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천하장사 이태현 “달라진 남북 씨름, 하나로 만들어야”

김재현 한국문화스포츠마케팅진흥원 이사장
이태현 용인대 무도스포츠산업학과 교수 / 청년서포터스 ‘젊은 나래’

이태현 용인대 무도스포츠산업학과 교수 / 청년서포터스 ‘젊은 나래’

이태현 용인대 무도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2000년대 초반 씨름판을 호령하던 ‘전설’이다. 630경기 472승 158패(승률 74.9%)로 역대 최다 전적, 최다승과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20회 등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은퇴 후 학자, 씨름 홍보대사, 씨름 해설위원으로 바쁘게 살고 있다. 민족 고유의 스포츠인 씨름이 남북화해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이 교수는 “우리가 먼저 화합을 만들어내면 그것이 곧 세계적인 씨름이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김재현의 생각 있는 스타톡이 이 교수를 만나 씨름을 세계화하고 싶은 그의 ‘꿈’을 들어봤다.

-씨름 홍보대사, 씨름 해설위원, 용인대 교수, 씨름부 선수지도 등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이 모든 게 나에게는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하나의 덩어리가 되고, 결국 그 꼭짓점은 씨름이 되더라. 나의 앞으로의 삶의 목표는 아마도 ‘씨름’ 이 두글자가 아닐까 싶다.”

-씨름은 한반도의 ‘전통 스포츠’다. 남북교류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남북이 갈라지기 전에는 같은 씨름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 맞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북한은 옷을 입고 우리는 팬티만 입고, 샅바의 방법도 우리는 타이트하게 북한은 느슨하게, 씨름장이 우리는 모래, 북한은 매트다. 하나의 씨름으로 만들고 싶다. 우리가 같은 민족인데 휴전선으로 나뉘었다는 이유만으로 왜 다른 씨름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먼저 화합을 해서 (씨름을 하나로)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곧 세계적인 씨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대표자들이 만나서 합의를 하면 좋겠다. 씨름은 과거부터 승자를 만들어 누군가를 짓밟는 것이 아니고 마을 간에 불화가 있을 때, 일종의 화합을 위한 행위로 사용했다. 농경 시절에 어느 쪽에 물을 먼저 댈지, 어느 쪽 품앗이를 먼저 할지 결정하고자 할 때 마을의 대표가 나와 이긴 팀부터 돕고, 음식을 대접해 잔치를 열었다. 그래서 씨름은 우승과 화합, 먹거리가 따른다. 우리도 남북의 거리가 이렇게 떨어져 있을 때, 씨름이라는 매체를 통해 풍성하게 음식을 가져다 놓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리는 함께하는 화합의 장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남북이 서로 몸을 맞대면 잘 소통되는 것 같다.

“맨살을 맞대며 하는 운동은 씨름이 유일하다. 그러다 보니 씨름하는 선수들은 성격이 굉장히 온순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2019년 전통 민속 씨름이 남북 공동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 등재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는 씨름이 우리만의 잔치가 아닌 전 세계인들이 함께 배우면서 보존해 후대에 알릴 의무가 생겼다는 거다.”

-씨름이 유네스코 등재될 때 현장에 있었다. 느낌은 어땠는가.

“북한이 먼저 유네스코에 독자적으로 씨름을 등재하려다가 실패했다. 이후 남북이 공동으로 자료를 보충해 등재를 시도했는데, 솔직히 확률이 반반이었다고 한다. 씨름이 유네스코에 등재가 됐다고 발표되는 순간 남북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전 세계인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그때 기뻐도 눈물이 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온몸에 닭살이 돋으며 말도 못 하겠더라. ‘드디어 우리가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냈다’는 의미는 ‘세계 진출을 할 수 있는 기본(바닥)을 다졌다’라는 의미다. 그날 유네스코 행사에 참석했던 북측 대표자 두사람이 나에게 와서 ‘실례지만 뭐하나 물어봐도 됩니까?’라고 묻더라. 큰 질문일 줄 알았는데 몇㎏인지 물었다. 내 몸무게를 듣고는 ‘대단하다’며 놀라워했다. 이처럼 개인적인 것을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고, 우리가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막상 대화하다 보니 별것 아니었는데 왜 여태까지 벽을 갖고 있었나 싶더라.”

-씨름을 세계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첫 번째는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경기규칙을 좀 더 다듬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것을 가지고 세계에 보급해야 하는데 씨름인들만으로는 힘들다. 국가나 기업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도움을 받게 되면 헌신적으로 알리고 세계인들을 한데 묶어 함께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이 씨름인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선수들을 초청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

“일단 소주 한잔해야 할 것 같다(웃음). 그래야 많은 생각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집에 초대해 그냥 내 삶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그들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을까 싶다. 국밥 한그릇 먹고 에버랜드 갔다가, 민속촌도 가고 내가 사는 용인을 보여주고 그러면서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이태현 용인대 교수가 김재현 한국문화스포츠마케팅진흥원 이사장과 인터뷰하고 있다. / 청년서포터스 ‘젊은 나래’

이태현 용인대 교수가 김재현 한국문화스포츠마케팅진흥원 이사장과 인터뷰하고 있다. / 청년서포터스 ‘젊은 나래’

-개인적인 얘기 좀 해보자. 씨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아버지 친구분의 아들이 씨름을 했다. 감독이 나를 딱 보더니 우유랑 빵을 준다고 ‘내일부터 나와’ 했다(웃음). 내 고향이 김천인데 구미까지 아침마다 1시간씩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씨름이 적성에 맞았나.

“초등학교 때까지는 너무 힘들어 씨름의 묘미를 몰랐다. 의성중학교 3학년 말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고등학교 선배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바른길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씨름에 대한 묘미를 찾고, 목표가 생겼다. 제일 좋은 건 내가 노력한 만큼의 보답이 왔다는 거다. 씨름이 고마웠다.”

-현역시절에 가장 힘든 부분은 무엇이었나.

“(웃음)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운동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한겨울에 뛰다가 목이 너무 말라 내리는 눈을 넘어지면서 한움큼 잡고 입안에 넣고 뛰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이 산에서 떨어지면 한 일주일 쉬겠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한창 동계훈련할 땐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운동을 했다. 가장 힘든 시기는 고등학교에서 프로로 전향할 때였다. 고교 졸업 이후에 대학 진학이냐, 실업 프로팀에 취업하는가를 놓고 고민했다. 내가 수능 1세대였는데, (입시에) 떨어졌다.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거였다. 그때가 제일 정서적으로 힘들었다. (그래도) 그다음에 재수했는데 역시 공부를 하니까 거기에 맞는 성적이 나오더라.”

-스무 번이 넘도록 ‘장사’ 자리에 올랐다. 자신에게 ‘장사’는 어떤 의미인가.

“20대 때 청바지와 가죽점퍼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천하장사를 하고 나서도 그렇게 입고 다녔다. 그러니까 어른들이 ‘천하장사가 맨날 이렇게 입고 다니냐’고 했다. 내가 씨름의 대표라고 했다. 또 지나가다가 더워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천하장사가 어디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냐’는 거다. 어릴 때는 ‘아니, 더워서 아이스크림 먹고 있는 건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순간 씨름에 연륜이 쌓이고 장사를 여러 번 하면서 사람들한테 호응과 관심을 받고 나서부터는 행동을 조심하게 됐다. 길가에 침도 못 뱉겠더라. (내가 하는) 행동들이 씨름 전체의 이미지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거다. 장사라는 것이, 노력해 얻은 대가도 있지만, 거기에 따른 책임감도 분명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책임감을) 잘 이끌어가는 선수가 좋은 선수라고 생각한다.”

-국내의 씨름 부흥을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관중이 있어야 스포츠가 살아난다. 그러려면 모래 위에서 희로애락이 나와야 한다. 이겼을 때 즐거움을, 패배했을 때의 슬픔을 모래 위에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한판 지더라도 나의 기쁨을 만들기 위해 더 파이팅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경기력은 후배들이 노력해 많이 올라왔는데, 아직까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은 좀 부족한 것 같다. 이만기·강호동 선배들 보면 모래 위에서 텀블링을 하고 고함을 지르고 한다. 이겼다고 환호를 하면 사람들이 같이 좋아해 주고, 졌을 때 모래를 치면 아이고 소리도 난다. 이런 게 나왔을 때 (관중과의) 교감이 이루어진다. 그게 조금 더 가미가 된다면, 진짜 대형 스타가 나올 것 같다.”

- 선수 시절에 별명이 ‘황태자’였고, 최고 미남이지 않았나.

“지금 선수들 너무 잘 생겼다. 내가 봐도 부럽다.”

-스포츠에는 ‘홈어드밴티지’가 있다. 씨름도 그런가?

“씨름은 반대다(웃음). 씨름은 집(고향)에 가면 팬들이 많으면 웅성웅성하고, 기대감이 커진다. 축구, 야구, 농구 같은 구기종목은 시간 파트가 나뉘어 있기 때문에 장시간 보여줄 수 있는데, 씨름은 단 1초에 끝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구미에서 시합할 때, 내가 듣기에는 (관중의) 90%가 이태현을 외쳤다. 그러면 들어갈 때 기분은 정말 좋다. 그런데 한판 이기고 경기장에 들어오면,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 이런 홈어드밴티지가 개인적으로는 부담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역대 상금 랭킹 1위인데?

“지금 남은 건 없다(웃음). 보통 상금을 타면 팀 회식을 했다. 시합 끝나고 고기를 먹고, 뒤풀이로 호프집에 가서 맥주와 폭탄주 마셨다. 그날 저녁은 기분 좋아 쐈다. 1994년에 첫 장사 때 1500만원을 받았다. 그런데 동네잔치부터 모교 찾아가고, 주위 인사도 하고 밥을 수십 번 샀다. 심지어 기념품도 만들었다. 그러니까 천몇백만원 적자가 났다. 94년 추석부터 95년 추석까지 9연승을 했다. 아버지께서 ‘대현아, 이제 밥 못 사겠다’고 하셨다(웃음).”

-예전 선수들은 막대한 수입을 올리면 많이 베풀었던 것 같다.

“씨름은 상대가 있어야 실력을 키울 수 있다. 혼자 연습을 하는 건 한계가 있다. 기술 훈련은 동료가 있고, 팀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서로 큰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감사를 표현할 정도만 이뤄진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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