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이 뽑은 한국 명단편

19건의 관련기사

  • (16) 장용학 ‘요한시집’

    전쟁이 휩쓸고 간 뒤 휴전이 되었지만 전국의 도시와 마을이 폐허로 변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도 이념의 공황상태가 찾아왔다. 마침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근대 이후의 여러 사상적 징후와 조류가 차츰 모습을 드러내는 가운데 실존주의가 번성하는 중이었고, 그것은 전후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4·19 이후 ‘순수·참여 논쟁’ 때까지 실존주의의 유령이 한국 문단을 배회했다. 실존주의에 대하여 새삼 언급하는 것은 이번에 소개하려는 단편소설 ‘요한시집’을 발표하며 장용학 스스로 이 작품은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고 나서 “눈앞이 확 트이는 듯한” 영향을 받고 쓴 작품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구토’의 주인공 로캉댕은 길에서 종이를 집으려다가 구역질을 느끼면서 ‘자기 변화의 범위와 성격을 정확하게 규명하기 위하여’ 이 기록을 쓰기 시작한다고 그랬다. 사물들이 인간에 의해 부여된 의미를 벗어버리고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자체로서 충족된 상태로 나타날 때,...
  • (15) 김동리 ‘역마’

    김동리는 1913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명은 창봉, 자는 시종이고 필명은 동리였다. 그의 가계가 유학자의 집안이었지만 어려서부터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모친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김동리의 아버지는 오십이 넘어 늦둥이로 그를 보게 되었는데 환갑을 두 해 앞두고 사망했고 그의 맏형이 호주가 되었다. 맏형 김범부(金凡父)는 1897년생으로 김동리의 아버지이자 그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동서양 철학에 해박한 ‘거리의 철학자’로 <주역>과 <삼국유사>에 정통한 ‘신라정신의 대부’로 불렸다. 김범부와 아우 김동리의 사상적 밑바탕에는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에서 태어난 것과 이곳이 동학의 수운과 해월의 고장이었다는 점 이외에 김범부의 일본 도요(東洋)대학 유학 기간 중 접한 ‘다이쇼 교양주의’의 영향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근대적 개체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불안한 ‘개체’와 그 ‘개체를 초월하는 것...
  • [황석영이 뽑은 한국 명단편](14) 황순원 ‘목넘이마을의 개’

    (14) 황순원 ‘목넘이마을의 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확인해 보려고 지금 여기까지 걸어왔다. 한데 아직도 막막하기만 하다.’(황순원, <말과 삶과 자유>에서) 해방으로 식민지 시대가 끝났지만 곧 이어 전쟁이 벌어졌고 한국 현대문학은 휴전협정이 종결된 1953년에 재출발했다는 설은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이는 아마도 분단 고착화 이후 ‘남한 현대문학’의 출발점으로서 타당하게 보인다. 아니 정확하게는 식민지시대를 벗어나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분단시대의 한국문학’인 것이다. 나는 그 시작을 황순원으로 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가 있어서 채워야할 여백과 새로 나아갈 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하얀 한지에 짙은 묵으로 찍혀진 난의 잎새처럼 그의 세계는 섬세하고 부드럽지만 비바람에 시달린 기개가 엿보인다. 황순원은 1915년 평남 대동군에서 황찬영의 장자로 태어났다. 그는 평양의 전설적인 ‘황고집’으로 알려진 효자 집암(執庵) 황순승(黃順承)의 후손이다. 숭실중학...
  • (13) 계용묵 ‘별을 헨다’

    1945년 초 제2차 세계대전 승전연합국들의 얄타협정에서 신탁통치안이 협의되었고, 몇 달 뒤 포츠담선언에서 한반도를 삼팔선으로 분할해 남에 미군이, 북에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종전 처리하는 걸 약정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삼팔선은 애초에 작전 편의상 구획했던 군사적 임시조치에 지나지 않았으나 미·소 양 진영의 냉전이 세계화하면서 정치·군사적 분단선으로 고착되었다. 우리 식구는 만주 장춘에 살다가 해방되면서 귀국하여 어머니의 친정인 평양에 일단 짐을 풀었다. 내 기억도 그 즈음에서 시작되는데 모란봉이 건너다 보이는 전차 종점 부근의 어느 적산가옥 이층에 살았다. 아래층에는 소련군 장교 부부가 살았는데 가끔씩 부인이 나를 데리고 들어가 음식을 해 먹이곤 하였다. 어머니는 그녀가 날생선이나 아마도 캐비어일 듯싶은 통조림 알을 얹은 비스킷을 내게 먹여 배탈이 날까봐 염려하곤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시내 번화가에 양장점을 냈는데 소련군 장교나 하사관 부인들이 와서 원피스며 블라우스를...
  • (12) 안회남 ‘불’

    안회남은 1909년 을 쓴 작가 안국선의 외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안국선은 개화기 대표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도쿄전문학교 정치과를 나와 독립협회의 이승만, 이상재 등과 연루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진도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이숙당과 결혼했으며 한때는 청도 군수도 지냈다. 이후 경제계에 투신하여 금광과 미두 사업에 손을 댔으나 실패하고 급격히 몰락하게 되었다.안회남(본명 필승)은 수송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동창생인 김유정과는 그가 필승에게 마지막 유서를 남겼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1927년 부친이 죽자 안회남은 학교를 그만두고 ‘개벽’에 입사해 십여년간 창작에 전념했다.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발(髮)’이 입선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 구인회 동인들과 함께 활동을 했던 안회남의 초기 작품은 평론가 김동석이 ‘부계의 문학’이라고 이름 붙일 정도로 신변적 내향성을 띠고 있었다. ‘연기’ ‘명상...
  • (11) 지하련 ‘도정(道程)’ 下

    지하련의 단편소설 ‘도정’은 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발표됐고, 조선문학가동맹 제1회 조선문학상을 수상했다. 급작스럽게 찾아온 해방 후의 혼란스러운 풍경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묘사한 작품인데 이런 평가를 받았다. “해방 직후 국내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민주주의운동에 있어서 양심의 문제를 취급한 거의 유일한 작품으로서, 새로운 조선문학이 창조하여 나갈 인간형상의 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으며, 심리묘사 및 인물의 형상화에 있어 작자의 비범한 자질과 더불어 우리들 가운데 있는 소시민의 음영을 감지하는 예민한 감각은 주목에 값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도정’은 일제의 혹독한 억압에 한때 굴복했던 식민지 인텔리겐치아의 비판적 자화상이다. 소설에서 당 가입서에 ‘소 부르주아’라고 쓴 뒤 ‘나는 나의 방식으로 소시민과 싸우자’고 결심하는 주인공의 반성은 그녀와 남편 임화의 당시 심경을 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당시 임화의 일상은 공식 문건과 정치행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지만 지하련은 최정...
  • (11) 지하련 ‘도정(道程)’ 上

    시대의 변화란 영을 넘는 것처럼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길을 치달아 오르다가 문득, 영마루에 이르고 시야가 훤히 트이면서 새로운 정경이 눈 아래 전개되는 것과도 같다. 바로 몇 발짝 전의 그 순간과 생판 다른 세계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식민지에서의 해방은 바로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하련(池河蓮)은 누구인가.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남아있는 작품도 단편소설 열 편이 못되는 여성작가를 거론하면서 해방 이후의 새로운 시대를 논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하련은 카프(KAPF)의 조직자요, 이론가였던 시인 임화의 아내였다. 지하련을 논하는 것은 임화를 얘기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을 함께 말하지 않고는 일제말과 해방공간의 문학과 혁명을 얘기할 수 없다.임화(林和, 본명 林仁植)는 1908년 서울 낙산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1921년 보성고보에 입학했는데 모친의 사망과 집안의 파산으로 학교 중퇴와 함께 가출, 독서에 몰입하면서 사회주의와 최신 ...
  • (10) 김사량 ‘빛 속으로’

    나는 식민지 시대의 작가와 작품 열편을 뽑으면서 마지막으로 김사량이 있다는 점이 든든했다. 그는 오랫동안 남과 북에서 제외되고 잊혀진 작가였다. 1973년 재일 문학가들에 의해 일어판으로 5권이 출판되었고 1987년에 북에서, 그리고 1989년에 남에서 뒤늦게 그의 작품집이 나왔다. 김사량은 재일동포가 아니며 일제 말의 중국 망명과 해방 이후 월북, 전쟁 참여와 행방불명 등으로 극적인 현대사의 폭풍 가운데 있었음에도, 그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은 남도 북도 아닌 재일작가들이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김사량(金史良)의 본명은 시창(時昌)이었고 1914년 평양에서 주물공장을 하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형 시명은 교토 대학을 나와 조선총독부의 관료가 되었고 미군정 치하에서 전매청장을 지냈다. 김사량은 평양고보 5학년 재학 중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일본군 배속장교 배척운동으로 퇴학을 당한 뒤 1933년 사가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했다. 일본 문우들과 함께...
  • (9) 이상 ‘날개’

    서구 모더니즘의 다양한 전위적 문예운동은 대개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출몰했으며 진정한 20세기의 출발을 그때쯤으로 본다. 이미 박태원의 장에서 구인회의 출현을 당시의 내지(일본)와 식민지 조선의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논하였는데 일본에서도 1930년대 초반의 대탄압 뒤에 시를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 운동이 활발해진다. 변화의 선진에 있던 일단의 시인들인 하루야마 유키오, 기타가와 후유히코, 호리구치 다이가쿠 등이 중심이 되었던 문예지 이 나왔고, 이들을 김기림·정지용은 물론 이상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재학할 때부터 탐독했다. 이 잡지에는 서구 모더니즘에서 파생된 최신 아방가르드 경향의 비평과 시가 집중적으로 소개됐다. 유럽의 문예운동에서 심리주의 상징주의 다다이즘 데카당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은 모더니즘의 다양한 형태로서 매 시기의 전위주의에 속한 것들이었다. 아방가르드의 명성이 높아지게 된 것은 성숙이나 전통을 희생한 대가로 젊음이나 이러한 젊음이 지니는 목표를 낭만주의...
  • (8) 강경애의 ‘소금’

    1919년 3·1운동은 결국 일제와 조선 민중 사이의 민족적·사회적 모순의 극대화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만, 그 전 해부터 노동자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과 청년 학생들의 국내외 연대 속에서 무르익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면서 1920년대 접어들어 조선공산당의 전국 조직 결성이 3차례에 걸쳐 시도되었다. 초기부터 상해와 이르쿠츠크,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하여 모스크바의 코민테른과 연결되었던 조선공산당 운동은 지도부가 검거되는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노동자, 농민 그리고 청년 학생들 사이에 급속히 전파되었다.내가 강경애의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가슴이 저렸던 것은, 해방과 분단 이전에 죽어서 식민지 사회주의자의 흔적만 보이는 그녀의 작품들이 아직도 좌우 대립의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보면 강경애는 이른바 카프라든가 중앙문단과는 거리를 두면서 민중적 삶의 현장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작가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작가’로는 ...
12
Today`s HOT
대만의 한 백화점에서 벌어진 폭발 사건 2025 에어로 인디아 쇼 파키스탄 여성의 날 기념 집회 미 트럼프 대통령의 가자지구 소유 계획,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
오만에서 펼쳐지는 사이클링 레이스 행운과 번영을 기원하는 대만 풍등 축제
베를린 국제영화제를 위한 준비 부처의 가르침 되새기는 날, 태국의 마카부차의 날
중국 정월대보름에 먹는 달콤한 경단 위안샤오 유럽 최대 디지털 전시, 런던 울트라 HD 스크린 중국 하얼빈 남자 싱글 피겨, 2위에 오른 한국의 차준환 맨유의 전설 데니스 로, 하늘의 별이 되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