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삶을 담는다‥‘기린그림’ 김종신 정다운 감독

장은교 기자

우리는 늘 어딘가에 있다. 집, 학교, 회사, 카페, 병원… 보도블록 위나 정류장, 담벼락 옆이라도. 그래서 건축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건축물은 철근과 시멘트, 땅덩어리의 결합을 뛰어넘는다. 이 동갑내기 부부에게도 그렇다. 이들은 하나의 건축물이 새벽에 깨어나 햇빛을 쏘이고 비바람과 눈을 맞는 모습을 담는다. 오후의 나른함과 밤의 어둑한 공기에 휩싸인 모습, 사람들이 공간을 메울 때와 텅 비었을 때의 모습도 기록한다. 이들에게 건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 삶을 갖는 존재다. 2012년 설립된 건축전문 영화영상제작사 ‘기린그림’의 김종신·정다운 감독(43) 이야기다.

건물 외관을 조감도처럼 보여주는 정도로만 제작되던 건축 영상은 기린그림을 통해 또 하나의 예술로 거듭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건축가들은 기린그림의 영상을 통해 자신이 지은 건물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극찬한다. 건축가인 김찬중 경희대 건축학과 교수는 “건축계에 전무후무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1937~2011)의 건축을 다룬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The Sea of Itami Jun)>는 최근 프랑스 배급사 업사이드로부터 유럽 진출을 제안받았다. 국내에선 내년 상반기 개봉 예정이다. 지난달 26일 10평 남짓한 남산의 아담한 작업실에서 기린그림의 두 감독을 만났다.

건축전문영화영상제작사 ‘기린그림’이 만든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The Sea of Itami Jun)’ 의 한 장면. 기린그림 제공

건축전문영화영상제작사 ‘기린그림’이 만든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The Sea of Itami Jun)’ 의 한 장면. 기린그림 제공

- 한쪽 벽이 파주출판도시 관련 메모로 가득하네요.

김종신(이하 김) = 내년이 파주출판도시가 기획된 지 30주년인데 기념 다큐멘터리를 저희가 제작해요. 기린그림 설립하기 전에 저희가 처음 돈을 받고 맡은 일이 200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전시된 ‘파주출판도시’ 인터뷰 영상이었는데 10년 만에 다시 작업하네요.

‘1992·6·3 일산출판센터 조성’ ‘1994·7·1 파주부지 확정’ 등 메모들이 눈에 띄었다. 파주라는 거대한 공간(벽)에 30년의 시간을 쌓아올리는 듯 보였다.

정다운(이하 정) = 1980년대 난개발 붐이던 상황에서 좀 좋은 도시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갖고 출판계와 건축계의 꿈이 만난 곳이 파주예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라 저희는 ‘미래를 보는 도시’로서의 파주도 담아보려고 해요.

- 원래 극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정 = 저흰 2001년에 영화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로 만났어요. 저는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는데 현장이 저랑 잘 안 맞더라고요.

김 = 그때만 해도 ‘갑질’ ‘열정페이’란 말도 없었잖아요. 영화감독이 되려면 도제 시스템을 견뎌야 했는데 이런 생활을 하며 계속 영화를 꿈꿔야 하나 고민했죠. 그러다 2003년에 같이 영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 즉흥적인 결정이었네요.

정 = 전 원래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건축과 영상’을 공부했고, 종신씨는 골드스미스대학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했어요.

김 = 이십대 후반, 다소 늦은 나이에 간 유학이라 2년반 동안 죽도록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겨우 학위를 마치고 왔어요.

건축 전문 영상작가 ‘기린그림’의 정다운·김종신씨(오른쪽)부부가 서울 중구 남산 작업실에서 편집을 하던 중 포즈를 취했다. /강윤중 기자

건축 전문 영상작가 ‘기린그림’의 정다운·김종신씨(오른쪽)부부가 서울 중구 남산 작업실에서 편집을 하던 중 포즈를 취했다. /강윤중 기자

- 건축 영상을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었나요.

김 = 제 고향이 제주인데 2006년에 공부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아버지가 저희 부부를 제주의 수풍석미술관으로 데려가셨어요. 전 미술관이라니까 가면 그림 걸려 있고 그런 줄 알았죠. 그런데 들어간 순간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빛, 바람, 물, 텅 빈 공간…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어떤 공간에 들어갔는데, 공간 자체가 이렇게 감동을 줄 수 있구나, 건축이란 게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움직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수풍석미술관은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 각각 제주의 물, 바람, 돌을 테마로 지은 곳이다. 2005년 프랑스 예술훈장을 받는 등 세계적 건축가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2000년대 제주에 방주교회, 포도호텔 등 제주의 자연을 살린 건축물을 지었고 2006년 김수근건축상을 수상했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유동룡이라는 한국 이름을 쓰고 한국 여권을 사용했다. 이타미 준은 필명이다.

정 = 저는 늘 공간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도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어요.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인공적인 곳에 들어가서, 내가 새로워지는 느낌을 주는 공간을 경험한다는 게 너무 놀라웠어요. 그때 처음으로 이 공간을 만든 사람이 누굴까 궁금해졌어요. 분명히 사람을 따뜻하게 이해하는 사람이겠구나, 사람이 괴롭고 아픈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겠구나 싶었죠. 그렇게 호기심만 갖고 있다가 2011년에 이타미 준의 부음을 듣고서야 더 이상 늦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분의 큰딸(유이화·ITM 건축사무소 소장)이 한국에서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걸 알고, 2011년 12월에 찾아가서 ‘우리는 이타미 준 건축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고 말했죠.

- 갑자기요?

김 = 네(웃음). 사실 제작비도 없고 저희가 내세울 만한 것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마음이 통했는지 유 소장님이 그날 그 자리에서 바로 좋다고 했어요.

정 = 근데 제작비가 없어서 지지부진하다가 2013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바람의 조형 : 이타미 준’이라는 전시에 참여하게 됐어요. 미술관에선 원래 7분 정도 분량으로 담담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저희가 30분짜리를 만들어서 갔죠. 인물편 15분, 건축편 15분으로 두 편을 만들어서 갔어요.

김 = 원래 예산보다 2배를 더 들여서 만들었어요. 확신이 있었거든요. 관객들에게 그 공간을 체험하게 해주고 싶었어요. 큰 화면으로 보여줘야 우리 의도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필 미술관이 당시 공사 중으로 빔프로젝트 구동이 안돼 제가 집에서 TV를 떼어서 가져갔어요.

- 반응은 어땠나요.

정 = 보자마자 “(영상 이대로) 틉시다” 하더라고요. 정말 기분이 좋았죠.

이때 만든 영상이 모태가 돼 기린그림은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를 만들었다. 제주영상위원회와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작으로 선정된 이 영화는 재일교포 작곡가 양방언이 주제곡을, 배우 유지태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이타미 준의 딸 유이화 건축가는 기린그림이 만든 영상을 보고 “생전에 아버지를 만난 적도 없는 분들인데, 제 생각 이상으로 아버지의 건축과 사상을 온몸으로 이해한다는 걸 느꼈고 놀랐다”고 말했다.

- 수풍석미술관을 담은 다큐멘터리엔 아이와 노인이 등장합니다. 다른 건축 영상에도 종종 사람이 나오던데요.

정 = 저희는 공간이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건축은 실생활에 밀접하게 연결된, 사람들이 가장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예술이잖아요. 수풍석미술관에 다섯살이던 아들을 데려갔는데, 제 예상을 초월하는 반응을 보였어요. 어른들은 공간을 관조적으로 바라보지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공간을 만지고 부딪쳐보고 체험해요. 요즘 많은 돈을 들여서 화려하게 만든 건물들도 많지만, 들어가보면 건물을 지키느라 사람은 위축되고 주위 자연과 동떨어지는 곳도 많죠. 그런 건축을 좋은 건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다큐멘터리 지원사업에 지원할 때마다 많이 떨어졌다면서요.

김 = 그간 주목받은 작품들의 기준과 저희가 많이 달랐거든요. 주인공은 건축인 데다 ‘인간극장’ 같은 줄거리도 없고, 사회고발이나 종교적인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가하게 예술영화 찍는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건축전문영화영상제작사 ‘기린그림’이 만든 황두진 건축가의 ‘won & won 63.5 building’ 중 한 장면. 기린그림 제공

건축전문영화영상제작사 ‘기린그림’이 만든 황두진 건축가의 ‘won & won 63.5 building’ 중 한 장면. 기린그림 제공

기린그림과 작업한 건축가들은 이제 미리 설계 의도를 설명하지 않고, 그들의 영상을 기다린다. 시인이 눈밝은 독자가 자신의 시를 어떻게 읽어줄까 기대하는 것처럼. ‘원앤원 63.5’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 등을 지은 건축가 황두진은 기린그림이 담은 영상을 보고 페이스북에 “내가 이 모든 것을 다 생각하고 설계한 것이 아니라는 것, 영상 작업을 통해 나도 새롭게 발견한 장면과 상황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며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고 썼다.

건축가 김찬중은 “건물은 정적인 존재 같지만 빛과 날씨, 시간, 그 안에 사람이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따라 굉장히 동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데 기린그림의 영상은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성을 아주 서정적으로 잡아낸다”며 “이 건물의 창에서 보이는 밖은 어떤가, 이 발코니에 사람이 들어가 움직일 때 이 건물은 어떤 공간이 되는가를 영상을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게 됐다”고 말했다.

- 건축 영상은 어떻게 다른가요.

김 = 전 ‘건축적 산책’이라고 표현합니다. 건물은 가만히 있지만, 어떤 시간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울릉도에 지어진 ‘Kosmos(코스모스)’ 같은 건물은 우주의 개념이 모티브가 된 건물인데 직접 가서 보지 않은 사람들도 그걸 느낄 수 있게, 감동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코스모스 영상에서 건물은 우주를 떠도는 하나의 행성처럼 반짝이며 등장한다). 어떤 영상엔 설명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최대한 설명 대신 경험하고 감동하게 해준다는 게 목표에요.

건축영화영상제작사 ‘기린그림’이 만든 건축가 김찬중의 ‘Kosmos’ 중 한 장면. 기린그림 제공

건축영화영상제작사 ‘기린그림’이 만든 건축가 김찬중의 ‘Kosmos’ 중 한 장면. 기린그림 제공

정 = 원하는 날씨를 기다리는 것이 저희 일의 시작이에요. 드론은 비를 맞으면 안되고 주변 자기장처럼 장애물이 많아도 안되고요. 어떤 건물을 찍으려면 우선 저희부터 그 건물을 경험하고 만나는 시간을 가져요. 그때 받는 영감, 느낌이 굉장히 중요하고 그 감동을 보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죠.

- 좋은 건축이란 어떤 걸까요.

김 = 조화로운 건축이라고 생각해요. 주위 사람이나 골목, 옆 공간과의 조화를 생각하는 건축이오. 건축도 생로병사가 있다고 생각해요. 건축의 의미가 가장 퇴색한 게 ‘내 땅이니까, 내 돈이니까’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좋은 사람이란 주위와 함께하고 배려하는 사람이잖아요. 건축도 사람·자연과 함께하는 존재니까요.

정 = 어떤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순간들이 매우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 청년들이 비싼 커피값을 내면서도 카페에 가서 공부하는 이유가 ‘좀 더 좋은 공간에 있고 싶다’는 표현인 것 같아요. 생명의 건축, 사람을 살리는 건축이 됐으면 좋겠어요. 저희도 두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다음 세대까지 좋은 공간들이 잘 전달됐으면 좋겠어요.

김 = 요즘 공공건축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요. ‘지옥고’(반지하, 옥탑방, 고시원)라는 말도 있는데… 우리 중에 건축주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도서관, 공원, 학교처럼 사람들이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곳들이 좀 더 좋은 건축으로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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