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휴고 플라트가 창조한 불멸의 여행자 ‘코르토 말테제’

박사·이명석

바다, 모험, 방랑. 낭만의 DNA를 따라서

‘바다의 기사’ ‘불멸의 여행자’ ‘모든 항구가 사랑한 선장’ ‘황금과의 연애가 허락된 유일한 모험가’….

[지구보다 큰 지도]⑫ 휴고 플라트가 창조한 불멸의 여행자 ‘코르토 말테제’

휴고 플라트(Hugo Platt)가 만들어낸 만화 주인공 코르토 말테제(Corto Maltese)는 지난 수십년간 유럽과 남아메리카에서 007에 못지않은 영웅 대접을 받아왔다. 풍성한 고고학과 민속학 지식, 놀라운 용맹성과 위기 대처능력, 어떤 이념과 국적에도 소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항해와 모험을 거듭했던 코르토는 ‘인디아나 존스’ ‘마스터 키튼’ ‘툼 레이더’를 탄생시킨 원초적 DNA다.

코르토를 탄생시킨 휴고 플라트는 인생과 창작의 여정, 양쪽에서 ‘가장 국제적인 만화가’다. 그는 1927년 이탈리아의 리미니에서 프랑스-영국계 군인 아버지와 유대-스페인-터키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어 베네치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데, 이 물의 도시는 코르토에게 항상 계시의 장소이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의 역할을 한다. 10살이 된 소년 휴고는 에티오피아 식민 개척에 나선 아버지를 따라가 청소년기를 보낸다. 휴고는 자연스럽게 무솔리니의 유년대가 되고 현지의 식민 경찰로 첫 직업을 얻는다. 이어 2차 세계대전의 불길 속에서 스파이 혐의로 독일군에게 체포되고,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뒤에는 연합군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누구보다도 격동적인 소년기를 보내며 온갖 민족의 신화와 민담, 파시즘과 자유주의의 사상을 섭렵한 휴고는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에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라틴아메리카로 건너가 모험과 창작을 거듭하던 그는 1968년 ‘염해의 발라드’를 통해 코르토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코르토 말테제’의 성공 이후에도 유럽과 라틴아메리카를 넘나들며 다채로운 창작 활동을 펼친 휴고는, 1984년 제네바 호수 근처의 작은 마을에 3만권의 장서를 모아둘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정착한다. 그는 1995년 눈을 감을 때까지 50년간 1만페이지에 달하는 작품을 그리며, 현실 속에서나 작품 속에서나 결코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코르토의 지도는 1887년 말타의 구시가인 발레타 지구에서 시작한다. 콘월에서 온 영국 선원과 지브롤터에서 온 집시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코르토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한 에피소드에 따르면 10살 무렵의 소년 코르토는 스페인 코르도바의 유대인 지구에 살고 있었다. 그때 미래를 예지하는 어머니의 친구가 그의 손금을 보며 운명선이 없다고 하자, 그는 아버지의 면도칼로 손바닥에 직접 운명선을 파냈다고 한다. 어린 코르토는 그 운명의 선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돌게 만들 것인지 결코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새로운 세기로 바뀌는 해인 1900년, 13살이 된 코르토는 처음으로 먼 여행길에 오른다. 중국으로 떠난 코르토의 첫 모험담 ‘소년(La giovinezza)’의 배경은 1905년 발발한 러·일전쟁. 당시 만주에 있던 코르토는 종군 기자이자 후에 유명 작가가 되는 잭 런던과 만나 친구가 된다. 또한 이때 당시 차르군의 탈영병인 라스푸틴을 만나 일생을 이어갈 기묘한 우정을 시작한다. (제정 러시아 말기의 신비주의 권력자 라스푸틴과 생김새와 이름만 같은 인물이다.)

코르토는 라스푸틴의 꼬임으로 에티오피아의 금광을 찾아 배를 탄다. 하지만 이 배는 남아메리카로 향하고, 그 덕분에 파타고니아에서 전설적인 도둑 부치 캐시디(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주인공)를 만나게 된다. 이어 1907년에는 이탈리아의 안코나에서 후에 러시아의 독재자 스탈린이 되는 호텔 종업원 요제프와 사귀는 등 코르토는 생애 곳곳에서 세계사의 주요 인물들과 만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친다. 1908년과 1913년 사이 코르토의 구체적인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르세유, 튀니지, 뉴올리언스, 인도, 중국 등을 여행한 것으로 보인다.

말쑥한 해군 제복에 담배 연기를 휘날리는 코르토의 모습은 언제나 바다와 방랑의 냄새를 느끼게 한다. 어른이 된 그의 여정이 남태평양의 비스마르크 제도를 배경으로 펼쳐진다는 사실도 무척 당연해 보인다. ‘염해의 발라드(Una Ballata del Mare Salato, 1913~15년)’에서 비밀스러운 범죄조직 아래 일하던 코르토는 가상의 섬 에스콘디다(Escondida)에서 판도라와 짧은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이어 서인도 제도로 옮겨간 코르토는 ‘카프리콘의 사인 아래(Sous le signe du Capricorne, 1915~17년)’에서 프라하 출신의 대학교수 예레미아 스타이너(Jeremiah Steiner)와 라틴아메리카를 탐험한다. 브라질의 무술 춤 카포에이라, 신비한 주술사의 의식, 화려한 원주민 의상 등 민속학의 백과사전과도 같은 ‘코르토 말테제’ 시리즈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켈트 이야기(Les Celtiques, 1917~18년)’에서는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역사적 사건 사이사이에 배어든 치밀한 픽션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국경선이 뒤바뀌며 이념과 대의명분이 무고한 삶들을 빼앗고 있는 현장에서, 코르토는 ‘황금’이라는 엉뚱한 목적을 위해 목숨을 건다. 그에게 ‘잃어버린 보물’을 찾는 과정은 참을 수 없는 호기심으로 숨겨진 비밀을 찾아가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다. 코르토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군의 방해를 뚫고 프랑스, 스코틀랜드, 미국, 그리스 군의 협력으로 몬테네그로 공화정의 황금을 찾아내는 작전을 완수한다. 이곳에서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모델로 한 앰뷸런스 운전병 헤른스트 웨이를 만나는데, 이때 그가 쓰고 있는 작품은 ‘전쟁이여 잘 있거라(‘무기여 잘 있거라’의 패러디)’다. 이어 더블린의 아일랜드 혁명군의 틈바구니를 지나 스톤헨지의 비밀에 접근한 코르토는 노르망디 해변에서 전설적인 전투기 조종사 ‘붉은 남작’의 죽음을 지켜본다.

‘에티오피아 대장정(Les Ethiopiques, 1918년)’에서 아프리카에까지 몰아닥친 전쟁의 포화를 경험한 코르토는 홍콩으로 향한다. 오랜 방랑 생활로 유명한 그의 공식적인 집이 있는 곳이다. 휴식은 오래가지 못한다. 다시 라스푸틴의 꼬임으로 차르의 황금을 찾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Corte sconta detta Arcana, 1918~20년)’에 올라탄다. 톈진, 하얼빈, 선양 등 낯익은 지명에서 우리의 할아버지들과도 만났음에 분명하다.

작가 휴고의 고향으로 돌아온 ‘베네치아의 전설(Favola di Venezia, 1920년)’은 현실의 지도에서 표기될 수 없는 여행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유대-그리스-베네치아의 전통 부적, 마법의 에메랄드, 아라비아의 묘석, 프리메이슨 조직 등에 얽힌 신비주의의 퍼즐 찾기가 ‘병기창의 사자상’ 등 실제 베네치아 곳곳에 존재하는 고전적인 도상들을 통해 펼쳐진다.

비밀의 문을 통해 지중해의 로도스 섬에 도착한 코르토는 ‘사마르칸트의 황금 궁전(La Casa Dorata di Samarcanda, 1921~22년)’을 통해 서부 아시아 횡단에 나선다. 사마르칸트의 감옥에 갇혀 있는 친구 라스푸틴을 구하고 페르시아 사이러스 왕의 보물을 찾기 위한 이 행로는 지중해-터키-페르시아-아제르바이잔-카스피해-투르크메니스탄(당시 소비에트 연방)-부카라(현 우즈베키스탄)-아프가니스탄을 지나서 인도 북서쪽(현 파키스탄)에까지 이른다.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국적은 돈”이라고 서슴없이 외치는 라스푸틴은 어딘지 모르게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올리게 한다.

아름다운 여인 루이즈 부르크조비츠를 찾아 아르헨티나로 온 코르토는 곧 ‘탱고(Tango, 1923년)’의 끈적끈적한 음률 속으로 빠져든다. 말쑥한 양복을 입은 코르토가 여인의 허리를 팔로 감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살인범이 된 그는 아르헨티나를 빠져나와 유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비밀의 장미(Le helvetiche Rosa alchemica, 1924년)’에서 예레미아 교수와 함께 스위스 칸톤 지방으로 소풍을 가, 작가 헤르만 헤세를 만난다. 이 만남은 그의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농후하게 만들고, 결국 이듬해 사라진 대륙 ‘뮤(Mu, 1925년)’를 탐험하게 만든다. 이로써 공식적인 시리즈에 담긴 코르토의 행적은 끝이 난다. 여러 조각난 단편들을 통해 알려진 사실은 코르토가 스페인 내전 중에 우리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정도다. 그러나 결코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코르토는 진정한 여행과 모험의 대리자, 유럽 지식인들의 머릿속에 있는 순결한 코스모폴리탄의 이상과도 같은 존재다.

그의 항로에는 종착지도 결말도 없다. 영원히 저 먼 곳에 있는 보물을 찾아갈 뿐이다. “보물은 분명히 존재해. 짓궂은 악마가 숨기고 있어서 우리의 질문과 대답의 미로 속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뿐이지.”

[지구보다 큰 지도]⑫ 휴고 플라트가 창조한 불멸의 여행자 ‘코르토 말테제’

●코르토 말테제 시리즈는

‘코르토 말테제’는 모두 12권의 시리즈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다채로운 언어로 출판되어 있다. 국내에는 ‘사마르칸트의 황금 궁전’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에티오피아 대장정’ ‘켈트 이야기’ ‘베네치아의 전설’ 등 5권이 북하우스에서 번역 출판되어 있다. 메인 시리즈에 담기지 않은 유년시절의 행적 등은 ‘코르토 말테제의 여인들(Les Femmes de Corto Maltsse)’ ‘코르토 말테제의 발라드(Les Balades de Corto Maltese)’ ‘코르토 말테제의 회상(Corto Maltese Memoires)’ (모두 프랑스 카스트만 Casterman 출판사에서 출간)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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