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향이 만난 사람

도보 탐사일기 펴낸 양효성 씨

글·사진 김지환기자

서울~죽령~부산 옛길 걸으며 역사를 느끼다

예고되지 않은 만남은 때론 불편하거나 불만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양효성씨(63)와의 시간은 5시간이 넘는 긴 이야기가 모자랄 정도로 흥미롭고 유쾌하기까지 했다.

“어서 와요. 무슨 인터뷰는… 편하게 얘기 나누는 게 인터뷰 아닌가. 맥주 한 잔부터 해요. 그런데 맥주가 어디 있더라?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잠깐만 기다려봐요. 앞에 가게 좀 갔다 올게요.”

양효성씨에게 길을 떠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시작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양씨는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처럼 체 게바라 여행길의 자유로움을 담고 싶어한다.

양효성씨에게 길을 떠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시작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양씨는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처럼 체 게바라 여행길의 자유로움을 담고 싶어한다.

며칠 전 우연히 선배로부터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 <나의 옛길 탐사일기 1·2권>이란 제목으로 책을 펴낸 사람이 있다는 소릴 들었다. 수백㎞에 이르는 먼 길을 걸은 것도 놀라웠지만 20여 년의 교사생활을 정리하고 은퇴한 60대가 도전했다는 얘기가 더 흥미로웠다.

60넘어 주위 만류 뿌리치고 도전

특히 직접 사진을 찍고 가감 없이 자신의 시행착오를 글로 옮겨놨다는 데서 여느 여행서하고는 분명 다른 점이 있을 거란 짐작이 갔다.

양씨가 중국에서 구입한 중국식 고사전을 펼쳐 보이고 있다.

양씨가 중국에서 구입한 중국식 고사전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인터뷰하면 몇 시간을 할 수 있어요? 한 시간? 그래요, 그럼 두서없이 풀어놓을 테니 술 한 잔 하면서 찬찬히 한 번 잘 들어보세요.”

널찍하게 마련된 그의 집 베란다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진지함과 함박웃음이 뒤섞인 편안함으로 이어졌다. 예정된 인터뷰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들뜬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화 내내 색색깔 알사탕을 고르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시니피에(기의)를 시니피앙(기표)으로 가르치는 이 사회를 보면서 본질에 접근해보지 못한 모습이 무척 안타깝더라고요. 두 발로 걸으며 나의 오관과 시니피에가 직접 교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었죠.” 양씨는 운수업과 신문사 교열기자를 거쳐 고등학교에서 한문, 문학, 독서 등을 20여 년을 가르친 전직 선생님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후 6살 무렵 전쟁을 피해 전남 보성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것이 인연이 돼 지금까지 한자를 곁에 두고 기호의 의미해석에 관심을 두며 살아왔다.

양씨가  돋보기를 쓰고 책을 소개하고 있다.

양씨가 돋보기를 쓰고 책을 소개하고 있다.

서울고를 거처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에도 한국어문교육연구회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만큼 ‘한자’ 사용에 적극적이었다. 인천으로 자릴 옮겨 인하사대부고 교사활동을 시작한 이후에도 한자표기어와 한글표기어에 대한 연구는 인하대 교육학 석사 논문으로 발표할 만큼 계속 이어졌다.

어쩌면 그런 양씨의 지적 호기심이 옛길 탐사일기의 불씨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탐사라는 것이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몸으로 느껴보는 거라 생각해요. 저는 바람(風)을 사전에서 찾지 않고 길을 걸으며 직접 ‘쐬어보는 것’을 선택한 거죠. 한 고을의 분위기는 풍속이라 하는데 곧 그 고을의 바람을 쐬보는 것이 맞지 않겠어요.”

이러한 양씨의 지적 호기심에 결정적인 계기는 오래된 책 한 권이었다. 약 30여 년 전 양씨가 골동품점에서 발견한 광해군 시대 필사본인데 책에는 놀랍게도 일본 사신이 서울로 가는 세 갈림길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수백여 명이 이동하고 쉬던 길인 만큼 옛 문화와 정서가 고스란히 책 속에 담겨있는 듯했다.

추풍령, 조령, 죽령으로 나뉜 세 갈래 길은 그렇게 오랫동안 양씨의 뇌리에 남아 있었고 결국 <나의 옛길 탐사일기> 시발점이 됐다. “기차도 버스도 없던 시절의 역원을 찾아 보부상처럼 걷다 보면 무엇인가 우리가 모르고 살아온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겼어요.”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밤잠을 설치며 뒷산에 올라 몸을 만든 지 한 달. 꿈은 현실이 돼 있었다. 두툼한 배낭엔 나침반, 헤드라이트, 지도, 등산화 등을 담고 집에 남겨진 할아버지가 되기보단 길을 떠난 방랑자나 탐험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수백 리 길은 닳고닳은 지도에 잘 나타나 있다.

수백 리 길은 닳고닳은 지도에 잘 나타나 있다.

“처음엔 집에서도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죠. 나침반과 지도에 의존해서 걷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하지만 이틀 걷고 하루 쉬면 체력적으론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30년전 골동품 책 한권이 시발점

그의 고된 발걸음은 책에도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책 뒤편에 기록된 탐사 일정표는 2005년 10월11일부터 12월14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날짜와 출발지, 하루 세 끼 식사 메뉴, 숙박지,옛날 역터 등을 꼼꼼히 담아 힘겨웠을 그의 여정을 느끼게 해준다.

사실 그의 여정이 이렇게 책으로 묶여 나온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처음엔 환갑노인이 서울에서 죽령을 넘어 부산까지 31개 조선시대 역을 걸어 일기를 적은 것에 불과했죠. 여행 길목마다 시골 PC방에 들러 주변 지인들에게 꼬박꼬박 일기를 적어 메일을 보낸 것이 그 시발점이 된 거에요.”

자신의 일기에 대해 양씨는 출발부터 방황과 착종(錯綜)을 거듭한 기록일 뿐이라고 치부했지만 주위에선 그의 일기를 두고 책 묶기를 끊임없이 권유했다. 그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기억했고 그들을 기록하고 옛길을 통해 알게 된 많은 것들을 다듬어 놓는다면 새로운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양씨는 그 고마움을 사진에 담아 책에 고스란히 사람들의 얼굴을 실어놓기도 했다.

“길목 길목에서 만난 사람들은 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새로운 경험이었어요.”양씨는 대학교수를 만나 옛길의 추억을 함께 더듬으며 호기심을 달래기도 하고 길을 걷던 자신을 붙잡고 트럭에 비료통을 올려달라던 백발의 할머니를 통해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양씨는 흔히들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이치와 달리 느리고 단순함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다. “고속도로와 고속열차의 발달로 종점만 커지는 가운데 지방은 공동화한다는 한탄이 섞여 나와요. 저는 반대로 느리게 걷고 이웃마을과 연결해 옛길을 개발하고 복원하는 데 관심을 두고 싶었어요.” 3만 불 시대 지역감정도 해소하고 자연과 친화적이면서 특산물판매에 전통문화 계승까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걷기를 택한 것이다.

최근 양씨는 <나의 옛길 탐사일기> 속편으로 <호남대로 걷기>를 쓸 예정이다. 지난해엔 기원전 30년쯤 서한시대 말 환관 출신의 사유(史游)가 편찬한 한자교본 <사유 급취장>을 펴내기도 했고 서점과 박물관 등을 기웃거리며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린 문화변동에 관심을 갖고 중국을 수십 차례 방문해 모은 탁본과 자료로 한중문화관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조선시대 31개 역 더듬어 꼼꼼기록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처럼 우리나라를 돌며 기록영화를 꼭 한 번 만들고 싶어요. 영화 찍어줄 사람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감독을 섭외 못했네요.”

최근 길에서 묻고 해답을 찾으려는 서적이 많이 나왔다. <나의 옛길 탐사일기> 역시 그런 많은 서적 중 하나로 서점에 꽂힐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기록한 탐사일기는 역사와 문화를 함께하고 있다는 데서 기존 서적들과는 조금은 다르다. 그리고 그 길이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우리 땅이고, 접근도 무척이나 한국적이라는 데 의미를 더 두고 싶다.

양효성은
1946년 7월2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6살이 되던 해 전쟁이 나면서 전남 보성으로 피난을 갔다. 광주로 옮겨 서석초등학교와 광주서중을 거쳐 다시 서울로 오지만 피난시절 서당에서 배운 천자문을 잊지 않고 관심을 가져왔다. 1965년 서울고와 1973년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지금까지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이사·상임이사·연구위원을 거쳐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1980년 인하대 교육학 석사시절 <한자표기어와 한글표기어의 정서의미비교 연구>로 논문을 썼고 1992년엔 인하대 문학석사시절 <정서의미의 일연구-정치언어를 중심으로>란 논문을 쓰기도 했다.

1982년부터 2005년까지 인하대사부고에서 국어, 한자, 문학을 가르쳤고 1989년부터 유럽 100대 박물관 견학을 비롯해 대만, 일본, 미국, 중국, 동남아 등지의 문화시설을 탐방했다. 또 1999년부터 2004년까지는 5차례에 걸쳐 중국 ‘연천학회’ 대표로 북경 농업대, 지질대에서 청소년 교류를 맡기도 했다. 또 2007년 중국 료녕(遼寧)대학에서 한국어 연수를 맡았다. 2008년 한자교본 <급취장>을 펴낸 데 이어 2009년 죽령대로 31개 역을 도보로 걸어 <나의 옛길 탐사일기>를 펴냈다. 최근엔 호남대로에 이어 다양한 문화·교육활동에도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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