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선량과 한량을 가리는 나의 ‘卜’

엄민용 <당신은 우리말을 모른다> 저자

10일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이 나라의 주권이 국민들에게 있음을 투표로 보여주는 날이다.

저마다 한 표를 행사하는 데 쓰이는 투표 도장의 모양은 ‘점 복(卜)’ 자다. ‘卜’은 점을 친다는 의미뿐 아니라 ‘상고(詳考)하다’나 ‘헤아리다’ 등의 뜻도 가지고 있다. 꼼꼼하게 따져서 검토하고 참고해 우리의 미래를 점치라는 조언이 도장에 새겨져 있는 셈이다.

투표 도장의 표시는 예전엔 동그라미표(○)로만 썼다. 하지만 ‘○’는 투표용지를 접을 때 반대쪽에 잉크가 묻으면서 무효표를 만드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 안에 ‘사람 인(人)’ 자를 넣었다. 그러나 이때는 정치권 일각에서 ‘人이 특정 후보자 성명 속의 시옷(ㅅ)을 암시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1994년부터 ‘卜’ 자로 변경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국회의원을 다른 말로 선량(選良)이라고 한다. 이는 선택현량(選擇賢良), 즉 ‘어질고 바른 사람(賢良)을 뽑는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오래전 중국 한(漢)나라에서는 현량방정(賢良方正)을 따지고 효렴(孝廉)을 살펴 관리를 뽑았다. 현량방정은 한자상으로는 ‘성품이 어질고 품행이 바름’을 뜻하지만, 그 안에는 문장력과 학식도 두루 갖춰야 함을 품고 있다. 효렴은 글자 그대로 효성이 지극하고 행동이 청렴결백함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중종 때 조광조의 건의로 현량과(賢良科)를 두어 관리를 선발했다. 재주와 품행을 겸비한 인물을 뽑아 국정을 개혁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현량과에서 인재를 선발하던 일을 줄인 말도 ‘選良’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어질고 착하며 전문 지식을 갖춘 이’가 나라를 이끌어가야 함은 당연하고도 당연하다. 다만 옛날엔 그 권리가 높은 자리의 관리나 왕에게 있었으나, 이젠 국민이 선택할 수 있다. 겉으론 선량인 척하면서 민생은 외면한 채 자신과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권한을 남용하며 놀고 먹을 한량(閑良)이 국회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힘이 국민에게 있는 것이다. 10일 찍을 ‘卜’ 자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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