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 윤리, 재현 불가능성, 글쓰기 한계 같은 어구를 넘어서다

신새벽 민음사 편집자
[신새벽의 문체 탐구]소수자 윤리, 재현 불가능성, 글쓰기 한계 같은 어구를 넘어서다

망명과 자긍심
일라이 클레어 지음, 전혜은·제이 옮김
현실문화|336쪽|1만6000원

나의 연구자 필자들. 그들은 대학자의 글을 대하면서 자신의 연구를 심화시킨다. 주로 논문을 보고 어려운 학술서를 읽는다. 대중교양서는 잘 읽지 않는다. 그런 연구자들의 책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원고에 어떻게 임해야 할까? 편집 지침을 얻으려고 독자들에게 두루 호평을 받은 책 <망명과 자긍심>을 읽었다.

장애운동 활동가이자 작가 일라이 클레어는 1963년 미국 오리건주 쿠스 베이에서 태어났다.

밀스 칼리지에서 여성학을 전공하고 1993년 고더드 칼리지에서 문예창작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시집 <골수의 이야기>(2007), 논픽션 <눈부시게 멋진 불완전함>(2015) 등을 냈다. 1999년 출간된 대표작 <망명과 자긍심>은 장애학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라이 클레어는 목재업과 연어잡이가 주 수입원인 시골 마을에서 강과 산에 안겨 자랐다. 교사인 아버지로부터 강간, 고문을 당했다.

원피스보다 멜빵바지를 좋아하는 여자애였는데 레즈비언 공동체를 만나면서 스스로를 여성을 사랑하는 남성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소근육 운동 조절 능력이 부족해 손이 떨리고, 사랑하는 암벽등반을 하기에 대근육 운동 능력도 제약이 된다. 그는 뇌병변 장애인, 젠더퀴어이자 백인 노동계급 마을 출신인 친족 성폭력 생존자다. 이렇게 정체성들을 이야기하기가 책의 내용을 이룬다.

원서의 부제인 ‘장애, 퀴어성, 해방’이 한국어판에서는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으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교차란 ‘나는 여자다’ 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나는 여자이고 흑인이며 노동자이면서 장애인이다’라고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을 복합적으로 보는 것이다.

1970년대 이래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성별과 인종, 계급 갈등 속에서 우선순위를 줄 세우지 않고 연대를 확장해온 역사에서 나온 개념이다. 한국에서는 ‘교차성’이라는 말과 함께 페미니즘, 장애학, 퀴어 연구, 나이 듦에 관한 연구와 저서가 계속 출판되고 있다.

일라이 클레어의 성과는 이론가를 앞세우기보다 집, 몸, 망명, 자긍심 등의 말에 실감을 불어넣는 노력에서 나온다. 학대와 가난을 떠나온 그는 이렇게 쓴다. “떠난다는 것은 복잡한 일이다.” 여느 논문투처럼 ‘망명의 체험은 교차성에 대한 복잡한 사유를 요구한다’라는 식으로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나의 백인 몸” “나의 퀴어 몸” “집으로서의 몸”이라고 노래하듯이 반복한다. ‘몸의 신체성은 서구의 이성중심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중요한 이론적 참조점을 제공한다’라는 식이 아니다. “자기혐오를 자긍심으로 바꾸는 일은 근본적인 저항 행위다”라는 문장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되뇌는 소수자의 윤리, 재현의 불가능성, 글쓰기의 한계 같은 어구를 넘어선다.

일라이 클레어의 섬세하고 단순한 문체는 전혜은과 제이의 공들인 번역으로 한국에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나를 잡아끄는 건 단지 그가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다. 어떻게 말하는가이다”라고 아우로라 레빈스 모랄레스는 추천의 글을 붙인다. 푸에르토리코 출신 시인이자 라틴 페미니즘의 기수인 레빈스 모랄레스는 <망명과 자긍심>의 힘이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에서 나온다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일라이 클레어의 글은 재능, 통찰력에 진실성까지 갖춘 보기 드문 ‘예술’이라는 것이다. 예술. 나의 연구자 필자와 동료 편집자들을 위한 문체 탐구로 돌아오자. 연구를 바탕으로 쓴 원고에서 아쉬움을 느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 또한 성실한 조사와 윤리적 정당성만이 아니라 예술적인 완성도가 아닐까?

일라이 클레어는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의 자연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는다. 엘리트 지식인의 느끼한 웅변에 빠지지 않고 사실과 체험을 서정적으로 기술한다. 고통으로 빠져드는 마음의 경향성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지키려고 애쓴다. 질문을 남발하면서 뒷걸음치는 대신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 복잡한 사안에 대해서는 죄책감보다 책임감으로 개입하자고 제안한다. 책임. 나에게 어머니뻘인 일라이 클레어는 책임을 말하는 어른이라 존경심과 약간의 거리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일라이 클레어에게 할 말이 있기보다는 또래들에게 말하고 싶다. <사이보그가 되다>를 김원영과 함께 쓴 김초엽은 교정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글을 고쳤다고 한다. 프로 작가인 그에게도 <망명과 자긍심>을 읽은 뒤로부터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나의 경험과 장애 정체성을 진지하게 돌이켜보는 일이 꼭 필요했다.”(<책과 우연들>) 김초엽이 말하는 장애 정체성은 신경성 난청이 있다는 당사자성이라기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품게 된 소속감과 책임감을 뜻한다. 우리도 이렇게 각자의 현장에 진지해져보면 어떨까? 임시적인 일이라서든, 내가 준비되지 않아서든 ‘잘 모르겠다’는 느낌만을 주는 지금의 자리에 접속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좋은 책을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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