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에로 방화’는 오직 퇴행적?···‘친민중적 메시지’도 있다

김종목 기자

1980년대 문화를 조명한 ‘민중의 시대’

SF·동성애 소재 영화·대중음악 다뤄

‘에로 방화’엔 ‘여성 우호적 경향’도

“민중가요 역시 대중음악의 일부”

차범석의 <열대어>을 영화화한 <그대 가슴에 다시 한번>은 흑인 여성과 결혼한 한국인 남성의 이야기를 다뤘다. 빨간소금 제공

차범석의 <열대어>을 영화화한 <그대 가슴에 다시 한번>은 흑인 여성과 결혼한 한국인 남성의 이야기를 다뤘다. 빨간소금 제공

<민중의 시대>(빨간소금)는 학술 영역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1980년대 문화를 조명한다. ‘에로 방화’와 ‘동성애 소재 영화’, ‘SF 소설·만화’, ‘대중음악’ 등 ‘민중사’를 서술할 때 분석 대상에서 밀려난 대중문화를 새로 적어나간다.

‘에로 방화’와 ‘민중’이 무슨 관계일까. 이윤종(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전임연구원)은 ‘진보와 퇴행 사이 역진하는 영화, 에로 방화’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본다.

1980년대 한국 에로 영화 장르는 “‘영화 산업의 건강한 사회의식에 대한 음모’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한국 영화의 병폐’라 일축됐다”. 1980년대의 1세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근원적으로 여성에 대한 한국 남성이 성적·정치적 지배를 이념적으로 영속시키는 성 착취적 기획물”로 봤다.

이윤종은 “여성 우호적 경향”이라는 ‘진보’의 측면도 들여다본다. “에로 방화 속의 여성들은 영상적·서사적으로 복잡한 존재들인 경우”가 많고, “서사와 응시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그 주체가 되기도 한” 점을 꼽는다. 여성들도 호응했다. <애마부인> 등 영화 구매자 중 다수가 중년의 가정주부였다는 점을 든다.

이두용의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하명중의 <땡볕>(1984), 임권택의 <씨받이>(1986) 등 ‘에로 사극’은 “전근대 조선의 가부장적 신분제 아래서 억압받는 한국 여성”의 모습을 담았다. 이윤종은 “에로 방화의 여주인공들이 체제에 의해 부당한 대우를 받은 한국인, 즉 민중을 상징적으로 구현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영화들은 친민중적 메시지를 영화인의 장인 정신 속에 녹여 내 한국인에 대한 예술적 민족지학의 기능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무릎과 무릎 사이>(1984)는 반미주의적 감성을, <어우동>(1985)은 반권위주의적 감성을 반영한 에로 방화의 예로 든다. 또 “거의 모든 에로 방화가 부와 명성을 좇는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만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남성 캐릭터를 회의적으로 그”렸다.

이윤종은 퇴행적 차원도 짚는다. 에로 민중영화나 민족주의 영화는 여성 신체를 알레고리로 활용하는데, “여성의 정조가 한국의 인종적 순혈성 혹은 민족, 민중의 결백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에로 사극에서 여성을 당대의 백성이나 현대 민중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것을 두곤 “전통적 가부장제의 젠더적 폭력을 왕조 체제하의 신분적 차별에 대한 장르적 비판으로 희석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말한다.

어경희(미국 예일대 동아시아학과 조교수)는 ‘제3세계 연대체 퀴어링하기-1980년대 초 한국문학과 영화 속 흑인 여성들’에서 가수 인순이가 주연하고, 강대선이 감독한 영화 <흑녀>(1982) 등을 분석한다. 어경희는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를 둔 여주인공 난이 성적인 카리스마로 남성들을 압도하는 장면 등을 두고 이렇게 분석했다. “가부장적 사회질서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남성 권력이 인종적 타자를 만남으로써 위기를 맞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국적이고 피부색이 어두운 여성과의 성적인 접촉은 남성성을 거세당할 위험을 안고 있다. 한국인 남성의 권위는 민족국가의 자장 내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어경희는 이 영화 장점으로 “관습적인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꼽았다.

또 다른 분석 대상은 강석경의 1983년 단편소설 ‘낮과 꿈’이다. “미국 흑인 여군 병사와 한국인 여성 성노동자 사이의 동성애적 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작품 속 “흑인 여성은 미국의 제국주의와 한국의 가부장제 폭력으로부터 한국 여성을 구하는 구세주적 인물로 등장”한다. 어경희는 이 소설의 “여성 동성애 관계는 동성애적 욕망의 재현이라기보다 유색 인종 여성들 사이의 연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문학적 장치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온당하다”고 말한다. 차범석의 <열대어>와 이를 각색한 영화 강대선의 <그대 가슴에 다시 한번>(1971)도 분석 대상이다.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흑인 여성인 그로리아와 결혼한 진우, 흑인 며느리를 용납하지 못하는 시어머니 등이 등장한다. 어경희는 “진우와 그로리아 관계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지배하는 남편과 순종하는 아내라는 가부장적 성역할에 의존”하는 점 등을 지적한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2013년 콘서트 장면. 민중가요 노래패였던 이들은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얻었다. 빨간소금 제공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2013년 콘서트 장면. 민중가요 노래패였던 이들은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얻었다. 빨간소금 제공

책은 민중가요와 대중음악의 관계도 분석한다. 김창남(성공회대 미디어콘텐츠융합자율학부 및 문화대학원 교수)은 “문화에 대한 우리의 사고가 기본적으로 ‘대중’과 ‘민중’, ‘지배’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인식 틀”에 갇혔다고 본다. 그는 “민중가요 역시 대중음악의 일부”라고 말한다.

김창남은 ‘지배 이데올로기 내면화’ 문제를 제기한다. “대중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대중음악에 담긴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게 되고, 결국 현재의 지배적 구조를 지지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논리대로 대중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이를 수용한다면, 우리가 역사의 주체로 상정하는 민중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한다.

케임브리지대 출판부가 펴낸 <케임브리지 대중음악의 이해>에 나온 대중음악의 ‘테크놀로지’, ‘산업’, ‘(대중의) 소비를 통한 정체성의 정치’ 세 가지를 근거로 글을 이어간다. 민중가요는 불법 복제돼 팔렸는데, “서구의 저서 어디에도 대중음악이 단지 합법적인 음반에 국한된 현상이라고 규정한 예는 없다”고 했다. “노래운동의 조직적 전개 속에서 민중가요는 (전자사운드 등 다양한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통해) 생산되고 유통되었다”고도 했다. 1979년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이후 “불법 카세트테이프는 1980년대 내내 민중가요의 생산과 소비에서 가장 중요한 미디어로 기능”했다. 김창남은 대학 서점 같은 운동권 네트워크를 통해 팔린 카세트테이프를 두고 “돈 버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면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정도 산업적 성격을 가졌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책은 ‘1980년대 한국의 역사와 기억’ ‘초국가주의’ ‘신노동 문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도 분석한다. 김재용, 루스 배럴클러프, 이남희, 이솔, 이진경, 이혜령, 천정환, 황경문 등 13명의 학자가 참여했다. 영어 원고는 박종우가 옮겼다.

1980년대 ‘에로 방화’는 오직 퇴행적?···‘친민중적 메시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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