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풍요 속 황폐’ 중국 사회를 관통하는 여행

한윤정 기자

▲1988…한한 지음·김미숙 옮김 | 생각의나무 | 288쪽 | 1만2500원

중국 문단의 이단아. 바링하우(80後·1980년 이후 출생한 신세대)의 대표 주자, 블로그 방문자 4억5000만명인 젊은 문화권력, 랭킹 1위 카레이서, 여배우 쉬징레이와의 스캔들, 2010년 ‘타임’지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선정….

모두 작가 한한(韓寒·29)을 가리키는 말이다.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각종 글짓기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냈으며, 부패한 교육현실에 대한 반항적 기질 때문에 고등학교 때 일곱개 과목에서 낙제, 유급당한 뒤 17세에 자퇴한다. 그리고 그해 처음 발표한 소설 <삼중문>이 200만부 이상 팔리면서 일약 중국 문단의 스타로 떠오른다. 그의 소설은 개혁·개방 이후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황폐,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억압을 동시에 겪는 중국 젊은이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한한 이전에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인 위화, 쑤퉁, 모옌 등이 전근대적 농촌 풍경을 배경으로 문화혁명기의 참상을 고발하던 데서 한 세대가 더 지났다.

[책과 삶]‘풍요 속 황폐’ 중국 사회를 관통하는 여행

지난해 발표한 <1988>은 감옥에서 나오는 친구를 만나러 차를 몰고 가는 화자가 우연히 만난 매춘부와 동행하는 사흘간의 일을 로드 무비 형식으로 그린 작품이다. 현재 상황과 맞물려 주인공의 과거가 회상되면서 마지막에 여러 가지 의문이 동시에 풀리는 구조를 갖고 있다. 여행을 통해 동시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자아를 회복하는 과정은 매우 익숙한 모티브다. 당장 존 스타인벡의 <찰리와 함께한 여행>,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가 떠오른다. 미국 대륙횡단여행의 여정처럼 <1988>에도 황량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국도, 여행자를 기다리는 모텔과 식당, 주유소 그리고 뜻밖에 만난 반려자들이 등장한다.

‘나’는 1988년에 출시된 스테이션 왜건을 몰고 국도를 달리고 있다. 곧 출소할 친구는 고철상 앞에 버려진 1988(차)을 껍데기만 빼고 모조리 고쳐 주었다. 첫날 투숙한 여관에서 나나란 이름의 매춘부가 화자의 방으로 뛰어든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아이를 임신한 나나는 출산과 양육비용을 벌기 위해 자신을 부를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방에 공안이 들이닥치고 나나는 2만위안의 벌금을 물게 된다.

나나는 자신이 한때 일했던 사우나의 손사장을 찾아가려고 한다.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다. 시골 출신인 그녀는 보다 풍요로운 삶을 꿈꾸는 동시대 중국 여성들의 대표 격이다. 그러나 나나의 현실은 혹독하기만 하다. 손님들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하고 때때로 공안에 끌려가 벌금을 털린다. 벌금을 낼 돈이 없을 때는 몸이라도 바쳐야 한다. 그래도 그녀는 임신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아이가 크면 한국에 유학 보내고 싶다는 거창한 생각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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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의 과거도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오른다. 첫 기억은 초등학생 때 국기봉에 올라갔던 일. 밑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가슴을 졸이는 사이, ‘나’는 나중에 첫사랑이 된 남색 치마를 입은 여학생을 보게 된다. 화자의 유년기는 무엇이든 잘하는 대학생 띵띵형, 담대하고 난폭한 성격으로 두목 노릇을 하는 10번, 말괄량이 여학생들, 애니메이션 ‘황금성투사’와 대만그룹 ‘소호대’ 같은 대중문화에의 매혹 속에서 흘러간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남색 치마의 주인공이 리우인인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세월이 흘러 화자는 기자가 되고 배우지망생인 멍멍과 사귄다. ‘나’의 시야에도 중국 사회는 부패하고 냉혹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완전히 타인이던 ‘나’와 나나의 인생은 여정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엮인다. 오래 전에 헤어진 멍멍은 나나의 동업자들이 가장 동경하는 고급 매춘부 멍신통이다. ‘나’는 솔직하고 불행한 나나에게 연민을 느끼고 진찰을 위해 병원에 데려가는데 진단을 받은 그녀는 갑자기 사라진다. 출소하는 친구 역시 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1988>은 중국 사회의 축도다. 한한은 타락한 체제와 절망적인 사람들을 허무하면서 낭만적인 시선에 담아낸다. 풍요롭고 비정한 미국사회에 ‘이유 없는 반항’을 했던 제임스 딘의 중국판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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