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가 된 ‘동네 고수’? 공공스포츠클럽이 그리는 꿈

주영재 기자

전문 지도자 배치돼 안정적 선수 육성 가능

자립 위한 재정적·행정적 지원 절실

“힘 빼고 쳐야 해요. 치는 순간에 힘이 들어가면 안 돼요.”, “하나, 둘, 그렇지.”, “자세가 밑으로 앉으면 안 된다고 그랬죠. 무릎은 가만히 놔두고 스윙만 한다고 생각해야 해요.” 탁구공이 탁구대와 라켓에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낸다. 소리가 끊기는 사이엔 강사의 지도가 더해진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의 강습생은 젊은 강사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지난 8월 11일 오후 찾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의 용인스포츠클럽에선 탁구 수업이 한창이었다. 수업은 거리 두기를 위해 탁구대당 2명씩 인원을 제한하고, 사이에 탁구대 한개씩 비우고 진행됐다.

이 스포츠클럽이 둥지로 삼는 곳은 용인시국민체육센터이다. 샤워실과 탈의실, 탁구대를 비롯해 농구와 배드민턴, 댄스, 체조 수업이 가능한 다목적 체육관을 갖추고 있다. 탁구 수업을 듣는 김선자씨(41)가 배드민턴 수업을 마친 초등학생 자녀와 함께 귀갓길에 나섰다. 김씨네 4인 가족 모두 이곳 회원이다. 김씨는 “아이들은 뛰놀아야 한다는 생각에 학원에 보내지 않는다”면서 “탁구도 가르치고 싶은데 아직은 활동성이 더 높은 배드민턴이 좋아보인다”고 말했다. 탁구를 시작한 지 6년째인 그는 스포츠클럽의 코치진이 최고 수준이라면서 “스포츠이다 보니 이겨야 더 재밌는데, 선수 출신 교사가 이길 수 있는 비법을 콕콕 짚어 잘 가르쳐준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2020년 1월 문을 연 용인스포츠클럽은 공공스포츠클럽이다. 공공스포츠클럽은 지역 체육시설을 거점으로 다세대, 다계층, 다연령의 회원들이 참여하고, 전문 지도자가 다양한 종목·수준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비영리 사단법인 형태의 스포츠클럽이다. 3~5년간 4억~9억원의 정부 지원금을 받아 저렴하면서도, 양질의 스포츠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공공스포츠클럽은 지역 중심의 생활체육 저변을 확대하고, 전문선수 발굴과 은퇴선수 등 체육인의 일자리 창출을 목적으로 대한체육회, 문화체육관광부가 중심이 돼 2013년부터 진행한 사업이다. 지난 7월 21일 기준 전국의 공공스츠포클럽 수는 201개이다. 최소 5개 종목을 운영하는 대도시형(68개), 3개 종목을 제공하는 중소도시형(49개), 1개 종목을 제공하는 학교연계형(84개)으로 나뉜다.

서울 광진구스포츠클럽 회원들이 배드민턴 수업을 받고 있다. 현재는 코로나19 거리 두기 4단계로 중단됐다. 광진구스포츠클럽 제공

서울 광진구스포츠클럽 회원들이 배드민턴 수업을 받고 있다. 현재는 코로나19 거리 두기 4단계로 중단됐다. 광진구스포츠클럽 제공

생활체육과 엘리트체육 선순환 기대

국가가 아마추어 선수를 육성해 국가대표로 선발한 후 병영식 선수촌에서 훈련시키는 ‘국가 아마추어리즘’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코로나19 등 외부 요인이 겹치면서 선수촌에서의 합숙훈련이 어려워진 면도 있다. 재능있는 선수를 발굴하는 1차 통로였던 학교 운동부도 쇠락하고 있다. 성적 지상주의라는 압박감에 선수들은 지치고, 폭행, 성추행 등 사건사고가 빈발하면서 학부모도, 학교도 운동부를 꺼린다. 학령인구가 줄고, 스포츠 사교육 등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통로가 다양해진 것도 원인이다.

엘리트체육의 기반이 흔들리고, 생활체육의 토대는 아직 넓지 않다. 공공스포츠클럽은 이런 난맥상을 해결할 방안으로 주목받는다. 이지현 용인스포츠클럽 사무국장은 특히 생활체육과 엘리트체육의 선순환이라는 장점을 강조했다. 대회 성적이나 교장의 성향에 따라 존폐가 결정되는 학교 운동부와 달리 공공스포츠클럽에는 정규 지도자가 지속적으로 배치돼 전문선수를 안정적으로 육성할 수 있다. 이 사무국장은 “여러 종목을 함께하면서 전문선수를 키울 수 있고, 지도자를 배양할 수도 있다”면서 “다양한 학교에서 선수가 오다 보니 서로 간의 경쟁과 자기개발 측면에서 더 유리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종헌 광진구스포츠클럽 사무국장은 학교 체육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인재를 육성할 방법은 스포츠클럽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학교 체육도, 기존의 폐쇄적인 동호인 클럽도 대안이 아닌 상황에서 스포츠 과외라는 사교육으로 흘러가게 둘 순 없다”면서 “생활체육에 뿌리를 두고, 거기서 꿈나무를 발견해 자연적으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스포츠클럽의 의무와 책임이다”고 말했다. 황선근 대한체육회 스포츠클럽부 과장은 “학교 운동부가 해체되면서 운동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많다. 공공스포츠클럽이 만들어지면서 더 나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고, 각 종목 별로 선수들이 엘리트 체육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도 생기고 있다. 지역의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면서 사회 통합도 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선의 지도자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 즐기면서 운동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봤다. 세종시 공공스포츠클럽에서 농구를 지도하는 김민정 코치(22)는 “학교 운동부에선 성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고, 성적을 내야 지도자도 고용을 유지할 수 있다”면서 “이런 압박감 탓에 인권문제가 터지기도 하는데 스포츠클럽에선 아이들이 즐기면서 공부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생활체육에서 두각을 나타낼 경우 엘리트 과정으로 연계되는 과정도 잘돼 있다. 박상운 용인스포츠클럽 배드민턴 코치(32)는 “가르치는 학생이 배드민턴에 소질이 있고, 자신도 전문선수가 되고 싶어한다면 학부모 상담을 거쳐 배드민턴부가 있는 학교에 전학할 수 있도록 추천해준다”고 설명했다. 김 코치는 클럽에서 취미로 운동선수를 하다 전문선수로 넘어가 입상하는 사례도 자주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 남원 거점스포츠클럽에선 복싱 선수단을 운영하면서 청소년국가대표를 배출하기도 했다.

경기도 용인스포츠클럽에서 탁구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주영재 기자

경기도 용인스포츠클럽에서 탁구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주영재 기자

경기도 용인스포츠클럽에서 일반인 농구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클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인데 코로나19 거리두기로 현재는 중단됐다. 용인스포츠클럽 인스타그램 캡처

경기도 용인스포츠클럽에서 일반인 농구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클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인데 코로나19 거리두기로 현재는 중단됐다. 용인스포츠클럽 인스타그램 캡처

지역의 구심점으로 지역 사회 통합에 기여

공공스포츠클럽은 지역 소모임과 커뮤니티 활동이 이뤄지는 지역의 구심이 될 수 있다. 특히 노년층이 건강을 유지하고,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는 장점이 크다. 이종헌 사무국장은 “하루 쉬면 왜 쉬냐고 항의할 정도로 노인분들이 열심히 참여하는데 이분들에게 스포츠 활동은 건강을 증진하는 수단이자 사람을 만나고, 친해지면서 긍정적인 사회관계를 쌓는 기회가 된다”고 설명했다. 고령화 시대로 인한 의료비 부담을 줄일 수도 있다.

이런 사회 통합 기능을 높이려면 다목적 체육시설이 더 많이 필요하다. 지금은 에어로빅, 수영, 야구 등 개별 종목별로 시설이 운영되는데 다목적 종합 체육관에 여러 시설을 두면 가족이 함께 운동할 수 있다. 이종헌 사무국장은 “지금은 아빠는 아빠대로 조기축구회에 가고, 엄마는 엄마대로 에어로빅 학원에 가고, 아이는 자기네끼리 농구를 하는 상황”이라면서 “개별 종목 위주에서 장소 위주로 스포츠 참여가 이뤄져야 가족 간, 계층 간 소통이 이뤄지고, 지역의 문화적 구심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로그램별로 회비를 내는 방식을 벗어나 연간 회비로 클럽의 소속감과 활동 수준을 높이는 것도 제안했다. 그는 “독일의 경우 상견례나 모임 등 모든 동네 행사가 스포츠클럽에서 이뤄지고 있다”면서 “우리처럼 프로그램별 회비를 내는 게 아니라 클럽 회원으로 등록해 연간 회비를 내면 모든 시설과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동네마다 이런 체육관을 확보하면 좋겠지만 도심에선 이렇게 쓸 땅이 많지 않다. 그래서 초중등학교의 체육시설을 지역에 개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종헌 사무국장은 “학교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주민에게 의무적으로 개방하도록 해야 한다”며 “관리 책임을 지는 교육청과 교장이 꺼리지만 방과 후엔 책임 소재를 스포츠클럽이 지게 하는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6월 8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스포츠클럽법 제정안에 학교 체육 시설 개방에 관한 조항이 있지만 의무조항은 아니다. 문체부 관계자는 “스포츠클럽법 시행을 위한 기본계획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교육부와 협의해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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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운영 위기, 자립 위한 지원 필요

공공스포츠클럽 사업은 기초지자체 한곳당 공공스포츠클럽 한곳을 만드는 것으로 올해 말까지 모두 229개를 채우면 끝난다. 그 이후엔 스포츠클럽법이 도입한 지정스포츠클럽이 공공스포츠클럽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스포츠클럽법은 스포츠클럽을 중심으로 생활체육 생태계의 저변을 넓히고 스포츠 복지를 확대한다는 차원에서 마련됐는데 동호회, 등록스포츠클럽, 지정스포츠클럽으로의 단계적 성장을 예정하고 있다. 동호회가 요건을 갖추면 지자체에 스포츠클럽으로 등록하고, 정부 지원사업 공모에 응모해 선정되면 지정스포츠클럽이 돼 정부 지원을 받는 방식이다.

2019년 공공스포츠클럽으로 선정된 광진구 스포츠클럽이나 용인스포츠클럽의 경우 내년 상반기에 지원이 종료된다. 지원금을 받는 동안 재정적 자립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으라는 취지인데 한창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회원수를 늘려야 할 때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았다. 여닫기를 반복하면서 두 스포츠클럽 모두 제대로 운영한 기간은 3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코로나19로 공공스포츠클럽이 지자체의 위탁을 받아 운영하는 체육관이 폐쇄되거나 백신접종센터 등으로 이용되면서 공간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광진구 공공스포츠클럽은 임시방편으로 민간 시설을 임대해 시니어 당구교실을 열고, 한강 윈드서핑장을 이용해 수상스포츠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한기범 농구교실과 함께 실외 농구장에서 청소년 농구교실도 열어 꽤 호응을 얻었는데 최근 코로나19 확산으로 거리 두기 4단계가 되면서 전면 중단됐다. 용인스포츠클럽도 탁구, 배드민턴 프로그램은 재개했지만 농구 프로그램은 할 수 없다.

자립을 위해선 재정과 인력, 시설 지원이 필요하다. 이종헌 사무국장은 “3년 지원 기간 회원을 늘리고, 프로그램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 기회가 코로나19 때문에 날아갔다”면서 “지자체 체육시설을 위탁 운영하면서 수익의 절반을 사용료로 내는데 이 부담만 줄여도 흑자는 아니어도 충분히 운영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행히 내년 6월 시행되는 스포츠클럽법에 공공 체육시설 사용료의 전부 또는 일부를 감면할 수 있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문체부 관계자는 “사업 기간 3개월 연장 외에 추가 지원은 어렵다”면서 “공공스포츠클럽 운영이 끝난 이후에는 지정스포츠클럽이 돼 지원을 받을 수 있어 내년이 되면 사정이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황선근 과장은 “선수 양성이나 지역사회 통합을 위한 공공사업을 수행하면 클럽에 보조금을 지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재정지원이 어렵다면, 대부분 지역 체육회가 맡는 지자체의 스포츠사업에 공공스포츠클럽이 지원할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지현 사무국장은 “교육청이 하는 초등스포츠클럽 사업이나, 경기도의 경기스포츠클럽 사업에 지원해 운영할 수 있게 됐는데 이렇게 사업으로 지원하면 훨씬 여유 있게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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