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정치와 예술과 사랑을 잇는, 나이 많은 ‘젊음의 다리’

손아람 작가

양화대교

지난달 24일 해가 질 녘 서울 마포구 합정동 쪽에서 바라본 양화대교. 다리 건너편은 영등포구 양평동이다. 1965년 1월 준공한 구교(제2한강교)와 1982년 2월 완공한 신교가 합쳐져 지금의 양화대교가 됐다. 구교는 8·15 광복 후 한국 기술진이 세운 최초의 한강다리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지난달 24일 해가 질 녘 서울 마포구 합정동 쪽에서 바라본 양화대교. 다리 건너편은 영등포구 양평동이다. 1965년 1월 준공한 구교(제2한강교)와 1982년 2월 완공한 신교가 합쳐져 지금의 양화대교가 됐다. 구교는 8·15 광복 후 한국 기술진이 세운 최초의 한강다리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우리 집엔 매일 나 홀로 있었지/ 아버지는 택시드라이버/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 (…)/ 그때는 나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몰랐네/ 그 다리 위를 건너가는 기분을/ 어디시냐고 어디냐고 여쭤보면/ 아버지는 항상/ 양화대교, 양화대교/ 이제 나 서있네 그 다리에”(‘양화대교’, 자이언티)

택시 기사 아버지께 헌정하는 R&B 가수의 노랫말을 음미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가수 자이언티의 아버지가 택시를 몰았던 이 노래의 후경은 분명히 1990년대 초반이다. 운행 차량은 이제 돈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현대 포니의 2세대 모델로 골라본다. 아버지는 늦은 저녁 영등포 근처에서 태운 손님을 술자리가 있는 신촌까지 데려다주려고 양화대교를 건너거나, 거꾸로 이른 새벽 신촌에서 이미 만취한 손님을 영등포의 집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양화대교를 건넌다. 전경인 현재로 돌아오면, 택시 기사의 아들은 홍대 클럽 출신 슈퍼스타가 되어 있다. 그는 콘서트나 방송 촬영을 마친 뒤 홍대 인근으로 연예인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밤에 양화대교를 건넌다. 그는 아버지의 승객처럼 몸을 뒷좌석에 비스듬히 기대었고, 아버지처럼 무표정한 얼굴의 기사가 운전대를 쥐고 있다. 1990년대는 2010년대에, 아버지의 피로한 일상은 아들의 화려한 일상에, 젊음과 밤문화의 중심이었던 신촌 거리는 홍대 거리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자이언티의 아버지가 신촌에서 태워 양화대교를 건넜던 만취한 승객 중에는 대학교 신입생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한번쯤은 혀 꼬인 말로 물었을 것 같다. “아저씨, 아저씨는 우루과이라운드 타결로 농민들이 흘리는 피눈물을 아시나요? 아시냐고요!” 20여년이 지나, 그 신입생은 회상에 잠긴 자이언티를 뒷좌석에 태우고 양화대교를 건너는 과묵한 운전기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한 시대와 한 세대와 한 개인의 시간들이 언제나 그대로인 다리 위에서 교차한다. 그 다리의 이름은 양화대교다.

1965년 1월 시민들이 양화대교 전신인 제2한강교의 개통을 축하하며 다리를 건너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5년 1월 시민들이 양화대교 전신인 제2한강교의 개통을 축하하며 다리를 건너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양화대교는 철거되었던 광진교를 제외하면 한강 위에 두번째로 건설된 나이 많은 인도교다. 최초 준공년이 1965년이니 매일같이 양화대교를 건넜다는 자이언티의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일 것이다. 하지만 이 다리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은 가장 젊은 다리일 것 같다. 양화대교 북단에서 이어진 양화로는 지하철 홍대입구역에서 꺾이면서 거리의 이름을 신촌로에 내준다. 자이언티 아버지가 양화대교를 건널 때는 십중팔구 신촌이 승객의 목적지였겠지만, 젊은 거리들은 행인들의 전성기와 함께 노쇠해 버렸다. 이제 양화대교를 건너는 승객들은 신촌로에 접어들기 전에 홍대 앞의 번화가에서 쏟아져 내리고, 그들을 빨아들인 젊은 상권은 상수동과 합정동, 동교동과 연남동을 넘어 망원동 일대까지 창궐하고 있다.

한 시대와 한 세대와 한 개인의 시간들이 교차하는 그곳
문화의 중심이 신촌 거리에서 홍대 거리로 이동하는 동안
권력의 중심도 정치에서 자본으로 급격하게 이동했다

배우 손수현은 홍대 인근에 10년 가까이 거주해왔다. 한때는 영등포에 살면서 양화대교 북쪽으로 건너 넘어오던 소비자였지만, 문화의 생산자 집단에 더 가까워진 지금은 양화대교를 남쪽으로 건너 바람을 쐬러 나간다. 그녀는 홍대문화의 특징으로 세분화된 정체성과 자본에 대한 두려움을 꼽는다. 자신의 정치적 관심사로 동물권과 비건주의를 내세우고, 비주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을 배려하는 공간이 많기에 홍대문화권을 좋아하며, 누군가의 정체성과 철학마저 그럴듯한 상품으로 바꿔 침범하는 자본에 의해 단골 가게들이 밀려날까봐 걱정한다. 신촌권에서 대학 생활을 했던 손수현 배우는, 신촌에 비교하여 홍대를 문화적으로 더 세련된 만큼 자본 앞에 더 위태로운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문화의 중심이 신촌에서 홍대로 이동하는 동안, 권력의 중심은 정치에서 자본으로 이동했다. 아마 1990년대 이전의 신촌에서라면 손수현 배우의 관심사와 생각은 ‘정치적인 것’으로 분류되지도 않았을 터다. 신촌이 젊음의 중심이던 시절, 문화적 저항은 정치적 저항의 부분집합에 머물렀다. 그곳은 송골매, 들국화, 신촌블루스, 김현식과 유재하로까지 계보가 이어지는 전설적인 음악인들이 거쳐간 다방이면서, 6월항쟁과 연세대 한총련 시위 같은 민주주의 역사의 변곡점이 찍혔던 광장이기도 하다. 신촌파 록 음악의 진지한 정치성은 공간의 색깔을 확연하게 덧입었다. 이런 방식의 정치와의 혼합은 1990년대까지 유효했던 대중음악의 공식이다. 문화대통령이라 불리던 서태지의 음악만 해도 그 흔적은 남아 있다. 알쏭달쏭한 상징으로 도배된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팬들은 정치적 메시지를 해독하는 데 열광적으로 몰두했다. 홍대로 넘어온 드럭 펑크 세대,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의 음악은 민중 투사를 연상케 하는 정치적 엄숙주의를 벗어던졌고, 자신들이 공연하던 지하실의 ‘뇌없는’ 소란을 더 닮아 갔다. 그 뒤를 따라 파도처럼 몰려온 힙합 뮤지션들은 정치색을 티 내는 음악을 아예 촌스럽게 여긴다. 이들의 노랫말에서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따내는 방법과, 그녀를 조수석에 태울 자동차는 독일산인지 영국산인지가 중요한 문제로 부상했다. 금요일밤의 홍대 클럽처럼.

신촌의 기억을 간직한 세대는 그 경박스러움에 혀를 찰 수도 있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오래전에 변화의 기미를 감지했을 것이다. ‘교실 이데아’를 따라 부르던 어린 팬들은, 가사처럼 교육 시스템을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던 자신의 나약함을 뉘우쳤을까? ‘발해를 꿈꾸며’를 들으면서, 가사처럼 발해와 하나가 되는 꿈을 꿨을까? 이제는 국사 수업 시간에 밀려오는 졸음에 굴복한 중학생이 아니고서야 그런 꿈을 꾸지 않는 것 같다. 오늘날 정치권력과 문화권력은 홍대 거리의 낮과 밤처럼 서로 침범하지 않는 분업을 이루었다. 혹은 그것을 휴전이라 불러도 좋다. 이 암묵적인 협정에 섣부르게 도전하는 대중음악가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유행어를 연설문에 구겨넣는 정치인만큼이나 조롱거리가 될 위험에 처한다. 음악이 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가 변한 것이니 아무도 미련을 갖지 않는다. 테킬라 샷잔이 굴러다니는 홍대 클럽에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방안을 두고 토론하기를 누군들 바랄까?

가수 자이언티와 배우 손수현처럼, 나에게도 양화대교와 홍대에 얽힌 추억이 있다. 나는 마지막 세대의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A와 함께 이 다리를 걸어 다녔다. 학생운동의 마지막 세대. 그 표현은 매우 조심스럽다. 겪어본 바로 1980년대 이후 대학을 졸업한 모든 세대가 그 칭호를 자신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장엄한 소멸을 기리는 애도사처럼. 하지만 적어도 학생회가 대중집회의 중요한 물량공급원으로 여겨졌던 마지막 시대에 A가 속했음은 분명하다. 대개 그렇듯이 그도 대학과 함께 학생운동을 졸업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기에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나간 시간이 부끄러웠기 때문이 아니란 걸 나는 안다. 어쩌면 그 반대로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었을 수도 있고, 후일담을 꺼내봤자 그때도 그런 게 남아 있었냐는 질문이 돌아올 게 뻔해서였을 수도 있다.

체제에 저항하는 젊은 군대의 지도자에서 체제의 일원이 되어 A는 사회생활의 발을 뗐다. 무리를 이끄는 계획을 짜는 대신 무리를 이끄는 계획대로 움직였다. 최소한의 관료적 태도가 직업적 의무로 바뀌었다. 그는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퇴근길에 만난 우리가 정치나 사회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 많은 시간을 피시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면서 보냈다. 우리의 이상적인 작전계획은 적팀의 기계적으로 최적화된 운영능력 앞에 어이없을 만큼 쉽게 무력화되곤 했다. 그런 패배는 A에게 익숙한 느낌이었을 터다. 자정 즈음이 되면 양화대교를 나란히 걸어서 건넜다. 영등포에 위치한 그의 집 쪽으로. “다른 다리도 걸어볼래?” 내가 물었을 때 A는 다를 게 뭐 있겠어, 라고 대답했었다.

90년대까지 정치와의 혼합이 대중음악의 공식이었다면
오늘날 정치·문화권력은 홍대 거리의 낮과 밤처럼 분업화

한편 블랙홀처럼 모든 분야 젊은 예술가들을 집어삼킨 홍대 인근에서는 2000년대부터 살롱문화가 움텄다. 지인 한 명이 후미진 골목에 살롱을 표방하며 술집을 열었다. 프랑스 유학파였던 그는 야심차게 ‘카바레’라는 이름을 가게에 붙이는 바람에, 업종을 오해한 어르신들이 찾아올 때마다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카바레는 프랑스 살롱문화의 핵심 공간을 뜻하지 손님께서 착각한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연히 합석한 테이블에서 B를 만났다. 예술가와 전문직 남성들 사이에서 B는 유일한 여성이자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홍대 근처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런 자리에 속해 있었다. 너무 명민해서 이질감이 전혀 없었지만 스스로는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를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취향과 통찰력을 경쟁적으로 뽐내는 반 세대 위 예술가들과 언어를 겨루는 스스로의 조숙함을 즐기면서도, 거기서 부질없이 젊음이 고갈될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내가 남긴 오래된 메모에는 B가 이렇게 말했다고 적혀 있다.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야.”

그즈음부터 우리는 밤이 아닌 낮에 만나 땡볕 아래를 몇 시간이고 계획 없이 걷다가 한강 다리를 건너 헤어졌다. B와 한강 다리를 건널 때 A가 합류했다. 셋이 함께 걷는 시간이 늘어났다. 어느날 다리 위에서 A와 B는 나에게 결혼 계획을 알렸다. 그때 나는 영등포와 홍대 사이에, 정치적인 인간과 예술적인 인간 사이에 있었다. 양화대교 한가운데였다.

두 사람에게 아이가 생겼다. 나는 유튜브에서 배운 순간이동 마술을 엉성하게 흉내 내서 아이에게 보여준다. 내 마술 쇼가 허접하기 짝이 없는 실패로 끝나는 때를 아이는 훨씬 더 즐긴다. 언젠가 그에게 마술보다는 더 능숙한 솜씨로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는 여당과 야당 당사가 사이좋게 이웃한 영등포와, 그곳에 긴급회의를 소집시켰던 아버지의 격한 분노와 행동력을 다루게 될 것이다. 또 홍대 거리의 떠들썩했던 밤과, 어머니가 참여한 지성적인 논쟁에서 신랄하게 비판받았던 전설처럼 유명하거나 고대유적처럼 잊혀진 이름들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사이를 잇는 나이 많은 젊음의 다리와, 바람이 거센 저녁 나를 놀라게 했던 한마디 역시. “우리 결혼하려고 해.” 나는 확신한다. 자이언티가 ‘양화대교’에서 노래했던 택시 기사 아버지의 젊은 날보다, 손수현 배우가 20년이 흐른 뒤에도 젊은 후배들에게 소개해주고 싶다는 비좁은 비건요리 전문 식당보다, 내가 들려주는 부모님의 이야기가 훨씬 더 구닥다리 같다고 아이는 생각할 것이다.

■ 필자 손아람

2008년 과거 자신이 활동한 힙합 그룹의 이름을 딴 동명의 소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를 발표했다. 2010년에는 장편소설 <소수의견>의 원작자이자 공동 각본가로 제24회 부일영화상 각본상과 제36회 청룡영화상 각본상 등을 수상했다. 그 외 <디 마이너스> <세계를 만드는 방법> 등을 집필했다.


손아람 작가의 ‘다리를 걷다 떠오르는 생각’은 동영상으로도 선보입니다. 지면에 미처 싣지 못한 작가의 이야기와 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밀도 있게 영상 속에 그려집니다. 경향신문의 유튜브 채널 <이런 경향>(www.youtube.com/thekyunghyangtv)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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