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가수 박인수, 7년째 치매 투병 쓸쓸한 말년

이상호기자

1967년 어느 날 서울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키가 훤칠한 한 남자가 찾아와 자신을 한번 테스트해 달라고 했다.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솔(흑인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의 노래를 듣고 그날 저녁 바로 무대에 세웠다. 그 클럽은 백인클럽이었지만 문 밖에서 그의 음악을 듣던 한 흑인이 친구들을 몰고왔다. 어떤 흑인은 박인수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가수 신중현씨의 회고록 중)

1970년대 독특한 창법으로 ‘봄비’라는 노래를 불러 큰 인기를 얻었던 가수 박인수씨가 경기 고양시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행복의 집’ 앞 산책로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박씨는 현재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증상을 보이고 있다. |김문석기자

1970년대 독특한 창법으로 ‘봄비’라는 노래를 불러 큰 인기를 얻었던 가수 박인수씨가 경기 고양시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행복의 집’ 앞 산책로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박씨는 현재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증상을 보이고 있다. |김문석기자

한국 솔 음악의 대부로 불리는 가수 박인수씨(62). 그가 70년대 절규하듯 부른 ‘봄비’는 국내 대중 음악사의 전설로 남아있다.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마음을 달래도/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한없이 흐르네….”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봄비’의 노랫말처럼 그는 ‘외로움’과 ‘눈물’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경기 고양시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행복의 집’에서 지난 14일 그를 만났다. 약간은 마른 모습에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7년째 치매를 앓고 있다. 인터뷰 도중 간혹 엉뚱한 답변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의 대표곡인 ‘봄비’라는 노래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봄비’ 1절을 직접 부르기도 했다. 노래에 실린 힘은 예전같지 않았지만 치매환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사는 정확했다.

그는 한국에 가족이 없다. 가진 재산도 없고 경제능력마저 상실한 상태여서 기초생활수급대상자다. 증상이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다는 이유로 올해 7월부터 시행 중인 노인요양보험 수혜대상자로도 선정되지 못했다. 요양원 측이 돌보지 않으면 그는 오갈 곳이 없는 처지.

그는 수년 동안 ‘과거를 잃어가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애써 자신의 기억 속에서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과 선후배 가수들이다.

그는 한동안 미국에 있는 딸의 결혼사진을 늘 품고 다녔다. 잠 잘 때는 베개 곁에 놓아두었다. 혼자있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딸의 사진을 꺼내 보는 일이 일상이었다.

‘행복의 집’ 성경애 원장은 “딸의 사진과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요양시설에 적응하는 데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제가 사진을 몇년 전에 감춰 두었죠. 이후부터는 딸의 기억을 조금씩 잊어가는 것 같아요.”

성 원장은 또 그가 일본에서 음악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아들도 무척 그리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2004년 크리스마스 하루 전날 일본에 있는 아들하고 한번 전화로 연락이 닿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후 박씨는 주변사람들에게 ‘아들을 곧 만날 것’이라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그러나 부자(父子)는 아직 만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기억 속에 아직까지 생생한 사람들은 ‘봄비’를 만든 가수 신중현씨, 하사와 병장의 이경우씨, ‘봄비’를 자신보다 먼저 불렀던 가수 임아영씨와 가수 박재란씨 등 선후배 음악인들이다. 가수 신효범씨와 인순이씨에 대해서는 지금도 가창력을 칭찬한다.

‘봄비’ 가수 박인수, 7년째 치매 투병 쓸쓸한 말년

그는 자신이 부른 애절한 노래만큼 비운의 뮤지션이다. 북한이 고향인 그는 한국전쟁 중에 남쪽으로 피란을 내려와 어머니와 함께 살다 7살이 되던 해에 전북 정읍역 부근에서 길을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된다. 이후 고아원 생활을 전전하다 12살 때 미국으로 입양됐지만 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3년여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미 8군에서 하우스보이로 생활을 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한글은 제대로 쓰지 못하지만 영어는 제법 할 줄 안다.

미군부대 생활 중에 그의 콧노래를 들은 한 미군의 도움으로 미군부대 밤무대에 서면서 그의 가수 인생이 시작된다. 미군클럽에서 제법 인기를 얻으면서 그의 쥐어짜는 듯한 특유의 창법은 빛을 보게 된다. ‘달러박스’라는 별명이 따라다닐 정도로 여러 미군클럽에서 그를 앞다퉈 불렀다.

이후 70년대 ‘록의 대부’인 신중현씨가 이끄는 그룹 ‘퀘션스’의 멤버로 들어가 ‘봄비’를 불러 빅히트하고 이듬해에 부른 ‘뭐라고 한마디해야 할텐데’ 등의 노래가 잇따라 큰 인기를 얻으면서 그는 가수생활의 절정을 누린다. 그의 인기가 한창일 때는 여대생 무리들이 그의 집 앞을 지키고 있는 바람에 이들을 피해 여관이나 호텔 등지에서 며칠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76년 대마초 사건 등에 연루되면서 그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90년대 말부터는 저혈당 등으로 건강마저 악화되면서 결국 짧은 가수로서의 생을 접어야만 했다.

그가 생활하고 있는 ‘행복의 집’과의 인연은 8년 전쯤 시작됐다. 2000년 서울 화곡동에 있는 지하 단칸방에서 한 목사의 도움으로 어렵게 지내던 박씨는 건강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이유없이 쓰러지기도 했으며 여기저기 통증을 호소하고 식사를 거르는 때가 많았다. 병원에서 뒤늦게 알게 됐지만 저혈당으로 인한 합병증과 함께 췌장에 종양이 자라는 데다 파킨슨병이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다. 주민등록증도 말소됐기 때문에 병원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박씨는 그 즈음 주변 사람의 소개로 ‘행복의 집’을 처음 연 고(故) 정봉인 목사를 만나게 된다.

고 정 목사의 부인인 성 원장은 “박씨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옷도 그때 입고 있었던 것 한 벌밖에 없을 정도로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자주 실신해 한달이 멀다하고 병원에 실려갔고 화도 자주 내 가까이 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봄비’ 가수 박인수, 7년째 치매 투병 쓸쓸한 말년

고 정 목사와 박씨는 나이가 비슷해 친구처럼 지냈다고 했다. 정 목사는 생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귀한 사람이니 잘 모셔야 한다”며 박씨를 가족처럼 돌봤다. 정 목사는 올해 61세의 나이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씨는 정 목사에 대해 물으면 “그 분 돌아가셨다. 정말 잘해 주셨는데…”라며 금세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박씨는 아침 6시에 기상한다. 이후 예배를 마치고 가벼운 운동을 한 뒤 함께 지내는 20여명의 노인과 요양원에서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생활한다.

아직까지는 거동에 큰 어려움이 없는 데다 요양원 20여명의 노인 중에 박씨가 막내다. 이 때문에 그들 중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박씨가 먼저 나서서 돕기도 한다. 누군가 생일을 맞으면 축가를 불러주기도 한다.

그의 목에는 은색 목걸이가 걸려 있다. 목걸이에는 그의 이름과 ‘행복의 집’ 전화번호가 새겨져 있다. 박씨가 치매증상으로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은 적이 몇번 있어 요양원 측이 궁여지책으로 걸어준 일종의 이름표다.

성 원장은 “예전에는 우리가 요양원이라기보다는 교회에서 생활이 어려운 노인 몇 분을 모시고 있는 정도의 조촐한 시설이었는데 그때 가끔 혼자 외출했다가 박씨가 길을 잃어 우리가 찾아다니곤 했다. 언젠가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은목걸이를 해줬고, 그 목걸이 덕으로 쉽게 집에 돌아온 적이 있는데 이후부터는 목욕을 할 때도 목걸이는 항상 걸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의 건강상태는 최근 주변 사람들도 놀랄 정도로 호전됐다. ‘행복의 집’ 총무 이재상씨는 “처음 만났을 때에는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걸지 못할 정도로 대인기피증이 있었는데 파킨슨병 수술를 받은 뒤 심했던 손떨림 현상도 없어졌고 2~3년 전부터는 성격이 완전히 변해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게 됐다”고 말했다.

소망을 묻자 그는 “노래…”라고만 짤막하게 답했다. 2002년 그의 투병생활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몇몇 후배들이 모 방송사 가요프로그램에 초청해 함께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이 무대가 현재로선 그의 마지막 무대다.

그는 당시 휠체어에 앉아 후배들이 부르는 그의 히트곡을 듣는 것이 예정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한 후배가 건넨 마이크를 잡고 그가 정확한 가사로 노래를 부르자 객석에서는 박수가 이어졌다. 그는 이때의 기억을 인터뷰 중에 몇번이나 반복해 말했다. “그땐 나도 울고 내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도 울고 그랬거든요….”

그는 어쩌면 그때가 자신의 마지막 무대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그는 “건강하세요”라고 말한 뒤 메모지에 이렇게 적었다. “my fans always be happy bright.” 그러나 그는 끝내 이날 날짜는 메모지에 적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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