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도 '낙태죄 완전 폐지' 성명···“일부 종교계 반대 앞세워 여성 삶 억압 말라”

이혜리 기자

낙태죄 완전 폐지를 요구하는 기독교인들의 성명이 나왔다. 임신 14주까지만 낙태(임신중단)가 가능하고, 15~24주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만 가능하도록 해 낙태를 범죄로 계속 처벌하겠다는 정부 법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성과 재생산 크리스천 포럼은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람을 처벌하고 통제하는 법이 아닌 삶을 살피고 지원하는 법이 필요하다”며 형법상 낙태죄의 완전한 폐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에는 179개의 단체와 개인이 서명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국가가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임신중절 여부와 조건을 결정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정부의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에 강한 우려를 표한다”며 “낙태죄 완전 폐지는 더는 여성이 국가의 인구계획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어떤 몸이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는지를 타인이 결정하는 인권침해를 바로잡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한국 교회는 시대마다 정부의 인구관리 정책에 맞춰 신학적 담론을 제공하며 정치적 파트너 노릇을 해왔다”며 교회를 비판했다. 교회가 ‘생육하고 번성하라(창세기 1:28)’라는 성서 구절을 놓고 국가가 산아제한 정책을 펼 때는 적게 낳아 잘 키우는 게 삶의 질을 높이는 번성이라고 말하고, 출산장려 정책을 펼 때는 무조건 많이 낳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는 교회가 각 사람이 존엄하게 살도록 힘써야 하는 종교의 책무를 외면한 채 권력과 결탁해 이익을 좇은 결과”라고 지적했다.

28일 성과 재생산 크리스천 포럼이 낙태죄 완전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포럼 측 제공.

28일 성과 재생산 크리스천 포럼이 낙태죄 완전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포럼 측 제공.

이들은 “교회 안에는 임신중절을 정죄(죄가 있다고 단정함)하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라며 “임신중절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바라보고 서로 살피고 돕는 공동체적 연대, 교회의 성차별적 문화와 교리의 한계를 성찰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했다. 이어 “정부는 일부 종교계 반대를 앞세워 여성의 생명과 삶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법안을 유지하려는 행위를 멈추라”며 “헌법재판소 결정을 역행하는 입법예고안을 철회하고 임신중지와 유지, 출산과 양육 전반의 성과 재생산 권리에 대한 지원 정책을 마련해달라”고 밝혔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한국여성신학회 이영미 목사는 “교회는 모든 생명체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태아의 생명권에만 한정해 임신중절을 범죄화하는 데 앞장서지 말고, 모체의 생명권과 돌봄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어린 생명들의 생명권을 함께 존중하는 열린 마음으로 낙태죄 폐지 운동 함께해주시기를 바란다”며 “이를 위해 교회는 지금까지 금기시돼 언급조차 못하는 성에 관한 토론의 장을 교회 내 마련하고, 기독교 성윤리의 수립과 확장적인 의미의 생명존중을 실천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오수경 청어람ARMC 대표는 “국가가 여성의 권리를 박탈하고, 도리어 위험한 상황에 몰리도록 방치할 때 생명과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누구의 이웃이 돼야 하느냐. 인간의 자율성과 시민의 권리를 빼앗는 종교적 신념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 했다. 오 대표는 “낙태죄를 폐지하는 일은 종교적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시민인 여성의 권리를 박탈하는 문제”라며 “종교적 신념에 의해 여성이 임신을 중단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더라도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이들이 합당하게 보호받도록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그렇게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낙태죄 폐지 기자회견을 열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우철훈 기자.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낙태죄 폐지 기자회견을 열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우철훈 기자.

기독여민회의 남궁희수 목사는 기도문을 낭독했다. 남궁 목사는 기도문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주장하는 여성들에게 ‘생명의 파괴자’라는 오명으로 굴레를 씌우는 모든 편견과 억압이 멈추길 원한다”며 “‘여성’을 그저 ‘보호하겠다’는 입법의 과정에서 이를 넘어 여성과 남성, 인간의 평등이라는 귀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서로를 이해하고 그 경험을 존중할 수 있는 경청의 은혜를 달라”고 했다. 지난 14일에는 1015명이 참여한 ‘낙태죄 폐지를 지지하는 천주교 여성 신자들의 의견과 지지 선언’이 발표됐다.

정부는 지난 7일 낙태죄를 유지하되 임신 14주까지만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으로 법을 개정하겠다고 입법예고했다. 정부는 임신 15~24주에는 성범죄로 인한 임신이나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 등에만 낙태를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그 외의 낙태는 범죄로 처벌하겠다는 뜻이다. 여성계는 낙태죄 폐지를 요구해왔다.

■남궁희수 목사(기독여민회)의 기도문 전문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간절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땅에 힘 있는 자들의 논리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법이 이뤄지길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여성의 성을 둘러싼 임신, 출산, 또는 낙태 이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생각, 말할 수 없는 감정, 침묵을 강요당한 여성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내어 놓습니다.

수치심을 강요당한 여성들의 억눌렸던 경험이, 삶이 정당하게 드러나길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사회는 어머니가 되거나, 어머니가 되지 않거나 너무나 많은 판단과 강요로 여성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가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만드는 규제와 낙인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모독임을 고백합니다. 번영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차별적인 여아살해를 부추기고 실행시킨 불의한 역사를 기억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를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여성들에게만 그 모든 책임을 지우려 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임신중지를 가족제도에 대한 위협으로, 또는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상상’하는 이들은 강고한 법 그늘 아래 여성들이 위험한 낙태와 죽음의 위협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려 합니다.

하나님,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주장하는 여성들에게 ‘생명의 파괴자’라는 오명으로 굴레를 씌우는 모든 편견과 억압이 멈추길 원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 깊이 내면화 된 수치심과 낙인, 이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고 겁박하는 모든 규범이 폐기되고 오직 인간을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법이 세워지길 기대합니다.

운명이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부터 벗어나, 소명과 희망으로 살아가길 선택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해방의 기쁨을 누리길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더불어 살아가도록 지으셨습니다.

인간이 혼자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없듯이, 모든 이들이 하나님과 함께, 가족과 함께, 사회와 더불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안에서 임신중지를 원하는 이들에게 죄인의 굴레를 씌우지 않겠다는 ‘비범죄화’는 그 첫 발걸음일 뿐임을 알게 하소서.

‘여성’을 그저 ‘보호하겠다’는 입법의 과정에서 이를 넘어 여성과 남성, 인간의 평등이라는 귀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서로를 이해하고 그 경험을 존중할 수 있는 경청의 은혜를 주소서. 부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뤄지길 소원하며 이 모든 말씀, 자유와 평화와 평등을 복음의 진리 가운데 가르치시고 실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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