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소련 종말의 시작점, 체르노빌

김종목 기자
[책과 삶]소련 종말의 시작점, 체르노빌

체르노빌 히스토리
세르히 플로히 지음·허승철 옮김
책과함께 | 536쪽 | 2만8000원

부제는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의 대응 방식’이다. 체르노빌 참사에서 ‘대응 방식’ 결과는 대략 안다. 끔찍했다. 최악이다. ‘체르노빌에 관한 최초의 포괄적 역사서’를 자처하는 이 책에는 여러 사례가 나온다.

1986년 4월6일 체르노빌 원전 참사 발생 현장에서 100㎞ 떨어진 키예프에서 어린이 소개(疏開)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당시 과학자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만일 당신들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이 키예프에 있다면 이들을 데리고 나가지 않을 건가요”라는 반문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료들은 참사 와중에도 전력 생산량 달성 여부를 고민했다.

멀쩡하게 잘 지은 원전에서 느닷없이 폭발과 붕괴가 일어난 건 아니다. 체르노빌 원전 건설 담당자들은 이런 문제를 겪었다. 건설감독부가 사전 주문한 조립 콘크리트 블록은 10분의 1가량이 도착하지 않았다. 도착한 물량의 10% 이상이 불량품이다. 핵연료 저장 탱크, 원자로 터빈실 기둥에도 불량품이 들어갔다. 언론 보도를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인들이 1990년 4월 키예프에서 소련에 체르노빌 참사 결과 은폐를 항의하고, 자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저자는 체르노빌 참사가 우크라이나 독립과 소련 붕괴로 이어졌다고 봤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후에도 자국에서 계속 원전을 가동하고 있다. 책과함께 제공

우크라이나인들이 1990년 4월 키예프에서 소련에 체르노빌 참사 결과 은폐를 항의하고, 자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저자는 체르노빌 참사가 우크라이나 독립과 소련 붕괴로 이어졌다고 봤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후에도 자국에서 계속 원전을 가동하고 있다. 책과함께 제공

최악의 원전 참사 전후 드러난
무능·은폐·협박·검열·강요…
처참한 희생을 낳은 부조리를
증언과 기록을 통해 고발한다

소방대원·과학자·기술자들의
핵아마겟돈과의 사투도 ‘생생’

참사 전인 1986년 2월 열린 모스크바 공산당대회에서 원전 건설 현장에서 발생한 기술 규정 위반 사항 보고는 묵살당했다. “5년 내 2배로 증설한다는 계획 발표”가 우선이었다.

참사 이후는? 참사 다음날 우크라이나 내무부는 당 중앙위원회에 “화재는 진압했다. 특별한 일은 없다”고 했다.

체르노빌 민방위대장이 겪은 일은 어떤가. 이 대장은 우여곡절 끝에 키예프의 민방위 당국 상관들과 연락이 닿았다. 이들의 질문은 “화재가 진압되었느냐”였다. 체르노빌 민방위대장이 답했다. “화재라니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고요! 대형 사고요! 주민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상관의 답은 이렇다. “자넨 민심 동요자야! 그런 보고를 하면 우리 목이 날아가는 걸 모르나?”

소련 관료의 무책임과 계획경제의 부조리만 이어졌다면, 체르노빌은 지금 기록보다 더 처참한 희생을 낳았을지 모른다. 무책임과 부조리의 한복판에서 사투를 벌인 이들도 있다. 그들 중 한 그룹이 소방관이다.

휘발성이 강한 석유에서 나온 역청(瀝靑)이 원자로 지붕을 뒤덮었다. 안전 규정을 위반한 재료다. 역청이 소방관들 장화를 찢었다. 소방관들은 불꽃을 밟으며 진화를 이어갔다. 후유증으로 죽은 소방관들을 국가는 어떻게 대했나. 소련 당국은 한 소방관의 장례식에 군인들을 보냈다. 소방관 부인의 말이다. “아무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우리만 달랑 있었다. 그들은 남편의 관을 재빨리 흙으로 덮었다. ‘더 빨리! 더 빨리!’라고 장교는 소리쳤다. 그들은 내가 관을 한 번 안아볼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버스에 올라탔고 묘지를 떠났다. 모든 것이 은밀히 진행되었다.” 소련 당국은 소방관들이 죽고 있다는 나쁜 뉴스가 외국 특파원들에게, 이들을 거쳐 소련 주민들에게 알려져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무능, 은폐에다 협박, 검열, 강요 등 국가의 폭력성이 참사 전후 드러났다. 저자는 소련 관료주의, 공산당 관리들의 오만, 체제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원자로 폭발에서 시작해 2000년 12월 원전 폐쇄와 2018년 5월 손상된 원자로 위에 새로운 보호막을 설치한 마지막 단계까지 체르노빌 참사를 다뤘다. 방사능을 처음 인지했던 스웨덴의 원전 담당자와 미국 정치인들의 증언도 찾았다. 기록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며 참사의 정치·사회·문화적 측면을 짚어간다. 이 참사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일으키는 거시적 흐름도 좇아간다.

어떻게든 피해를 줄이려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도 자세히 실었다. “체르노빌이라고 불리는 핵아마겟돈에 던져진 소방대원, 과학자, 기술자, 병사, 경찰관들은 핵용광로를 끄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사투를 벌이다가 그들 중 일부는 목숨을 잃었고, 많은 이들이 건강과 복지를 희생했다.” 저자는 헬리콥터에 올라타 뚜껑이 열린 원자로에 모래 수천t을 쏟아부은 이들, 원자로 밑의 지반을 동결하려고 맨손으로 터널을 판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저자는 “체르노빌은 소련의 원자력 산업뿐만 아니라 소련 체제 전체를 붕괴시킨 기술적 재앙의 이야기다. 이 사고는 소련 종말의 시작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체르노빌은 “망가진 공산주의 체제와 원자로의 설계 결함 탓”에 생긴 과거 역사일 뿐일까. 저자는 “체르노빌 사고 원인은 오늘날에도 여러 곳에서 보인다. 국가 위상을 높이거나 강대국 지위를 얻기 위해 경제 발전을 가속화하고, 에너지 및 인구 위기를 극복하려고 애쓰면서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립서비스”만 하는 국가와 정치인의 문제를 비판한다.

HBO의 2019년 제작 드라마 <체르노빌>을 좋아했거나, 더 구체적 사실을 알고 싶은 이라면 이 책이 제격이다. 텍스트의 힘은 영상의 강렬함 못지않다. 과장된 수식은 배제했다. 육하원칙으로 참사의 전후, 사람들의 고통을 상세하게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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