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독재 시대를 산 세대가 아니다”

김니나노(가명) 기자
몽유와의 저항시위를 이끈 웨이 모 나잉, 일명 ‘리틀 판다/ 몽유와 파업위원회

몽유와의 저항시위를 이끈 웨이 모 나잉, 일명 ‘리틀 판다/ 몽유와 파업위원회

웨이 모 나잉(26). 그는 리틀 판다로 불리는 몽유와의 저항 시위를 이끄는 리더다. 시위 때마다 감동적인 연설로 몽유와 시민에게 저항을 이어가게 한 영웅이다. 그는 군부에 의해 체포돼 고초를 당하고 있다. 그가 체포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주고받은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공개한다.

-쿠데타 이후 왜 몽유와로 왔나.

“양곤에서 자리 잡고 일하던 와중에 쿠데타를 맞이했다. 쿠데타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조국이 위기에 선 순간에 양곤에는 많은 사람이 저항의 조짐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나고 자란 몽유와를 떠올렸다. 지체없이 버스를 타고 몽유와로 향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몽유와였다.”

-군부에 의해 지명수배를 당한 후 든 생각은.

“예상했던 일이다. 몽유와 시위가 거세지면서 내 이름이 점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군부는 누구든 체포하려는 상황이었다. 그들 입장에서 나는 반드시 체포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체포되는 순간이라도 나는 미얀마 시민이고 몽유와 사람이다. 그 말은 군부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전혀 지명수배가 두렵지 않다.”

-체포되면 군부의 고문이 심하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

“나도 사람인데 두려움이 없다면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저항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군부를 받아들이지 않은 대가라면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Z세대라 불리는 미얀마 청년세대에 대해서 말해준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동안 군부와 독재의 시대를 살았던 세대가 아니다. 어른들은 이전의 탄 슈웨 정권 시절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세대이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 정부 출범 후 중·고등학교에서 자유롭게 공부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고 느낀 세대이다. 그런 우리에게 쿠데타가 일어나며 하루아침에 정전이 되듯 자유와 민주주의를 빼앗겼다. 이걸 우리에게 받아들이라고 하면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는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빼앗긴 시민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저항이다. 우리는 정부나 사회지도층이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시스템대로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시민의 힘으로 만드는 것이다. 군인이 총과 힘으로 정부를 만든다면 민주주의 시스템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그걸 세계 어느 나라 시민이 받아들이겠는가. 적어도 미얀마 시민은 받아들일 수 없다. 끝까지 저항하고 싸우는 것, 그것이 시민의 힘이다. 두고 봐라. 미얀마의 게임 체인저는 누구의 권력이 아니라 시민의 힘이다.”


몽유와의 저항시위를 이끈 웨이 모 나잉, 일명 ‘리틀 판다’ / 몽유와 파업위원회

몽유와의 저항시위를 이끈 웨이 모 나잉, 일명 ‘리틀 판다’ / 몽유와 파업위원회

-개인적으로 무슬림(이슬람교도)이라고 들었다. 종교 때문에 불이익을 받거나 하진 않나.

“나는 평상시에도 헤이트 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인 차별 또는 혐오발언)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불교가 대다수인 나라에서 무슬림이 마이너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것이 시민의 입장에서 뭐가 문제인가.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종교는 개인의 자유다. 이걸 명분으로 서로 싸우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재 해외에서 이뤄지는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 또한 몽유와 시위를 이끌며 CRPH의 한 멤버가 됐다. 지금 미얀마를 강제로 장악한 군부에 반대하는 진짜 미얀마 정부가 필요하다. 국가가 없는 시민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 CRPH는 해외와 국내를 망라한 미얀마 대체 정부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급히 만들어져 부족한 것도 많다. 하지만 조직은 조금씩 정비를 하며 시민의 힘으로 키워나가면 된다. 미얀마 시민에게 군부는 거대한 위협이므로 그들을 대적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를 지지하며 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가.

“한국은 지금 미얀마 시민들이 보기에 꿈같은 나라다. 미얀마 청년들은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한국도 군부독재 시절이 있었고, 시민의 힘으로 오늘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룬 것을 부러워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우리에겐 영화 같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한국의 오늘날이 그냥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보다 더 많은 피와 희생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에 남아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췄다고 들었다. 우리도 이번 전쟁(그는 저항 시위와 이번 사태를 전쟁이라고 불렀다)에서 이기면 그 시스템을 갖출 것이고, 지면 다시 암흑의 시대로 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꼭 승리할 것이다.”

-진짜 시위 때마다 체포가 무섭지 않나.

“전혀 무섭지 않다. 내가 하는 일은 미얀마의 시민과 미래를 위한 일이다. 당신들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판다의 저항 시간은 너무 짧았다. 지난 4월 15일 오후 3시(현지시간), 시위에 나서며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던 중 일반 차량으로 위장한 차에 들이받힌 후 사복 군인에게 체포됐다. 그가 몽유와에서 2월 7일 저항 시위를 시작한 지 겨우 69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가 체포된 후 공개된 고문의 흔적이 역력한 얼굴이 공개됐다. 몽유와 시민과 그의 측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몽유와 학생조직 청년들은 더 힘들어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더 많은 판다가 몽유와에는 있다”며 그가 체포된 당일에도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에게 시위는 저항의 최후 보루 같은 것이었다. 군인들의 총에 맞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함에도 시민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하지만 최대 수단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웨이 모 나잉은 경찰관 2명을 사제총으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현재 미얀마는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이라 민간인이라도 군사법원에서 선고할 수 있다. 군사법원에서 선고를 내리면 항소조차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몽유와 시민은 웨이 모 나잉이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라며 두려워하고 있다. 그의 측근들은 경찰관이 살해됐다는 시점에 그는 시위에 참석 중이었다며 사제총을 만들어 죽였다는 것은 군부의 억지 혐의라고 반박했다. 그의 어머니 모 산다 주(54)는 “아들이 체포 당시 차로 들이받혀 부상이 심하다고 들었다. 의료 처치를 받게 해달라고 반복해 요청했지만, 접견조차 되지 않고 있다. 군부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제발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자에게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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