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휩쓸고 간 뒤 휴전이 되었지만 전국의 도시와 마을이 폐허로 변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도 이념의 공황상태가 찾아왔다. 마침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근대 이후의 여러 사상적 징후와 조류가 차츰 모습을 드러내는 가운데 실존주의가 번성하는 중이었고, 그것은 전후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4·19 이후 ‘순수·참여 논쟁’ 때까지 실존주의의 유령이 한국 문단을 배회했다. 실존주의에 대하여 새삼 언급하는 것은 이번에 소개하려는 단편소설 ‘요한시집’을 발표하며 장용학 스스로 이 작품은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고 나서 “눈앞이 확 트이는 듯한” 영향을 받고 쓴 작품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구토’의 주인공 로캉댕은 길에서 종이를 집으려다가 구역질을 느끼면서 ‘자기 변화의 범위와 성격을 정확하게 규명하기 위하여’ 이 기록을 쓰기 시작한다고 그랬다. 사물들이 인간에 의해 부여된 의미를 벗어버리고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자체로서 충족된 상태로 나타날 때,...
2012.03.23 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