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오늘은 뭘 살까…‘소비하는 인간’의 재발견

김유진 기자

소비의 역사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496쪽 | 2만5000원

소비는 곧 현대인의 정체성이다. 단 하루도 무언가를 소비하지 않고 일상을 영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의식주를 비롯한 필수품에서부터 편의를 위한 각종 서비스, 취향을 반영하는 기호품, 심지어 경험과 지식까지 우리는 소비하고 또 소비한다. 인간은 몇 백년 전부터 소비하는 삶을 살았다. 소비하는 인간, 즉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의 탄생이다. 그러나 학계에서 소비는 생산에 비해 폄하되어 왔다. <소비의 역사> 저자인 서양사학자 설혜심 연세대 교수는 “소비를 진지한 학문적 주제로 끌어올리고 싶다”며 “소비 행위에서 인간의 동기와 목적성에 주목하는 것은 인간을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세우는 작업”이라고 밝혔다. 책이 다루는 내용들을 다섯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봤다.

①소비+욕망

[책과 삶]오늘은 뭘 살까…‘소비하는 인간’의 재발견

욕망은 새로운 상품을 낳았다. 양복은 프랑스혁명을 거치며 남성들의 표준 복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귀족들의 화려한 옷차림 대신, 부르주아 남성들이 즐겨 입던 단색의 모직물로 만든 옷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1824년 파리에서 포목상 피에르 파리소가 연 기성복 상점은 중간계급에게 소비의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남성복이 수수한 스리피스 슈트로 굳어진 것과 달리, 여성의 옷은 더욱 호화로워졌다. 몸을 옥죄는 코르셋, 치렁치렁한 드레스, 하이힐, 커다란 모자가 유행했다. 여성들이 소비의 주체로 떠올랐지만, 정치적 악덕으로까지 간주된 ‘사치’는 여성적인 것, 부패, 무정부 상태 등과 결부되었다. 유럽의 지배층은 귀하고 이국적인 소비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17세기 후반 네덜란드 델프트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 신발. 중국 꽃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17세기 후반 네덜란드 델프트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 신발. 중국 꽃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중국 도자기는 17세기 후반~18세기 중반 귀족들 사이에서 일었던 중국풍 취미(시누아즈리)의 대표주자였다. 중국 징더전 도공들은 아예 유럽 고객들을 위한 도자기를 생산했다. “보이지 않는 상상의 네트워크”를 매개로 중국과 유럽, 두 세계가 연결된 것이다.

②소비+유혹

물건 판매는 유혹의 기술과 흡사했다. 당시 문헌들은 상거래 행위를 구애의 과정에 비유했다.

이미 18세기 초부터 런던에는 여성 고객을 전담하는 매력적인 남성 점원이 등장했다. 중년 남성들을 상대하는 여성 점원들은 ‘볼거리’ 취급을 받았고, 가난한 여성들은 때때로 성을 팔며 연명했다. 발터 벤야민은 “판매 여성과 상품은 하나다”라고 단언했다.

소비혁명이 진전될수록 판매도 전문화되었다. 1860년 세계 최대 재봉틀 회사인 싱어는 당시로서는 고가였던 재봉틀을 각 가정에 팔기 위해 할부제를 고안해냈다. 싱어는 훈련받은 판매원을 고용해 ‘계약금 1달러에 나머지 금액은 1주일에 1달러씩 갚아 나간다’는 메시지를 적극 홍보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편 떠돌이 약장수, 또는 돌팔이 의사들이 마을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현란한 말솜씨를 발휘해 강장제 등 ‘특허약’을 팔아치우기도 했다. 의사의 처방 없이 구할 수 있는 특허약의 생산이 급증했고, 이 약을 만병통치약으로 홍보하는 광고 전단이 봇물을 이뤘다.

③소비+공간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는 공간도 진화했다.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는 런던 인구의 세 배가 넘는 600만명이 몰렸다. 철골과 유리로 만든 ‘수정궁’ 박람회장은 그 자체로도 거대한 스펙터클이었지만, 내부에 가득 진열된 상품들은 그동안 소비에서 소외됐던 부르주아나 노동계급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소비자’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꼭 1년 뒤, 최초의 근대적 백화점으로 불리는 봉마르셰가 파리에 개장했다. 백화점은 고객들의 시선을 최대한 끌 수 있는 방식으로 물건을 진열했고, 직접 도시의 백화점에 올 수 없는 잠재적 고객들을 위해 카탈로그를 발행했다. 1956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 들어선 사우스데일 쇼핑센터는 거대한 실내공간에 대형 백화점과 주차장, 산책로, 조류원, 상점, 카페 등을 모두 합쳐놓았다. 미국 최초의 몰인 이 쇼핑센터를 만든 빅터 그루엔은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처럼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단초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루엔은 그러나 10여년 뒤 쇼핑몰이 “거대한 쇼핑 기계”이자 “땅을 낭비하는 추한 주차장의 바다”로 변질되었다며 미국을 떠났다.

④소비+정치

소비 행위에는 언제나 권력이 작용했다. 비누는 19세기 후반 아프리카에서 제국주의자들이 퍼뜨린 ‘백색신화’와 ‘문명화’ 이데올로기의 선봉에 선 상품이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을 비위생적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고, 영국의 ‘피어스 비누’는 비누를 사용하면 검은 피부가 하얘진다는 노골적인 내용의 광고를 내보냈다. 이 같은 위생통치는 지속적인 착취를 위해 식민지인들을 노동력으로 유지시키는 동시에 소비자로 편입시키려는 제국주의적 기획의 일부였다. 제국주의적 편견을 거리낌없이 드러낸 또 하나의 상품으로는 트레이드 카드가 있다. 트레이드 카드는 원래 상점 홍보물이자 기념품으로 만들어졌다가 인쇄술의 발달로 대중적인 마케팅 수단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트레이드 카드에 담긴 세계의 지리나 풍속, 역사는 철저히 서구중심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을 반영했다. 독일 리비히 회사가 제작한 ‘한국’ 시리즈에서 한국의 귀부인은 동남아풍의 의상과 과일모자를 쓴 채 등장했다. 흑인이나 이민자들은 우스꽝스럽거나 교양없는 이미지로 그려졌다.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는 인종별로 외모를 위계화함으로써 성형수술 확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코는 인종의 ‘열등성’을 구분하는 표식이 되었는데, 매부리코를 가진 유대인들이 성형수술을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미국 성형외과 의사들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온 유대인들에게조차 코 성형을 적극 권했다. 저자가 “윤리적 소비의 시원”으로 꼽는 18세기 말 영국의 설탕거부운동은 소비자운동이 때로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인들은 노예제에 반대하며 서인도제도산 설탕 소비를 줄이고, 대신 동인도제도에서 생산된 설탕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에서도 노동자 착취가 빈번하게 이뤄졌다는 점에서는 서인도제도와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운동의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소비자의 성찰성이 결여된다면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⑤소비+오늘

책은 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소비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마치 21세기의 풍경이 어른거리는 듯한 장면들이 많다. 판매직 여성들이 상품과 동일시되고, 구매력을 갖춘 여성들이 소비의 주체보다는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지금도 엄연한 현실이다. 돌팔이 의사들의 활약은 오늘날 의료시장을 예견하는 듯하다. 인간의 몸은 의약품과 건강보조기구로 인해 거대한 소비의 장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미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뻗어나간 화장품 방문판매사 에어본은 수많은 여성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서구중심적 미의 기준을 퍼뜨리는 데도 일조했다. 일상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소비에는 이처럼 현재까지도 공명하는 이야깃거리들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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