우’ 등에서 한 무대에 섰는데 타고난 목소리와 신체조건, 온화한 인품, 연습시간을 잘 지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모습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황철은 훗날 월북했고, 전쟁 때 폭격으로 한쪽 팔이 잘렸는데도 ‘리순신 장군’의 주역을 맡는 등 이북의 공훈배우가 됐다.

[나의生, 나의 藝] 연극배우 김동원 ‘영원한 햄릿’

김동원은 평남 순천에서 유엔군의 공습을 틈타 양백명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오다 국군을 만났는데 이번엔 인민군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연극 팬이었던 국군 중위가 국립극단 주연배우 김동원을 알아본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개성 쪽으로 끌려가 소식이 끊겼던 최은희도 극적으로 해후했다. 김동원의 극단 신협이 부산 공연을 갔다가 다방 마담을 하던 그녀를 만난 것이다. 김동원은 ‘오델로’ 공연 때 최은희를 여주인공 데스데모나 역으로 추천했다. 최은희는 이후 연극·영화를 주름잡는 스타로 재기할 수 있었다.

다섯번째, ‘영원한 햄릿’의 탄생. 극단 신협은 전쟁 기간 중 대구에서 공연활동을 했다. “연극은 우리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하여간 붙였다 하면은 그냥 손님이 터져 나가요.” 전쟁에 시달린 관객들은 연극에서 위안과 희망을 얻었다. 연출가 이해랑은 한국 최초의 ‘햄릿’ 공연을 계획했다. 그런데 연습기간은 7일밖에 없었다. 처음엔 배역을 거절했다가 결국 사흘밤을 새워 대본을 외운 뒤 무대에 섰다. ‘햄릿’의 엄청난 대사 양과 복잡한 캐릭터를 생각하자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불가능을 기적으로 바꾼 사건을 통해 김동원은 그후 ‘오델로’의 타이틀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스탠리,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 로먼,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 ‘남한산성’의 인조 등 수많은 명연기를 펼칠 수 있었다.

연극은 막이 내림과 동시에 사라지는 유한의 예술이다. 그에게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 그러나 장담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과장하지 않는 솔직한 그의 성품이 그대로 배어나는 대답이었다. 역시 그는 배우였다.

-“한국 고전 토대 일제 첫연극은 춘향전”-

[나의生, 나의 藝] 연극배우 김동원 ‘영원한 햄릿’

그의 증언에 의하면 동경학생예술좌의 연극 ‘춘향전’(유치진 작, 주영섭 연출, 1937)을 보고, 일본 신극인들이 이듬해 ‘춘향전’을 만들어 공연했다. 일본 극단 신협(新協)의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의 연출로, 공연 형식은 가부키 스타일이었고, 이도령 역을 여배우 아카기 랑코가 맡았다는 것이다. 또 서울 공연도 했는데 이때는 이도령 역을 남자배우 다키자와 오사무가 맡았다고 증언했다. 연출자 무라야마는 이도령 역을 여배우에게 맡긴 이유를 ‘조선적인 유연, 청아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각색은 일본 유학생 장혁주, 의상·고증은 유치진이 맡았다. 연기 지도 및 연출 조수는 극단 전진좌의 안영일이 맡아서 조선적 연기·몸짓·해학을 가미했다. 공연스타일은 일본 전통극 가부키와 신극 스타일을 혼융한 형식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기침·한숨이나 “네” “아이고” 등 단순한 말은 한국어를 사용함으로써 한국적 색채와 풍속을 살렸다는 점이다. 1938년 교토·오사카·도쿄에서 순회공연을 펼쳤는데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춘향전’이 선풍적 인기를 끌자 가극·영화·오페라 등의 작업으로 이어졌다.

〈김성희/ 연극평론가·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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