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당의 김영철 공세··· 그 내막과 진실

이대근 논설주간


[이대근의 단언컨대] 한국당의 김영철 공세··· 그 내막과 진실

■ 왜 김정은이 아닌 김영철인가

북한의 김영철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25일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함께 평창 동계 올림픽 폐막식 참석차 남쪽으로 왔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김영철이 오는 길목인 통일대교 남단의 도로를 점거한 채 방문 반대를 외치며 농성과 시위를 했다. 한국당에서 떨어져나와 국민의당 일부와 합친 바른미래당도 그런 한국당을 추종하고 있다.

한국당의 주장은 24일 의원 일동으로 발표한 ‘천안함 폭침 주범 김영철 방한 철회 촉구 결의문’에 잘 담겨 있다. 결의문은 “대한민국 적화통일에 앞장 서 온 정찰총국 책임자인 김영철은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목함지뢰 도발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주도한 원흉”이라고 단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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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없는 재판하는 한국당

그러나 한국당 의원일동은 김영철이 천안함 폭침 주범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김영철이 주범이라는 근거를 제시하는 인물이나 단체를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국가정보원도, 통일부도 모른다고 하는 주범을 한국당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적어도 직전 집권세력이었고 지금도 제1야당으로 국정의 일부를 책임지고 있는 주요 정치집단이 결의 같은 것을 한다면 분명한 증거와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더구나 그의 방문을 수용했다는 이유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국민과 역사 앞에 씻지 못할 죄로 기록될 것이다”라는 준엄한 역사적 심판을 내릴 생각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과거 집권 때 국정원 기록을 뒤져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한 바 있는 한국당이 이 중차대한 문제를 두고 왜 이명박 정부 때 발생했던 천안함 사건 기록을 찾아내서 주범을 밝혀내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한국당은 지금 문대통령에 대해 ‘증거 없는 재판’을 하고 있다. 그런 걸 우리는 흔히 마녀사냥이라고 한다.

한국당은 ‘김영철 방한’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이다. 방한이 타당한 용어 선택이 되려면 김영철은 한반도 밖 외국에서 왔어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의 밖에 김영철의 나라는 없다. 김영철 방한이라니, 그가 외국인이라는 뜻인가, 외계인이라는 뜻인가. 한국당 결의의 첫 번째 주장은 “김영철의 방한을, 대한민국과 5000만 국민은 결사반대한다”는 것이다. 누가 한국당에게 대한민국을 대표할 자격을 부여했는지 모르지만, 대단한 자부심이다. 거기에다 5000만 국민이라니! 한국당 의원들은 정말 하는 말들이 전부 거짓말이다.

천안함을 공격한 북한 어뢰정 한 척이 북한의 어느 무력 조직 소속인지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 무력 조직은 복잡하다. 게다가 조직 개편도 잦은 편이다. 당 소속도 있고, 인민무력부 소속도 있고, 호위사령부처럼 독립된 무력도 있다. 이 가운데 대남 도발할 수 있는 무력 조직을 추려 낼 수는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조직 소속인지 북한이 자백하지 않는 한 알기 어렵다 설사 정보 당국이 알았다 해도 그걸 공개할 수는 없다. 남측의 정보원, 정보능력을 북한에 알려주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누가 했는지 정확하게 모른다고 해서 우리가 대남도발 행위에 대해 포괄적으로 북한의 대남 기구를 대표하는 정찰총국을 비난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대남도발에 책임이 있을 것으로 추론하는 정찰총국을 일반적으로 비난하고 공격하는 일과, 정찰총국장이었던 김영철을 지목해 주범이라고 단정하고 책임을 묻거나, 그런 명목을 들어 남북관계와 핵문제를 진전시키는 과제를 논의할 상대인 김영철의 방남을 막겠다며 의원들이 떼 지어 농성하고 시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전쟁 위기, 안보위기를 감내해서라도 김영철의 방문을 막아야 할 아무런 근거도 정당성도 현실성도 없다.

김영철 과대평가하는 한국당

김정은은 천안함 사건 전에 이미 김정일로부터 군권을 넘겨받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정은이 공식적으로 군권을 행사한 시점은 천안함 사건 2개월 뒤인 2010년 9월 조선인민군 대장이자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을 때지만 실질적 군권행사는 그전이었을 것으로 관측되어 왔다. 북한에서 군지휘권을 행사하는 기구는 당중앙군사위이다. 김정일이 위원장이지만 김정은이 부위원장으로서 아버지 권위를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당이 천안함 침몰의 책임 소재를 제대로 따지려는 게 진짜 목적이라면 초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은 군지휘체계상 김정은이 지시하거나 승인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하다. 정찰총국이 도발했는지, 김영철이 주범인지도 모르면서 목소리만 높인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한국당이 정말 주범 심판 의지가 있었다면 문대통령이 김여정의 남북정상회담 제의를 수용했을 때 어떻게 주범과 웃으며 악수하고 밥을 먹겠다니 말이 되느냐며 농성하고 시위하며 결사반대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김정은이 한국당에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지휘권은 자신에게 있는데 천안함 및 연평도 성과가 온전히 김영철의 것이라고 하니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까?

한국당은 진짜 주범 김정은에 별 관심이 없다. 그 때문에 주범 단죄가 한국당의 의도가 아니라는 의심이 든다. 그냥 남북관계 악화시키고 북핵 위기 고조시켜 ‘문재인 정부 안보 무능’이라는 지방 선거 구호 하나를 만들어내려고 저 난리인 것이다.

■ 1983년 북한의 아웅산 테러와 남북 비밀 접촉


한국당의 주장의 핵심은 대남도발을 한 당사자와는 대화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북관계사를 보면 그 반대였다. 북한의 도발로 남북관계가 위기에 처할수록 남북은 긴밀히 대화를 했다. 바로 그 때문에 전쟁을 막을 수 있었고 평화 시기도 누릴 수 있었다.

테러에 보복 대신 정상회담 제의한 전두환

1983년 10월 북한은 버마 아웅산 테러를 자행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그 끔찍한 사건에도 아랑곳없이 1년 2개월만인 1985년 연 초 국정연설을 통해 남북한 최고 책임자 회담을 제의했다. 전 대통령은 회담 장소가 평양, 서울, 모스크바, 베이징 어디든 상관없다며 그 해 후반기 정상회담 달성을 원칙으로 제시했다. 박철언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통해 전쟁 위기를 촉발하는 북한의 대형 도발에 전 대통령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1985년 5월 27일 남북은 12년 만에 서울에서 적십자 회담을 개최하고, 대표단 일원이었던 림춘길 노동당 부부장을 박철언이 만나 고향방문 및 예술단의 교환 방문에 합의했다. 분단 40년만의 상호 방문이었다. 7월 11일에는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한시해 당부부장과 박철언간 첫 비밀 접촉을 가졌다. 박철언은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는 정상회담이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라고 강조했고. 북측 한 대표도 공감을 표했다. 이후 두차례 더 접촉을 갖고 북한의 허담 노동당 비서가 김일성 주석 특사로 서울을 방문하기로 합의했다.

왜 아웅산 테러 사과 받기를 포기했나

그 때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이 전대통령의 지시라며 박철언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버마 참사(아웅산 테러)에 대한 유감 표시가 없으면 정상회담을 할 필요가 없다. 박 특보가 한시해 대표를 만나서 허담 특사가 유감의 뜻을 표시해야 접촉이 가능하다고 서전에 설명하도록 하라, 북의 특사가 유감을 표명하지 않을 때에는 김일성 주석을 만날 때라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특사를 만날 필요도 없고, 내(전대통령)가 평양에 갈 필요도 없다.”

그러자 박철언은 “제3자가 사과한 사실을 안다는 것이 북한에서는 문제다, 또 아웅산 테러 사건의 공식 사과는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이 알게 될수록 정상회담의 실현이 곤란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철언은 전대통령을 만나서도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다. “허담 북한 특사의 대통령 각하 면담 전에 정세동 부장이 허담 특사에게 아웅산 사건에 대한 사과를 종용하고, 대통령 접견 시에도 (허담의)사과 언급이 없으면 그 때 (대통령이) 아웅산 사건을 언급하되, 우리가 북측으로부터 사과 받을 수 있는 최대치는 과거를 잊고 새 출발을 하자는 정도일 것입니다. 아웅산 문제의 공식적 시인은 자칫 북한에 치명적 굴복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도로 민감한 문제입니다.”

드디어 1985년 9월 4일 허담 특사가 서울에 왔다. 그는 전 대통령 접견 전 장세동 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그 문제(아웅산 테러)를 시인할 수도 없고 사과할 수도 없는 게고 또 남측에서 그러 우리보고 시인하고 사과하라든가 이렇게 되면 결국은 우리가 큰 일을 망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역사가 밝힐 것이니 과거를 불문하고 앞으로 그러한 불행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노력합시다.”

김일성 찬양한 전두환

다음 날 허담 특사 일행이 전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났다. 전대통령은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1983년도에 내가 버마에서 그 일을 당하고 왔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군이 전쟁 계획을 갖고 왔지만 “지금 전쟁할 시기 아니다, 내가 명령할 때 하라”고 말해두었다며 특사일행에게 간접 경고하는 것으로 끝냈다. 이어 허담은 김주석의 친서내용을 낭독하자 전대통령은 “(김주석이)40년 전에는 민족해방 운동으로, 그리고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애써 오신 충정이 넘치는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추어올렸다.

전대통령은 또 “김주석께서도 서울에 오시고 하여야 할 터인데, 그 어른은 평생을 통해 아마 이쪽에 한 번도 안 와보신 걸로 알 고 있습니다만”하고는 허담에게 김주석 건강관리에도 신경 써 줄 것을 당부했다. 김주석이 서울을 방문하여 여행도 한번 해보기를 기대한다며 신변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웅산 사건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겠다는 암시였다. 허담 일행은 저녁에 요정인 삼청각에서 ‘엄선된 몇 병의 여성 봉사원, 밴드가 동원된 술자리를 했다. 아웅산 테러를 저지른 주범의 부하들을 전두환 정권은 극진히 대접했다.

무장 간첩선 도발에도 남북 회담

1985년 10월 16일 박철언은 장세동부장과 함께 첫 방북을 해서 김일성 주석을 면담했다. 그런데 김일성 면담 나흘 뒤인 10월 20일 북한이 다시 도발을 했다. 북한 무장 간첩선 한 척이 부산 청사포 앞 바다에서 남측 군에 의해 격침당한 것이다. 이 문제로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 조기 성사는 철회했지만 남북 왕래와 비밀접촉은 계속하며 ‘남북평화 공존’과 ‘통일 방안’을 협의했다. 이렇게 제5 공화국 기간에 33차례의 남북한 비밀 접촉을 했고 이중 16차례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에서 이루어졌다.

한국당은 자신의 과거에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는지 긴 설명을 해야 한다. 이는 모두 정권의 정통성이 없는 전두환 집권 때의 일이라고 무시하고 싶다면 노태우 대통령 시절 이야기로 옮겨가도 좋다.

■ 대한항공 폭파 사건과 7·7선언


13대 대통령 선거 직전인 1987년 11월 29일 북한 공작원 김현희는 대항항공 858기를 폭파, 탑승자 115명 전원을 살해했다. 그럼에도 노태우 당선자의 최측근인 박철언은 그 2개월 쯤 지난 1988년 2월 초 한시해 북측 대표와 제33차 남북 미밀 접촉을 가졌다. 박철언은 한 대표와 나눈 대화를 이렇게 기록했다.

테러에 스케이트 선물

“한시해 대표는 노후보가 당선되었으니 나에게 축하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당시 대선 직전의 대한항공 폭파 사건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고 선선히 인사를 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은 몰랐는지 모르지만, 이러한 일이 있어서 남북관계가 큰 위기다. 내가 개인적으로 당신을 공격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내부에서 북에 대한 응징론이 대두되고 남북간 심각한 상황에 진입될 우려가 있었다’고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나는 ‘하지만 내가 노 당선자를 비롯한 상부에 간곡히 말씀드려 이제 경우 고비를 넘겼다. 하마터면 다시는 당신을 보지 못할 뻔했다’며 예전에 한시해 대표가 개인적으로 부탁 했던 250㎜짜리 스케이트 한 벌 전해주었다.”

북측과 대통령 연설문 협의

그리고 5개월 뒤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즉 남북화해 조치를 담은 7·7선언을 발표했다. 다시 한 달쯤 지난 8월 4일 남북은 비밀 회담을 하고 북측에 서울올림픽 참관을 요청했다. 서울올림픽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을 폭파했다고 발표한 정부가 북한에게 서울 올림픽에 참관하라고 한 것이다. 그 뿐 아니다. 곧 대통령이 발표할 광복절 경축사에 남북정상회담의 필요성을 포함시킬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도 북측과 의견을 나누었다.

노대통령의 유엔 연설이 있은 다음 날인 10월 20일에도 남북 비밀 회담을 갖고 유엔 연설에 대한 북측의 반응을 확인했다. “새로운 대북 제의나 정책의 변화에 대하여 나(박철언)는 사전에 비밀 회담 또는 88핫라인을 통해서 북측 수석대표에게 알려주었다. 때문에 북측 반응도 미리 감지할 수 있어 우리의 정책 추진에 참고가 되었고, 북측 창구의 입지도 강화되어 상호 협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89년 7월 1일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서는 제13차 세계 청년학생 축전개막식이 있었다. 전대협에서 파견한 방북 대표 임수경이 바로 그 자리에 참석한 바 있다. 그날 주석단에는 특별한 인물이 있었다. 비밀 접촉을 위해 방북한 박철언 대통령 정책 보좌관이었다.

이것도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서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느낀다면 이명박 정부 때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다.

지난 2012년 3월 23일 천암함 피격2주기를 맞아 이명박대통령이 대전현충원을 방문, 천안함 46용사묘역을 참배하고 있는 모습.

지난 2012년 3월 23일 천암함 피격2주기를 맞아 이명박대통령이 대전현충원을 방문, 천안함 46용사묘역을 참배하고 있는 모습.

■ 천안함 침몰 사건과 남북정상회담 추진


천안함 사건 전 남북정상회담 추진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 침몰 사건 전 부터 북측과 정상회담을 논의했다. 이대통령은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에서 그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자서전에 따르면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먼저 제안해서 2009년 10월 17일 싱가포르에서 임태희 노동부장관과 김양건 부장이 만나 정상회담 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이어 11월 7일, 14일 개성에서 통일부와 북측 통전부간 실무 접촉을 통해 정상회담 개최 조건으로 북측에 대규모 지원을 할지를 두고 논쟁을 했다. 실무 접촉에서 진전이 없자 “북한은 곧바로 탄탄한 비선 구축을 제의해왔다, 나(이대통령) 역시 비공식적인 비선 접촉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협의를 진행했다. 2009년 연말부터 서로의 메시지가 오갔다”고 했다. 이렇게 정상회담 조건을 두고 남북간 실랑이 하는 와중인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사건이 터졌다. 정부는 5.24 대북 제재 조치 발표하며 북한에 강경 대응을 했다.

천안함 사건 이후 남북정상회담 추진

자서전에 따르면 북한은 2010년 6월 국가안전보위부 고위급 인사 명의로 이대통령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보냈다. 천안함 사건이 난지 불과 3개월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통령은 “2010년 7월 국정원 고위급 인사”가 방북하도록 했다. 천안함 사건 난지는 4개월, 5.24 조치를 취한지는 2개월만의 일이다. 자서전은 북측과의 협의에서 국정원고위급 인사가 천안함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하자 북측은 “(당사자가 아닌)동족으로서는 유감이라 생각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힐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쌀 50만톤 지원도 요구했다. 이대통령은 분명한 사과를 요구하며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연평도 포격과 남북 정상회담 추진

남북간 정상회담 조건 문제로 논의를 진행하던 2010년 11월 23일 북측이 연평도 포격 도발을 했다. 그래도 남북 접촉은 계속되었다. 포격 12일 뒤인 12월 5일 북측 인사가 비밀리에 서울로 들어왔다. 대좌 1명, 상좌 1명과 통신원 2명을 대동한 북측과 남북정상 회담 개최 합의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이대통령은 “우리와 접촉한 북측 인사가 공개 처형됐다”면서 이 문제로 국정원과 보위부의 접촉이 무산되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2011년 초 뉴욕에서 유엔 주재 북한대사와 외교채널 차원에서 접촉이 있었고, 사과 수준에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무산됐다고 한다. 그리고 2011년 5월 베이징에서 다시 남북 접촉을 통해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 사과 수준을 논의했다. 이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시종일관 사과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켰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발표한 내용은 다르다.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이 6월 1일 조선중앙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5월 19일 베이징 접촉 내용을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북남관계를 파국에로 몰아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리명박 역적 패당은 그것으로 하여 집권말기의 위기가 더욱 극심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한데로부터 올해 4월에 들어서면서 《〈천안〉호 침몰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에 대하여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으니 제발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을 가지자》고 거듭 간청하여왔다.

그러면서 리명박의 《대북정책》이 북에서 《오해》를 하고 있어 그렇지 사실은 북남 관계개선을 위한 것이라고 구구히 변명하였다. 그러나 5월 9일부터 비밀접촉마당에 나온 괴뢰통일부 정책실장 김천식, 정보원 국장 홍창화, 청와대비서실 대외전략비서관 김태효 등은 우리와 한 초기약속을 어기고 《천안》호 침몰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이 남북관계개선을 위하여 《지혜롭게 넘어야 할 산》이라며 우리의 《사과》를 받아내려고 요술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우리 측이 우리와 무관한 사건과 정정당당한 자위적조치를 두고 《사과》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다고 박아주자 《제발 북측에서 볼 때는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볼 때는 〈사과〉처럼 보이는 절충안》이라도 만들어 세상에 내놓자고 하면서 우리측에서 《제발 좀 양보하여 달라》고 애걸하였다.

우리 측이 당치않은 《사과》를 전제로 한 최고위급 회담 문제는 론의할 필요조차 없다, 당장 서울로 돌아가라고 하자 그들은 리명박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현 당국에는 시간이 없다는 것, 남북관계는 진보세력보다 보수세력과 손을 잡고 추진시키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나 접촉을 이어가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우리 측이 지금처럼 남측에서 《선 핵포기》와 두 사건에 대한 《사과》에 대하여 계속 떠들면서 반공화국적대시정책을 고집하는 한 최고위급회담개최는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한 립장을 밝히자 《최소한 두 사건에 대해 〈유감〉이라도 표시해 달라.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만나 이 문제를 결속하자. 그리고 〈정상회담〉 개최를 빨리 추진시키자》고 하면서 돈 봉투까지 거리낌 없이 내놓고 그 누구를 유혹하려고 꾀하다가 망신을 당하였다.

“유감이라도 표시해 달라 애걸”

당시 이명박 정부가 북측의 폭로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자 남북간 비밀접촉에 참여했던 북한 국방위원회 정책국 대표는 5월 9일 조선중앙통신 기자와 문답을 통해 재반박했다. 정책국 대표는 이번 접촉이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정부의 해명에 이런 답변을 했다. “(남측의)김천식은 이번 비밀접촉은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와 인준에 의해 마련됐다면서 그 의미를 부각시켰다. 통일부 장관 현인택이 직접 접촉의 전 과정을 주관하고 있으며 청와대에도 그가 단독 선을 통해 상황보고를 하고 있다고 했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사과 절충안을 논의하지 않았다는 남측 설명도 반박했다. “그들은 북측에서 보면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보면 사과로 간주되는 절충안이라도 내놓자고 빌붙었다. 그것도 통하지 않게 되자 나중에는 최소한 유감이라도 표시해주면 그것을 사과로 받아들이고 지금까지의 대결정책도 철회할 것이고 정상회담도 빨리 추진할 수 있다고 했다.”

남측의 북측 회의 참가자 매수 시도도 폭로했다. “접촉이 결렬상태에 이르게 되자 김태효의 지시에 따라 홍창화가 트렁크에서 돈봉투를 꺼내들자 김태효는 그것을 우리 손에 쥐어주려고 했다. 우리가 즉시 처 던지자 황급히 돈봉투를 걷어 넣고 우리 대표들에게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돈봉투가 숙식비용이었다는 남측 해명에 대해서는 “우리 대사관에서 숙식과 운수수단을 보장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그들이 우리 대사관에 체류비를 섬겨 바치려고 돈봉투를 마련했겠느냐”고 따졌다.

■ 한반도 현실의 냉정함

[이대근의 단언컨대] 한국당의 김영철 공세··· 그 내막과 진실


남북관계의 역사는 과거사에 대한 북측의 사과 문제가 책임자 처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관계 개선을 위한 절차의 하나로 다뤄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북 화해와 평화가 우선이고 그 방향을 촉진하는 차원에서 사과 문제가 논의된 것이다. 이건 역대 어느 성향의 정부이건 차이가 없다.

1983년 아웅산 테러, 1987년 대한항공 폭파사건의 주범은 김정일이다. 특히 대한항공 폭파 사건 때는 김정일이 직접 친필 지시를 내렸다는 조사결과까지 있다. 김정일은 이미 1970년대부터 2인자로 군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했다는 관측과도 일치한다. 그럼에도 노태우, 이명박 대통령이 제대로 사과를 받는데 총력을 쏟기는커녕 대화하고 교류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서울에 국빈으로 초정하려 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때 방남한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은 인민군을 통제하는 1인자이다. 대남 위협과 도발의 책임을 따진다면 김영철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도 당시 새누리당은 그를 환영했다.

한국당은 스스로 과거를 돌아보기 바란다. 그리고 자문해 보기 바란다. 왜 우리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게는 책임을 물을 기회가 많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이제 와서 그 부하만 붙잡고 매달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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