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비자 때문에 폭력도 견뎠는데”…자식 데리고 세상 등진 비정한 남편

김송이 기자

한국인 남편에게 다섯 살 딸 잃은 필리핀 국적 엄마

지난해 입국 이후 폭력 이어져…사건 당일 협박 문자

체류자격 문제될까 신고 못해…보복 가능성에 위축

지난 18일 오후 인천 남동구의 한 장례식장에 아름이(가명)의 빈소가 차려져 있다. 김송이 기자

지난 18일 오후 인천 남동구의 한 장례식장에 아름이(가명)의 빈소가 차려져 있다. 김송이 기자

“딸 때문에 내가 열심히 살고 돈도 벌었던 건데…. 너무너무 사랑하는 딸을 잃은 이 상황을 아직 받아들일 수 없어요.”

지난 18일 오후 7시 인천 남동구의 한 장례식장에서 만난 필리핀 국적의 안젤리카(가명)는 검은 상복 차림으로 딸 아름이(가명·5)의 영정사진 앞에 앉아있었다. 딸의 시신을 확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안젤리카의 눈시울이 붉었다. 지난해 한국에 들어온 안젤리카 곁에는 가족 대신 필리핀 친구 두세명이 자리했다. 안젤리카의 한국 적응을 도와온 복지사들과 이주여성 지원가들도 긴급 모금으로 차려진 빈소를 지켰다.

아름이는 지난 17일 오전 9시37분쯤 남동구의 빌라에서 아빠이자 안젤리카의 한국인 남편인 A씨와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 별거 중이던 남편이 주말 동안 아이를 만날 수 있도록 한 안젤리카는 “(사건) 전날까지도 아름이와 영상통화를 했다”면서 “남편이 자주 협박을 했지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고 했다.

A씨는 사건 당일 오전 8시23분 안젤리카에게 “네가 나하고 아름이를 죽이는구나. 영원히 너 죽을 때까지 원망할거다”는 문자를 남기고 연락이 끊겼다. 경찰은 부녀의 정확한 사망 원인 등을 조사하고 있다. 현장에서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부검 전 아름이의 몸을 확인했던 안젤리카는 목과 어깨의 자국을 보아 아이가 목이 졸리고 던져진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시신을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19일 “코와 입이 폐쇄돼 질식사했다”는 1차 구두 소견을 경찰에 전달했다.

“아름이가 엄마 아빠랑 같이 있으면 전혀 아빠한테 안 갔어요. 그럴 때마다 남편이 ‘네가 아빠 싫어하라고 가르친 것 아니냐’고 제게 말했어요.” 안젤리카는 “아름이에게 좋은 가족을 만들어주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면서 “남편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남편의 폭력은 안젤리카가 지난해 딸과 한국에 들어온 후 계속 이어졌다. 안젤리카는 지난해 11월 A씨에게 목을 졸렸고, 지난 6월에는 ‘다 같이 죽자’는 협박을 들었다. 욕설로 점철된 폭언이 이어졌다. 아름이도 폭언에 노출됐다. 안젤리카는 지난 6월 증거를 모아 폭행·협박을 일삼은 A씨를 경찰에 고소했고, A씨는 지난 7월 말 법원이 보호처분을 내리는 ‘가정보호사건’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된 상황이었다.

당장 이혼하고 싶었지만 딸의 비자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안젤리카는 “아름이의 국적 서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 참고 참은 것”이라고 했다. 이주민 신분이라는 ‘약점’ 때문에 가정폭력 신고조차 주저했다고 한다. 피해자라 하더라도 사건에 연루되면 체류자격이 문제될까 우려한 것이다. 인천이주여성센터 살러온 관계자는 “(안젤리카는) 이혼을 해도 외국인이고 한국어를 잘하지 못해 양육권을 빼앗길까 염려했었다”고 했다.

신고 이후 보복당할 가능성도 안젤리카를 위축시켰다. 안젤리카의 가정폭력 신고를 도와온 남동구 가족센터 관계자는 “남편이 ‘찾아가겠다, 다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 (안젤리카가) 두려워했다”며 “아이사랑카드도 한국인 남편의 명의라 친권자인 남편이 어린이집을 옮기거나 하원시키겠다고 하면 막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원가들은 가정폭력 피해자가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가해자를 피해자와 자녀로부터 확실하게 격리해야 한다고 했다. 조세은 살러온 부소장은 “이주여성이 피신해 일상을 못 누리는 동안 가해자의 두 발을 묶어야 한다”면서 “가정폭력 발생 가정이라도 아동학대 신고가 없으면 아동면접권이 살아있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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