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청어과메기-껍질 벗긴 쫀득한 속살의 유혹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홍길동의 저자 허균(1569~1618)은 조선 최초의 미식서인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썼다. 이 책에서 “네 종류가 있다. 북도에서 나는 것은 크고 배가 희다. 경상도에서 나는 것은 껍질이 검고 배가 붉다. 호남의 것은 조금 작다. 해주에서는 2월에 잡히는 것이 맛이 매우 좋다. 옛날에는 매우 흔했으나 고려 말에 쌀 한 되에 오직 40마리밖에 주지 않았으므로, 이색이 시를 지어 이를 한탄하였다. 난리가 나고 나라가 황폐해져서 모든 물건이 부족하기 때문에 귀해졌다고 했다. 명종 이전만 해도 쌀 한 말에 50마리였는데, 지금은 전혀 잡히지 않으니 정말로 괴이하다”고 했다. 바로 청어(靑魚)를 두고 자신의 미식경험을 쓴 내용이다. 알다시피 청어는 냉수성 어종으로 수온이 2~10도인 저층 냉수대에서 주로 산다. 그래서 바닷물의 온도가 바뀌면 그 많던 청어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아마도 허균은 그러한 청어의 생태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모양이다.

식민지 시기에 조선총독부 식산국 수산과에서 근무했던 정문기(1898~1995)는 1939년 5월9일자 동아일보에서 “청어는 조선고래로 일반 보건식품으로 중요시하여온 어족이다. 생선 그대로 요리에 공(供)하는 외에 간청어(鹽靑魚)를 만드러 도시는 물론이오 산간농촌에까지 널리 소비시켰던 것이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1900년대 들어와서 가능했다. 비교적 깊은 바다에 사는 청어는 떼로 몰려다니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다 보니 튼튼한 그물을 만들어 깊은 바다의 길목에 두어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동해안으로 몰려온 일본인 어부들이 앞다투어 청어 잡이에 나섰고, 그로부터 점차 동해, 그중에서도 지금의 포항 영일만 일대가 늦겨울만 되면 청어 대어(大魚)로 장사진을 쳤다. 정문기는 같은 글에서 “경성인사들의 말을 드르면 거금 약 30여년 전에 잇어서는 서해청어를 다식하엿다고 한다. 그리고 서해청어는 동해청어에 비하야 특별히 장대하엿으며 미미(美味)하엿다고 한다”고 밝혔다.

허균이 가장 맛이 좋다고 했던 해주청어가 바로 서해청어이다. 19세기 이전만 해도 서울 사람들에게 청어는 바로 해주청어가 으뜸이었다. 지금의 서울 옥수동 근처에 살았던 빙허각 이씨(1759~1824)는 <규합총서>에서 ‘텽어젓’ 조리법을 다음과 같이 적어 두었다. “청어를 발 위에 펴 놓고 소금을 뿌리고 청어 놓기를 켜켜하고 돗자리를 덮어 밤을 재우면 어즙이 다 발 아래로 빠질 것이니 즉시 독 가운데 청어와 소금을 켜켜 넣어 담그면 해가 묵어도 다 머리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좋으니라.” 1921년판 방신영(1890~1977)의 <조선요리제법>에서도 <규합총서>와 거의 똑같은 청어젓 조리법이 나온다. 다만 “정이월에 담그는 것이라”고 하면서 “맛은 좋으나 매미 소리 나면 못먹게 하나니라”고 별도로 적어두었다.

[주영하의 음식 100년](25) 청어과메기-껍질 벗긴 쫀득한 속살의 유혹

이에 비해 이용기는 1924년판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 다른 견해를 내세웠다. 청어를 서울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인 ‘비웃’이라고 하면서, “자반을 큰 걸로 어더서 비눌 글고 대가리 따고 이리(수컷의 뱃속에 들어 있는 흰 정액 덩어리) 빼고 소곰을 케케 뿌려 담그면 젓국이 제절로 노랏케 나오나니 이것도 돌을 만히 눌너 두어야 하나니라. 여름 삼복 때에 다른 젓을 별양 아니 먹으나 이 비웃젓은 작작 찌저 토막처 노코 조흔 초에 고초가루를 뿌려 먹으면 맛이 제일등 가나니 여러 해는 못 묵히나니라”고 했다. 더욱이 방신영의 생각과 달리 “매암이 소래를 드르면 문듯 상한 듯하나 성한 것으로 소곰에 약간 버물릴제 언덕이나 바윗 밋헤 말은 나무를 펴고 그 위에 비웃을 재여싸코 무엇이든지 눌러서 비린집이 다 빠진 뒤에 다시 소곰을 뿌려가며 담그면 수년을 두어도 샹치 안나니라”고 했다. 이용기의 표현대로라면 빙허각 이씨와 방신영이 언급한 청어젓은 청어자반에 해당된다. 그가 언급한 것이 바로 젓갈인 셈이다.

그런데 이용기는 비웃젓뿐만 아니라, 비웃구이·비웃백숙·비웃전유어·비웃자반·관목과 같은 음식의 조리법도 소개했다. 그중에서 비웃구이 조리법을 보자. “비웃을 구구대 알백이로 성한 것을 비눌 글고 써서서 대가리와 꽁지 따고 왼통으로 채반에 너러노아 물끠가 다 빠저 안팟이 부득부득하거든 고명너은 진장을 바르고 굽되 몸에 살이 상치 안토록 잘 구어서 다시 남비에 기름을 약간 두루고 뒤처가며 지저서 그냥 노코 소곰에 찍어가며 먹으면 알과 이리가 맛이 등에 가나니 괄한(센) 불에는 굽지 말지니라.” 비웃젓과 달리 비웃구이에서 성한 청어를 쓴다고 적었다. 비웃백숙이나 비웃전유어도 마찬가지다. 한참 잡히는 겨울에야 육지로 이동해도 청어는 쉽게 상하지 않는다. 그래도 오래 두고 먹으려면 이른바 청어젓, 곧 자반을 만들어야 했다.

기름이 많은 청어는 고기만큼 사람들의 입맛을 자극했다. 특히 청어구이는 그것이 성한 것이든지 자반이든지 밥상의 향기를 농후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1910년대 이후 동해의 청어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그 전에 비해 청어 먹기가 수월해졌다. 1920년대가 되면 가난한 사람도 늦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으면 청어 한 두름을 사서 구워 먹었다. “한 사람이 잇는데 생활은 썩 넉넉지 못헌터이라 겨울에 짐장독이나 한 건만 파먹다가 하로는 생선 생각이 나서 청어 일급(一級)을 사서 그 안해를 주고 구어 먹자 하엿더니 그 아참밥에 일미(一尾)를 구어노앗거늘 맛잇게 먹엇고 그 익일 아참에 또한 한 머리를 구어 노앗거늘 먹으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오래 두고 먹으랴고 하는 가보다’ 그러나 일변(一邊)으로는 더도 먹고 십푸나 일변으로는 날마다 먹을 터이리라 하고 그만 두엇더니 그 익일에는 아침에도 업고 저녁밥상을 밧고 보아도 업다. 이것 엇지된 일인가 하고 그 안해를 불너 ‘오늘은 청어를 굽지 아니하오’ 그 안해가 깜작 놀나며 대답하는 말이 ‘요 소갈머리야 그적게 아침에 임자 한 머리 나 아홉머리지 억적게 아침에 임자 한 머리 나 아홉머리지 그러면 고만 아니요. 웃지해서 사나히 셈속이 그럿케 어둡소.’”(동아일보 1921년 6월30일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의 포항시 연일읍은 1910년대 말부터 청어의 주산지로 자리를 잡았다. 마침 동해청어가 산란 장소로 영일만을 선택했고, 여기에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인 어부들이 개입한 덕택이었다. 정문기는 앞의 기사에서 “청어 다산지인 경상북도에서는 소건(素乾)한 청어를 ‘과미기’라고 칭하야 지방특산으로 진중시(珍重視)하는 수산물이다. 경상북도 연일·대구 등 지방에서는 이 ‘과미기’를 짚불에다 구어가지고 어피(魚皮)를 벳기여 바리면 별미를 가진 선적색 어육이 나오는데 이 ‘과미기’ 요리 중에는 ‘과미기쑥국’이 제일 미미(美味) 하다고 말한다”고 했다. 요사이 말하는 과메기가 바로 ‘과미기’이다. 과메기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대체로 관목(貫目)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규합총서>에서도 “청어 마른 것을 그 속이 다 관목이라 하되 가칭이오 진짓 관목은 청어를 들고 비추어 보면 두 둔이 서로 통하야 벌거케 마주 비추는 것을 말리어 쓰면 맛이 이상하니 청어 한 동(2000마리)에 관목 하나 엇기 어려오니라”고 했다. 그런데 빙허각 이씨는 청어 중에서도 맛이 특별히 좋은 것을 관목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말린 것을 모두 관목이라고 잘못 부른다고 일침을 놓았다. 이용기 역시 세상 사람들처럼 관목을 ‘건청어(乾靑魚)’라고 하면서, “성한 비웃을 말려 먹는대 껍질을 벗기고 토막쳐서 초고초장에 찍어 먹으면 술안주에 비릴 듯하나 맛은 뎨일 조코 멧나물지짐이에 너으면 맛이 매우 조흐니라”고 했다. 하지만 과연 관목이란 한자어가 포항에서 ‘과미기’로 변이되었는지는 언어학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1918년 11월1일부터 영업을 시작한 포항역은 청어를 보다 수월하게 전국 각지로 보내는 데 이용되었다. 이로부터 매년 1~2월이면 역 광장에 청어가 산처럼 쌓여서 이동을 기다렸다. 1924년 1월 초부터 2월 말까지 잡힌 청어는 대어는 아니었지만 약 5000만마리에 이르렀다. “150만미(尾)는 생어(生魚)대로 일본에 이출하고 60만미는 타말님(거두절미하야 말닌 것) 원료로 소화되고 약 800만미는 기차로 조선내 각지에 발송되고 차외(此外)는 발동기선급 기선에 의하야 해로로 부산 기타 조선내 각지에 공급되얏다. 또 포항의 경북도립수산시험장에서 최초의 시험으로 금회 타말님 청어급 훈제청어를 제조한 바 호성적을 재(齎)하야 평판이 파(頗)히 양호한 모양이더라.”(동아일보 1924년 3월23일자)

훈제청어는 서유럽 사람들이 즐겨먹는 청어 조리법이었다.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훈제청어법이 개발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타말님’은 어떤 방법으로 만드는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만약 이것이 한국어라면 태워 말렸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청어는 항구에 들어오면 생어로 유통시킬 것과 염장용, 말림용 그리고 훈제용으로 재가공할 것 등으로 나누어졌다. 일본으로 보내지는 생어는 얼음을 가득 채운 냉장선에 실려 갔다. 사실 영일만에서 청어가 대량으로 잡힌 1910년대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가장 많은 돈을 번 사람은 일본인 기업가였다. 이에 비해 조선인 선주들은 열악한 배와 그물로 인해서 그다지 큰돈을 벌지 못했다. 심지어 전국에서 몰려든 노동자들은 죽도록 일을 하고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다. 특히 1931년에 포항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그 사정은 너무나 극단적이었다. 청어에서 생겨나는 떼돈을 보고 온 노동자들은 결코 그 영광을 만끽할 수 없었다.

주영하<br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격년으로 청어 대어가 되어도 큰 수익이 나지 않자, 급기야 1933년 봄에 포항의 수산당국에서는 기왕에 일본 한신(阪神) 지역으로 보내서 인기를 모았던 미가키니신을 적극적으로 제조하도록 장려하였다. 미가키니신은 청어의 내장과 머리를 제거하고 등뼈 양쪽의 살만 떼어서 말린 것을 가리킨다. 1890년대에 홋카이도에서 청어가 많이 잡히면서 생겨난 건조법이다. 특히 서일본에서는 이것을 다시마에 돌돌 말아서 먹는다.

1960년대 초반 이후 해류의 변화로 인해서 영일만에는 청어가 사라졌고, 그 자리를 꽁치가 대신했다. 1990년대 이후 포항의 꽁치과메기가 전국적인 유행음식이 되었다. 기왕의 관목 먹는 방식에 서일본의 미가키니신 먹는 방식이 보태진 듯하다. 비록 청어라는 생선은 한반도의 바다에서 오래되었지만, 그 어로방식이나 가공방식, 심지어 먹는 방식은 식민지 시기를 관통하면서 제국을 너무나 많이 닮아버렸다. 하기야 과메기만 그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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