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쏘가리매운탕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생선인데도 희한하게 ‘돼지고기 맛’

1933년 9월3일자 동아일보의 ‘지상병원’이란 코너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20세 남자이온데 년 전에 늑막염으로 고생하다가 나아섯는데 올부터 가삼이 답답하고 엽구리와 잔등이가 몹시 쑥쑥 결리고 압흡니다. 몸이 몹시 약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기가 실코 힘이 듬니다. 기침이 혹시 나오고 노란가래침이 나옴니다. 이와 같은 병에 쏘가리를 살머먹으면 좋다하오니 어떠한지요. 병명과 약방문을 가르켜주요.(개성의 고통생)” 이 질문에 대해 당시 경성부 진찰소 내과 박종영 박사의 대답은 이러하다. “늑막염의 재발이 안인가 생각됨니다. 일차 의사의 진찰을 받어 병명을 확실히 안 후에 치료방침을 정하십시오. 문의하신 쏘가리는 섭취하여도 무관할 것입니다.”

알다시피 늑막염은 대부분 결핵균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다. 다른 이름으로 흉막염이다. 식민지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영양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로 인해서 결핵이나 늑막염을 많이 앓았다. 당시에는 특별한 약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일종의 민간요법으로 쏘가리를 고아서 먹었다. 빙허각 이씨(1759~1824)는 <규합총서>에서 중국 원나라 때의 의서인 <양생기>에서 쏘가리를 먹으면 허약함을 도와주고 위에 좋다고 했다. 하지만 등마루뼈에 독이 있으니 모조리 제거하고 먹으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니 위의 ‘지상병원’ 처방에서 쏘가리를 먹어도 괜찮다고 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 남는다. 공적인 의료체계가 자리를 잡지 못했던 조선후기 이래 이러한 양생 관련 자료들이 민간에서는 병을 낫게 하는 처방으로 두루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규합총서>에서는 이 생선을 쏘가리라고 적지 않았다. 단지 한글로 ‘궐어’라고만 적었다. 궐어(魚厥 魚)는 쏘가리의 다른 이름이다. 빙허각 이씨를 형수로 두었던 서유구(1764~1845)는 한문으로 쓴 <임원경제지·전어지>에서 궐(魚厥)을 두고 ‘소갈이’라고 한글로 적어 두었다. 조선총독부 식산국 수산과의 기수(技手)로 있던 정문기(1898~1995)는 “남선(南鮮) 지방에서는 쏘가리라고 부른다. 언어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소’는 ‘쏘’의 진화된 어음이라 쏘가리라는 명칭이 몬저 생기엇으리라고 한다”(동아일보 1938년 7월29일자)고 했다. 하지만 문헌자료의 표기를 보면 오히려 조선후기에 소가리라고 부르다가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쏘가리가 되었다.

[주영하의 음식 100년](24) 쏘가리매운탕

서유구는 쏘가리 맛을 두고 “일명 수돈(水豚)인데, 그 맛이 돼지고기처럼 맛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크기나 두께는 물론이고 생선임에도 돼지고기 맛이 나기에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금린어(錦鱗魚)라고 부른다”고 했다. 서유구보다 거의 200년이나 앞서 살았던 허균(1569~1618)은 자신이 먹어본 음식을 열거한 글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금린어:산골에 있는 고을에 모두 있지만, 양근(楊根) 것이 가장 좋다. 처음에는 천자어(天子魚)라고 불렀다. 동규봉이 먹고는 맛이 좋아, 이름을 물었다. 역관이 얼떨결에 대답하기를 금린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좋다고 했다”고 적었다. 동규봉은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에 자주 사신으로 왔던 동월(1430~1502)을 가리킨다. 본래 조선 사람들은 쏘가리 맛이 너무 좋아서 그냥 ‘천자어’라고 불러왔다. 마침 명나라 사신이 그 이름을 묻자 감히 생선에 ‘천자’ 운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로 생겨난 이름이 바로 금린어이다. 그렇다고 금린어란 이름이 얼토당토않게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쏘가리는 비늘이 가늘고 황색을 띤다. 그러니 그 형상에서 역관이 매우 적절하게 이름을 붙인 셈이다. 그런데 허균은 금린어 다다음 항목에 별도로 궐어를 언급하였다. “궐어:서울 동서쪽에서 많이 나는데 백성들은 염만어(廉鰻魚)라고 부른다.” 왜 허균이 금린어와 궐어를 구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금린어는 황쏘가리이고 궐어는 일반 쏘가리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래서 지금의 양평인 양근에서 나는 것은 금린어, 한강에서 나는 것은 궐어로 본 듯하다.

조선시대의 매우 많은 문헌에 쏘가리 관련 기록이 보이지만, 그것의 조리법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식민지 시기 베스트셀러 <조선요리제법>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년판)에서 ‘쏘가리지짐이’라는 조리법이 나올 뿐이다. “쏘가리는 궐어라 하는 것인대 예부터 일으는 것이라 그런고로 ‘도화유수궐어비’(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쏘가리가 살졌도다)라 하얏나니 이것이 지짐이 중에 뎨일등이요 또 희귀하게 나는 것이라 지지는 법은 잉어지짐이법과 가티 만드나니라.” 이용기는 같은 책에서 ‘지짐이 만드는 법’을 언급하면서 잉어지짐이를 가장 먼저 소개했다. “비눌을 극지 말고 내장에 쓸개 빼고 씨서서 대가리 자르고 짜개여 굴게 트막치고 물에 고초장을 삼삼하게 간맞추워 풀고 살고기와 파를 만히 너코 끄려 용소숨하거든 토막친 것을 너코 물으로록 끄리다가 무를 네도지고 굴게 써러너코 한테 끄려 뼈가 무르도록 달린 후에 먹으면 지짐이 중에 제일 조코 술먹는 사람이 안주를 상등으로 하나니라.” 쏘가리지짐이 역시 주재료만 다를 뿐 이렇게 만든다고 했다.

돼지고기 맛이 나 일명 수돈(水豚)으로 불린 쏘가리.

돼지고기 맛이 나 일명 수돈(水豚)으로 불린 쏘가리.

이용기는 지짐이를 ‘전’이라고 적었다. 요사이 사람들은 기름에 지진 음식을 통틀어 지짐이라고 부르지만, 식민지 시기만 해도 지짐이는 국보다 국물을 적게 잡아 짭짤하게 끓인 음식을 가리켰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별도로 된장찌개·생선찌개·두부찌개와 같이 ‘찌개 만드는 법’에 대한 언급도 있다. 이용기는 “대체 국보다 지짐이가 맛이 죠코 지짐이보다 찌개가 맛이 죠흔 것은 적게 만들고 약념을 잘하는 까닭이라”고 했다. 국은 국물이 많은 데 비해 찌개는 뚝배기에 재료를 듬뿍 넣고 밥할 때 찐 다음에 다시 모닥불에 끓여서 ‘밧트러지게’ 끓인 것이다. 이에 비해 뼈가 문드러질 때까지 곤 음식을 지짐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잉어지짐이의 다른 이름으로 ‘발갱이지짐이’를 적어두었다. 발갱이는 음식의 색이 빨간 데서 나온 이름이다. 바로 고추장으로 간을 맞춘 결과다. 그러니 쏘가리지짐이 역시 발갱이지짐이의 일종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하지만 식민지 시기의 신문·잡지에서 발갱이지짐이의 다른 말로 매운탕이라고 적은 자료는 아직까지 없다. 매운탕이란 음식이름은 1951년이 되어야 신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1951년 12월1일 전시 하에서 보건당국은 ‘고급요정 폐지 및 무허가 음식점 관리’를 공포하면서 관리대상 요리 중에 신선로와 함께 매운탕을 언급하였다. 그 값도 신선로와 마찬가지로 1만1000환이었다. 매운탕의 주재료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비싼 음식이었음에 틀림없다. 오늘날 매운탕이라고 하면 바다생선이나 민물생선을 가리지 않고 내장과 비늘만 긁어내고 머리·꼬리는 그대로 둔 채 끓이는 음식을 가리킨다. 1976년 10월22일자 경향신문에 소개된 쏘가리매운탕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푼 국물에 쏘가리를 넣고 뼈가 무를 때까지 끓인다. 거의 익었을 때 준비된 풋고추, 파 등을 넣고 다시 10분쯤 끓인다. 다 되었을 때 갖은 양념을 넣고 남비에 담아낸다.” 이렇듯 쏘가리매운탕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야 대단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사실 쏘가리는 한반도의 남해와 서해로 빠지는 민물에 자라는 육식성 생선이다. 그렇다고 예로부터 전국에서 지금처럼 쏘가리매운탕을 쉽게 먹을 수는 없었다. 식민지시기 조선총독부 직속기관이었던 부산의 수산시험장에서 조선의 어류를 조사했던 우치다 게이타로(1896~1982)는 1931년 6월에 평안남도 남동 쪽에 위치한 성천의 비류강에서 쏘가리의 생활사 조사를 하였다. 그 때 “성천에 맹인으로서 쏘가리 잡는 유명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이 맹인은 혼자서 강가를 수 리나 걸어 다니면서 쏘가리가 사는 장소를 잘 알아내, 잠수하여 고기를 잡아온다고 한다. 평소의 생활은 국수가게의 심부름을 하고 있지만, 따뜻한 계절에는 쏘가리 잡이로 상당한 수입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 맹인은 맨손으로 모래무지까지 헤엄쳐서 큰 쏘가리의 아가미를 잡고 나타나기도 했다. 우치다 게이타로는 그 후 3년 동안 이 맹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본인 조수와 함께 성천의 일본인 여관에서 쏘가리의 인공부화를 실험했다.

비록 실험은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곧장 대규모의 치어 생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단지 개인이 경영하는 어장에서 사양(飼養)되는 정도였다.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한 인공부화는 1995년에야 비로소 성공하였다. 이미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압록강의 수풍댐, 한강의 팔당댐 따위로 인해 쏘가리 서식지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릴낚시가 유행을 하면서 쏘가리는 그 전보다 훨씬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더욱이 1960년대 말부터 온 나라가 건설 현장이 되면서 폭약 TNT가 민간에도 나돌자 아예 이것을 강바닥에 던져 쏘가리를 잡기도 했다. 결국 1967년 5월12일 문화재위원회에서는 한강 일대에 서식하는 황쏘가리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이러한 지정은 허균이 언급했던 양근 일대의 금린어가 멸종 위기에 봉착했음을 의미한다.

[주영하의 음식 100년](24) 쏘가리매운탕

식민지 시기부터 조선총독부는 수출용과 촌민들의 불량한 영양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쏘가리를 비롯하여 잉어·은어·뱀장어 따위의 민물생선을 사양하도록 권장하였다. 조선총독부나 대한민국 정부에서나 쏘가리의 산란기인 5월 중순에서 6월 상순을 금어기로 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에 소양댐이 완공되면서 춘천의 호반 근처에는 매운탕 전문점이 장사진을 쳤다. 수요가 있는 만큼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잡았고, 정부에서는 치어를 전국의 강에 뿌렸다. 그 결과 남해와 서해로 흘러가는 전국의 강은 물론이고 저수지 근처에서도 여름철이 되면 쏘가리를 매운탕으로 끓여 파는 식당이 자리를 잡았다. 1970년대 건설 붐과 1980년대 전국적인 음식 유행이 만들어낸 결과다. 결국 이용기가 지짐이 중에서 제일 맛 좋다고 했던 쏘가리지짐이의 주재료는 오늘날 치어로 대량 양식되어 다시 강에 뿌려진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심지어 멀리 중국의 양식장에서 자라 그 출신지를 바꾸기도 한다. 강을 단지 개발의 대상으로 보고, 민물생선을 오로지 배 채우는 먹을거리로만 여긴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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