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점령한 정치, 혐오 넘어 ‘대세’ 될 수 있을까

이유진 기자
지난 1일 방영된 tvN 월화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의 한 장면.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테러로 불타는 모습이다. tvN 제공

지난 1일 방영된 tvN 월화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의 한 장면.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테러로 불타는 모습이다. tvN 제공

당산철교를 지나던 지하철 2호선에서 승객들이 창밖을 쳐다보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양화대교를 건너던 차들도 급정거하며 연쇄 추돌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 곳을 향한다. TV에서는 <긴급속보>로 ‘국회 본회의장 폭발 붕괴…사망자 확인 중’이란 자막이 뜬다. 화면 속 기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대통령의 시정 연설이 열리고 있는 국회에서 폭발물로 인한 테러가 발생해 국회 의사당 본관 건물이 붕괴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실제 상황은 아니다. 지난 1일 첫방송을 시작한 tvN 토일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의 한 장면이다.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이 아닌 드라마의 중심에 정치가 들어왔다. 웃음기는 쏙 빠지고, 어엿한 장르물로 정체화한 정치드라마들이 연달아 안방극장에 선보이고 있다. 화려한 캐스팅에 실존 인물과 실제 상황을 연상시킬 정도로 사실적인 캐릭터 묘사, 상황 설정은 정치 뉴스를 즐겨보는 사람이든 정치를 혐오하는 사람이든 일단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는 반응이다.

tvN <60일, 지정생존자> 1회 방송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이 대통령 신년 국정연설을 보이콧한 채 피켓을 자리에 올려둔 모습. tvN 제공

tvN <60일, 지정생존자> 1회 방송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이 대통령 신년 국정연설을 보이콧한 채 피켓을 자리에 올려둔 모습. tvN 제공

<60일, 지정생존자>는 인기 미국드라마 <지정생존자>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해고 통보를 받은 환경부 장관 박무진(지진희)이 국회의사당 테러로 인해 60일간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실제 지정생존자 제도가 있는 미국과 달리 한국엔 이 제도가 없어 국내 실정에 맞게 번안했다. 지정생존자 제도는 대통령 신년 국정연설 동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대통령직을 넘겨받을 행정부 각료 한 명을 안전하고 은밀한 장소에 대기시키는 미국의 시스템을 말한다.

국회의사당 폭파라는 설정은 비현실적이지만, 사건을 둘러싼 국내외 정치상황은 꽤나 사실적이다. 지지율 한 자릿수 대통령이 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자 야당 의원들은 의석에 피켓을 놔둔채 ‘보이콧’을 선언하고, 테러가 발생하자 그 배후를 북한으로 지목하는 세력과 이에 반박하는 세력간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일본 해상 자위대 소속 이지스함은 “자위권을 행사한다”는 명목으로 대한민국 영해를 무단 침범하고, 한미연합사령관은 북한 잠수함이 사라졌다며 한반도 전역에 데프콘 2호를 발령해야 한다고 정부를 압박한다.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 전개가 예상되면서 일단 시청자들의 시선을 묶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60일, 지정생존자> 2회 시청률은 4.2%(유료가입가구 기준)로 전날 1회 시청률보다 0.8% 상승했고, 동시간대 비지상파 월화드라마 1위를 차지했다.

JTBC 금토드라마 <보좌관> 3회 한 장면. 야당 국회의원의 수석보좌관 장태준(이정재)이 국회 앞을 지나고 있다. JTBC 제공

JTBC 금토드라마 <보좌관> 3회 한 장면. 야당 국회의원의 수석보좌관 장태준(이정재)이 국회 앞을 지나고 있다. JTBC 제공

JTBC <보좌관> 2회에서 여야 의원들이 국정감사를 하고 있다. JTBC 제공

JTBC <보좌관> 2회에서 여야 의원들이 국정감사를 하고 있다. JTBC 제공

<60일, 지정생존자>가 붕괴된 한국정치 위에 새로운 정치를 그리는 정치 판타지라면, JTBC 금토드라마 <보좌관>은 카메라를 국회 안으로 밀어넣었다. 4%대 시청률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보좌관>은 정치인이 아닌 보좌관에 초점을 맞추고 뉴스 너머의 정치 이면을 조명한다.

수석보좌관 장태준(이정재)의 역할이 실제 보좌관의 역할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으나 일반 시청자들에겐 큰 장벽이 되지 않은 듯하다. 고성과 몸싸움이 오가는 국정감사 현장,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국회 상황과 치열한 여론전에 시청자 김모씨는 “뉴스를 보는지 드라마를 보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고 말했다.

<씨티홀>(2009), <대물>(2010), <프레지던트>(2011), <어셈블리>(2015) 등 정치드라마는 과거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지난 5월28일 종영한 KBS 2TV <국민 여러분!>을 포함해 한 해에 정치드라마가 이처럼 연달아 편성되는 건 드문 일이다. 배우 송승헌이 전직 국회의원으로 등장, 국회에 재입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을 담은 tvN <위대한 쇼>는 올 하반기에 방영될 예정이다.

정치드라마가 늘어난 건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일명 ‘촛불 정권’이 들어서고 젊은 층 사이에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치드라마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면서 “여기에 장르물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더해지면서 정치가 장르물의 주요 소재로 떠오른 듯하다”고 말했다. 하 대중문화평론가는 이어 “그동안 정치드라마는 꾸준히 나왔지만, 정치에 대한 반감 등으로 인해 크게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며 “현재 방영 중인 작품들이 마니아층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정치드라마가 주류 장르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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