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방관자가 되지 않으려면 '연결의 힘'이 필요해요

석예다 PD

255페이지. 2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양이지만 한번에 읽어 내려갔다는 사람을 만나기 드물다. 김영서 작가의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이야기다. 친족성폭력 9년의 피해 기록을 고스란히 담은 책을 두고 작가의 지인은 책을 읽고 일주일간 앓았다고 한다. 그만큼 힘들었다고 한다. 영서씨의 피해 사실이 낱낱이, 자세히 담긴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두 세번 책을 덮기 일쑤였다고 고백한다.

책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를 펴낸 김영서 작가.

책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를 펴낸 김영서 작가.

책을 쓰는 영서씨도 당연히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 내려갔다. “더 넓은 세상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치유의 바람을 담아 써 내려갔다. 그렇게 되기까지 오래 걸렸다. 가해자인 친부가 죽은 후 1년이 지나고 26년만에 겨우 제 목소리로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언젠가 폭력의 경험을 ‘툭’하고 털어놓아도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놀라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영서씨는 말했다. 책을 통해 영서씨와 20대, 40대, 80대인 세 명의 독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김영서 작가를 만나러 북콘서트에 찾아간 여든 셋의 독자 김종진씨.

김영서 작가를 만나러 북콘서트에 찾아간 여든 셋의 독자 김종진씨.

여든 셋 나이의 독자 김종진씨. 초등학교에서 35년 교편을 잡았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가정폭력을 겪었다. 아버지가 휘두르는 폭력에 주저앉는 어머니를 내내 지켜볼 수밖에 없는 어린 아이였다. 맞을까봐 무서웠고,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 같은 어른이 될까봐 두려웠다. 독서모임에서 접한 영서씨의 책으로 폭력의 기억은 더 선명해졌다. 영서씨를 만나보고 싶어 북콘서트를 찾아갔다. “한번은 어머님이 안방으로 피해 오셨어요. 아버님이 지독하게 폭력을 쓰시니까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우리 어머니는 음독을 하시고 자살을 하셨어요.” 영서씨를 만난 그는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기억을 고백했다. 그리고 영서씨에게 “멋있다”고 말해주었다.

“피해자가 더 이상 숨지 않고, 가해자들에게 온전히 비난의 화살이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피해자가 더 이상 숨지 않고, 가해자들에게 온전히 비난의 화살이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20대 용훈은 책보다 영서씨를 먼저 알게 됐다. 페미니즘 이슈에 관심이 많은 용훈에게 친구가 성폭력피해 상담가인 영서씨를 소개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그렇고, 읽고 나서도 그렇고 머리 한 대 맞은 느낌이었어요. 내가 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고민했고 결국 마주하기로 했죠.” 용훈은 책을 읽은 후 여성인권상담소에서 디지털 성폭력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며 폭력예방을 위해 나름의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피해자가 더 이상 숨지 않고, 가해자들에게 온전히 비난의 화살이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경찰인재개발원에서 현장 경찰관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고지연 교수.

경찰인재개발원에서 현장 경찰관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고지연 교수.

고지연씨는 지식을 쌓기 위해 처음 책을 접했다. 경찰인재개발원에서 현장 경찰관들의 교육을 맡고 있는 교수인 그는 ‘피해자’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었다. 형사로서 15년간 현장을 접했지만, 피해자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경찰관들이 현장에서 열심히 뛰는데, 사건 처리를 잘 하고도 피해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또 다른 가해자가 되어 있어요. 그 모습이 안타까웠어요.” 영서씨의 책을 접한 고지연씨는 현장 경찰관들에게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쓰라는 과제를 주기도 한다. 한번은 경찰관들에게 영서씨의 강연을 들려주고 싶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피하던 영서씨를 무려 1년간 설득했다. “책을 읽으니 제가 어떤 교육을 해야 될지, 경찰관으로서의 어떻게 삶을 새롭게 그려야 할지 질문이 생겼던 책이었어요.”

폭력의 현장에서 피해자는 곧잘 잊혀지곤 한다. 고지연씨는 “현재 피해자가 머물 안전한 장소는 없다”고 지적한다. 폭력 이후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가 중요한데, 기본적으로는 이를 위해 법원의 임시조치 결정이 있어야 한다. 임시조치를 받을 수 없을 때 현장 경찰관이 직접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할 수 있는 수단으로 긴급임시조치가 마련돼 있다. 하지만 가정폭력특례법에 따르면 긴급임시조치를 위반하더라도 과태료 처분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정폭력의 경우 재발의 우려가 높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피해자 쉼터는 지역에 몇 군데 없어요. 아니면 임시 쉼터로 모시거든요. 피해자가 계실 수 있는 곳으로 모셔드리면 하루, 이틀, 최대 3일. 가해자 처벌뿐만 아니라 피해자 보호에 대한 부분도 같이 이뤄지지 않으면 안 돼요.”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은 2019년 1월 1일 기준, 현재 일반시설 46개소, 가족보호시설 20개소로 총 66개소가 운영되고 있다.

자립에 대한 지원도 부족하다. 여성가족부의 2019년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사업 운영실적 조사에 따르면 보호시설 이용자 1900명 중 714명인 37.6%는 쉼터 퇴소와 함께 다시 원가정으로 복귀한다고 밝혔다. 또한 여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주거지원은 전국에 314호가 있으나, 주거지원 서비스를 제공받은 자는 매년 불과 1~2명으로 극히 일부에게만 제공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책 <눈물로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김영서, 용훈, 김종진, 고지연.(왼쪽부터)

책 <눈물로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김영서, 용훈, 김종진, 고지연.(왼쪽부터)

폭력의 방관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린 무얼 할 수 있을까. 영서씨는 말했다. “폭력 피해자들 중에 용기내서 가출을 했는데, 안 좋은 사람하고만 계속 만났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실제로 그런 케이스들이 너무 많은 거죠. 이런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인식을 주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계속 늘어나는 것. 그 역할을 우리가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고 교수는 “코로나와 같은 위기로 인해서 가장 필요한건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나만 잘 살아서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이 사람 또한 안전해야 하고 이 사람 또한 살 수 있어야 나 또한 안전하다는 것이다”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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