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되게 소환된 ‘애국’과 ‘보수’

이로사 칼럼니스트

현충일의 ‘늙은 군인의 노래’와 4·19기념식의 ‘봄날은 간다’

최백호의 낭만과 국가 기념식

몇 년 전 엄마에게 가수 최백호의 새로 나온 시디를 선물한 적이 있다. 엄마는 시디를 받아들고 잠시 표지의 외로이 선 가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나는 최백호 노래 별로 안 좋아하는데” 했다. 나는 물었다.

“왜?”

엄마는 말했다.

“너무 슬퍼서.”

가수 최백호 씨와 현재 군 복무중인 지창욱, 임시완, 주원, 강하늘이 지난 6일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63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연합뉴스

가수 최백호 씨와 현재 군 복무중인 지창욱, 임시완, 주원, 강하늘이 지난 6일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63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연합뉴스

■국가 기념식과 낭만

최백호는 지난 4월19일 제58주년 4·19혁명 기념식 무대에 섰다. 이 행사는 명실공히 4·19혁명을 국가 정통성의 원천으로 재정의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그들의 희생을 이제는 국가가 나서 진정으로 위무하고 기리겠다고 천명하는 세리머니였다.

행사는 고 김치호 열사의 사연으로 4·19혁명 과정을 극화한 뮤지컬 공연을 중심으로 흘렀다. 최백호의 무대는 이 뮤지컬 공연 바로 뒤에 붙어 있었다. “당시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외쳤던 수많은 청춘의 봄날은 갔지만 민주주의의 봄날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라는 자막에 뒤이어 나타난 그는 단출하게 기타 하나만 메고 홀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애수 가득한 목소리로 ‘봄날은 간다’를 불렀다.

4·19에 기타치며 부른 노래는 보는 이의 마음을 후려쳤지만
그 감정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현충일엔 ‘한때의 금지곡’을
군인들과 함께 부르기도 했다

현 정부의 기념식은 영리하다 보수에 빼앗긴 것들을 되찾고
‘반감없이’ 태극기를 들게한다 낭만과 새로움을 공유한
그는‘너무 슬픈 낭만가객’이 아니다

쓸쓸함과 회한의 정서를 자극하는 그의 노래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후려쳤다. 객석에 앉은 초로의 여인들은 연신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시청자들 역시 그 감정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애상에 잠겼다. 마음을 후비는 그의 공연은 이 행사가 대중에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핵심 감정이 무엇인지 명확히 했다. 이제는 늙어버린, 그때는 젊었을 그 여인들. 어쩌면 살아 그 옆에 앉아 있었을지 모르는 지금은 사라진 청춘들. 찬란한 것은 이미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청춘을 바친 덕에 우리는 여기에 있다. 이제는 국가가 이름 없는 모든 이들의 그 찬란했던 무언가를 기리고 숭고하게 애도할 것이다.

최백호의 노래는 지난 6월6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63회 현충일 추념식에도 등장했다. 현충일 추념식은 눈물의 바다였다. 대통령은 무연고 묘소 참배로 행사를 열며 연고 없이 죽은 국가유공자들까지 국가가 끝까지 지키고 돌보겠다고 했다. 평범한 의인인 순직 공무원들의 유가족을 무대 위로 불러 국가유공자증을 수여하며 손을 잡았다.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국민도 애국할 수 있다며, 국가가 국민에게 줄 수 있는 믿음을 강조했다. 마지막엔 최근 유기견 구조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가 순직한 여성 소방관들의 추모식이 열렸는데, 모두가 울었다. 국가가 평범한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태도는 도처에 전시되었다.

이윽고 무대에 오른 최백호는 추모곡으로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불렀다. 역시 반주는 단출하고 구슬픈 피아노 연주 하나였다. 그것은 다시 한 번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가슴을 뒤흔들고 지나간다. 사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애국주의의 최전선 행사인 현충일 추념식에서 불리기에 조금 이상한 노래다. 이 노래는 30년 직업군인으로 복역한 평범한 군인의 마음을 담은 가사와 군가풍의 리듬 때문에 군가처럼 들리지만, 실은 1970년대 ‘군인의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던 김민기의 노래다. 이후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가사 속 군인을 노동자, 농민 등으로 바꿔 부르며 생명력을 이어왔다. 말하자면 데모가인 동시에 군가인 노래가 마치 대구를 이루듯 진보 정부의 현충일 추념식에서 불렸다는 것. 실제로 군인들이 합창하니 손색없는 군가처럼 보이는 데다, 동시에 그 사실이 꽤나 풍자적이기도 해서 꼭 이 노래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 노래가 ‘낭만가객’ 최백호의 목소리를 타고 흐른다. 노래의 마지막, 그는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쓸쓸하고도 고독한 목소리로 외친다.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꽃다운 이 내 청춘”

■세련된 슬픔

최백호의 대표곡은 누가 뭐래도 ‘낭만에 대하여’다.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나 ‘영일만 친구’ 등도 인기를 끌었지만, 데뷔 20년 후인 1994년 발표한 이 노래는 예나 지금이나 중장년층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중년의 남성이 청춘의 낭만을 ‘도라지 위스키’ 풍으로 쓸쓸히 돌아보는 이 노래는, 파란만장한 개인사와 맞물려 그에게 추종불허의 ‘낭만가객’ 이름표를 달아주었다.

문재인 정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 3·1절 기념식, 4·19혁명 기념식,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현충일 추념식 등 일련의 기념식들은 과거 의례적인 국가 행사들에 비하면 영리하고 대중적인 연출력을 보여준다. 이들은 감성적 퍼포먼스에 능하다. 예컨대 제99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은 ‘여성’ 독립투사 정정화 애국지사의 이야기로 이뤄진 뮤지컬 형식으로 진행했고, 3·1절 기념식에서는 서대문 형무소의 건축 지형을 십분 활용해 독립선언서 전문을 일반 시민들과 배우들이 돌아가며 읽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일련의 행사들은 대개 ‘뮤지컬(역사의 재정의)+자료화면+당사자의 목소리+감성을 담은 노래와 공연+정부의 말+그리고 현재와의 연결고리(청년, 어린이, 미래)’ 형식으로 이뤄진다. 그 과정은 ‘나라를 나라답게’라는 현 정부의 주요 구호를 충실히 극화·상징화하며, 보수정부에 의해 상실된 국가의 역사와 책임과 의무를 재정립하고, 국민들에게 이것이 진정한 ‘애국보수의 실천’이라는 인상을 전달한다. 퍼포먼스 후 곧이어 등장하는 태극기와 애국가는 그 의미가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세련된 형식으로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이 퍼포먼스들은 기존의 국가주의, 애국주의에 반감을 갖고 있던 이들까지도 감정적으로 끌어들이는 기술을 발휘한다.

여기서 최백호는 대중을 겨냥한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을 위한 송가’의 화신으로 소환된다. 그의 추모곡은, 그간 잃어버렸던 가슴 아픈 역사를 바로 세우고 국가가 이제 그것을 잊지 않고 위무하겠다고 호소하는 새로운 국가 행사에서, 적절한 슬픔과 애도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중장년층과 386세대 남성들에게 익숙한 정서의 낭만을 환기하지만 정치색 없이 세련되다.

[이로사의 신콜렉터]세련되게 소환된 ‘애국’과 ‘보수’

여기에는 현 정부의 국가 행사들이 호소하는 대상 중 하나인 20~30대 젊은 세대와의 연결고리도 작용한다. 최백호는 이제 “너무 슬픈” 낭만가객만은 아니다. 그는 지금 과거 ‘애비’나 ‘낭만에 대하여’를 부르던 최백호와는 조금 다른 가수가 되어 있다. 그는 지난 2012년 12년 만에 정규 앨범 <다시 길 위에서>를 내면서, 기존의 트로트풍 가요의 틀을 벗어나 팝재즈와 라틴, 집시스윙과 같은 월드뮤직을 선보였다. (내가 엄마에게 선물한 것이 바로 이 앨범이었다. 물론 이 앨범은 슬펐지만, 그게 엄마가 생각하는 통속적인 슬픔은 더 이상 아니었을 것이다.)

젊은 뮤지션들이 그가 가진 원숙한 목소리와 정서를 세련된 형식으로 정련했고, 이 앨범은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기타리스트 박주원, 아이유, 에코브릿지 등 젊은 뮤지션들과 작업하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후 많은 20~30대 젊은이들도 새롭게 그를 발견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오래된 낭만과 ‘발견된’ 새로움을 동시에 지닌 최백호의 목소리는 이제 잘 기획된 국가 행사에 불려나가 필요한 정서를 환기한다. 그의 무대는 지난해 현충일 추념식에서 장사익이 부른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무대와 같은 궤에 있지만 보다 세련되었고, 젊고 대중적인 장미여관이나 손승연의 무대와는 다른 울림을 준다. 최백호는 중년층의 회한을 건드리는 동시에 젊은이들의 미감도 만족시킨다. 최백호는 이 두 개의 공연 외에도 지난해 보훈의날 기념식과 청와대 초청 필리핀 한인 상공회 축하 공연 등 벌써 네번의 국가 행사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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