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강경애의 ‘소금’

두만강 푸른 물, 그리운 내 님이여

1919년 3·1운동은 결국 일제와 조선 민중 사이의 민족적·사회적 모순의 극대화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만, 그 전 해부터 노동자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과 청년 학생들의 국내외 연대 속에서 무르익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면서 1920년대 접어들어 조선공산당의 전국 조직 결성이 3차례에 걸쳐 시도되었다. 초기부터 상해와 이르쿠츠크,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하여 모스크바의 코민테른과 연결되었던 조선공산당 운동은 지도부가 검거되는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노동자, 농민 그리고 청년 학생들 사이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내가 강경애의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가슴이 저렸던 것은, 해방과 분단 이전에 죽어서 식민지 사회주의자의 흔적만 보이는 그녀의 작품들이 아직도 좌우 대립의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보면 강경애는 이른바 카프라든가 중앙문단과는 거리를 두면서 민중적 삶의 현장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작가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작가’로는 거의 유일하게 그녀의 장편소설 <인간 문제>는 식민지시대 최고의 리얼리즘 문학으로 평가되곤 한다. 그녀의 작품들은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고 카프를 비롯한 프로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1980년대 말에 와서야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에서는 강경애를 이기영에 버금가는 선구적인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작가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강경애는 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머슴 출신의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네 살 적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병약한 어머니는 장연으로 후살이를 들어가게 된다. 계부는 부자였지만 환갑이 지난 나이에 몸도 불구여서 강경애의 어머니는 후처가 아니라 몸종과 다름 없었다.

전처 소생의 아들과 딸이 있어 데리고 들어간 자식인 그녀는 주위의 따돌림을 받았다. 어릴 적에 방안에 굴러다니는 ‘춘향전’을 보고 스스로 한글을 깨우쳤고, 동네 사람들이 그녀를 데려다 과자를 사주며 이야기책을 읽게 했다고 한다. 열 살이 지나서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장연소학교에 들어갔고 이어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했으나, 3학년 때에 독서회와 동맹휴학 주동으로 퇴학을 당한다. 강경애는 1924년 무렵에 장연 태생의 동경유학생이던 양주동을 만나 서울로 올라와서 동거하며 동덕여학교에 편입하여 일년 여를 수학했다. ‘금성’지에 강가마(姜珂瑪)라는 필명으로 ‘책 한권’이라는 시를 발표하고 양주동과 헤어져 언니가 경영하는 장연의 서선여관에서 기거한다. 이듬해 ‘조선문단’에 ‘가을’이란 시를 발표했고 20년대 후반까지 그녀는 주로 장연에 거주하면서 습작과 독서를 하는 한편 ‘흥풍야학교’를 개설하여 가난한 집 아이들을 가르쳤다.

1929년 강경애는 신간회와 더불어 창립된 여성운동조직 ‘근우회’의 장연지회 회원임을 밝히면서, 조선일보에 “염상섭씨의 논설 ‘명일의 길’을 읽고”라는 글을 투고했는데 이 글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을 드러내 보였다. 이때 강경애가 처음 중국으로 가서 2년간 방랑생활을 했다는 견해가 있다.(북한 측 김헌순 ‘강경애론’) 그녀는 강사 노릇도 하고 무직으로 굶주리며 고생도 했다는데 이 때의 체험으로 나온 것이 단편 ‘그 여자’라고도 한다(북한 측 채미화). 또한 나중에 장편소설 <인간 문제>의 무대가 되었던 인천의 노동현장에 있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이 시기 공산주의 운동 조직과도 관련을 가지고 1930년 1월24일에 있었던 김좌진 장군 암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견해도 있다.(남한 측 광복회장 이강훈 증언) 그러나 그녀가 간도에 간 것은 1931년 이후라는 설(연변 측 장춘식), 동명이인설(중국 측 이광인) 등 구구하다.

이런 후일담이 논쟁거리가 된 것은 2005년 문화부가 강경애를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데 이어 ‘월간조선’이 ‘강경애가 김좌진 장군의 암살을 사주한 김봉환의 동거녀였고, 김봉환과 함께 암살을 공모하기까지 했다’는 이강훈 전 광복회장의 생전 증언을 인용 보도한 것이 발단이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강경애와 김봉환 두 사람이 하얼빈 영사관 경찰부 소속 마쓰시마 형사의 회유로 변절, 공산계 급진주의자를 사주하여 김좌진 장군을 암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김좌진 장군의 암살이 일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알력으로 인해 간도지방에 지부를 둔 적기단이 감행한 것으로 본다. 또 여러 자료를 종합할 때 김봉환의 동지였던 여성은 강경애가 아니라 황해도 출신으로 고려공산당 여자선전부원으로 활동했던 김경애로 보인다.

강경애는 1931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파금(破琴)’을 발표하며 등단한다. 같은 해에 장연 군청서기 출신인 장하일과 결혼하여 간도 용정으로 이주하고 처음 두만강을 건넌다는 수필을 남기고 있다. 남편은 구여성과 결혼했던 전력이 있었고 간도 동흥중학의 교사로 취직했다.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혜성’ 잡지에 연재한다. 1934년 <소금>을 ‘신가정’에 발표하고, 같은 해 8월부터 12월까지 그의 대표작이자 식민지시대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인간 문제>를 연재한다. (해방 이후 이 작품은 남과 북에서 비록 시간 차이는 있으나 번갈아 출판되었고 1955년에는 러시아어로 출판되었다.) 1936년 간도 용정에서 안수길·박영준 등과 함께 ‘북향(北鄕)’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나 건강 사정으로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못했다. 이후 해마다 단편소설을 꾸준히 발표하고 조선일보 간도 지국장을 역임하다 1939년 지병으로 고향 장연으로 돌아온다. 1944년 병이 악화되어 한 달 전에 작고한 모친을 부르면서 숨진다.

강경애의 ‘지하촌’을 읽은 것은 아마도 1980년대 말쯤이었을 것이다. 확실치 않은 이유는 내가 강경애의 이 작품을 읽고는 대뜸 최서해(학송)의 ‘기아와 살육’이라든가 ‘홍염’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는 오랫동안 최서해의 ‘지하촌’이라고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지나서 1990년대 중반 공주교도소 시절에 누군가 넣어준 창비판 <인간 문제>를 읽고 강경애를 똑바로 주목하게 되었다. 문단에서는 변방이나 식민지 해방투쟁의 최일선 현장이었던 간도에서 획득한 강경애의 현실주의는 ‘소금’과 <인간 문제>에서 정점을 이룬다.

<인간 문제>의 주인공 선비는 고향 마을에서 지주의 횡포로 아버지를 잃고 그에게 농락당하고는 인천의 방직공장 노동자가 된다. 선비를 좋아하던 소작농 첫째 역시 추수 마당에서 지주와 충돌하여 주재소에 잡혀갔다가 인천 부두노동자로 나오며, 지식인 신철에 의하여 의식화된다. 신철은 동요하는 지식인으로 소시민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전향하고 선비는 병으로 쓰러지는데, 첫째는 눈을 부릅뜨며 선비의 삶과 죽음이 개인의 소멸이 아닌 역사의 흐름이라고 파악한다. 이후 3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만주에서의 투쟁은 침체기에 들어가고, 강경애의 현실인식도 ‘지하촌’ ‘마약’ 같은 작품으로 암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에 비하면 ‘소금’은 식민지 지배와 중국인 지주에 예속되어 이중적 억압에 짓눌린 봉식 엄마의 생존과 자각에 관한 힘찬 이야기다. 그녀의 남편은 중국인 지주 팡둥과 함께 있다가 공산당 유격대가 쏜 유탄에 맞아 죽었는데 공산당·자경단·중국 보위대, 모두가 민중들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세력일 뿐이었다. 그녀는 먹고 살기 위해서 국경을 오가며 소금밀수 길에서 만나게 된 항일유격대와 소금을 빼앗고 잡아가는 순사를 비교하면서 자신의 적이 정말 누구인가를 ‘벌떡 일어나며’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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