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기 투쟁 사업장 ‘콜트·콜텍’ 다룬 ‘재춘언니’…투쟁사보다는 인간에 대한 기록

고희진 기자

<재춘언니>는 4464일로 국내 최장기 노사 분규 사업장으로 기록된 기타 제조사 콜트·콜텍의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투쟁사를 담았나 싶지만, 사실 평생 노동자이고 싶었으나 거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에 대한 기록으로 읽힌다. 31일 개봉하는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이수정 감독(59)과 주인공 임재춘씨(60)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콜트·콜텍의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재춘언니>의 한 장면. 시네마 달 제공

콜트·콜텍의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재춘언니>의 한 장면. 시네마 달 제공

콜트·콜텍은 한때 세계 점유율 1위를 차지할 만큼 유명한 기타 브랜드였으나 2007년 경영상 이유로 노동자 정리해고를 했다. 이후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은 노사 합의가 이뤄진 2019년 4월까지 13년 가까이 계속됐다. 이수정 감독은 2012년 7월 임재춘씨를 비롯한 노동자들을 처음 만났다. 미술 작가들이 노동자들과 연대해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다큐를 만들겠다는 확고한 계획은 없었지만, 일단 카메라를 챙겼다고 했다. 그렇게 노동자들 곁에서 투쟁이 끝나는 2019년 4월까지 8년을 함께 보냈다.

영화에는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을 원작으로 한 다큐 연극 <구일만 햄릿>에서 오필리아 역을 맡은 임씨가 무대에서 대사를 외우는 모습, 혹은 사람들과 책을 읽고 다른 연극을 연습하는 모습이 주로 담겼다. 스스로를 “낯을 가리고 소심했다”고 말하는 임씨의 모습이 농성 과정을 통해 달라진 것이 엿보인다.

이 감독은 “콜트·콜텍은 다른 노동 현장과 달리 문화예술인들과의 연대가 많이 이뤄진 곳”이라며 “예술이라는 것은 결국 존재의 변화라고 생각했고, 투쟁 현장에서 그런 변화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보여준 이가 임재춘씨라 생각해 그를 주인공으로 했다”고 말했다. 임씨의 이름에 ‘언니’를 붙여 제목으로 삼은 것은 거대 담론이나 전형적인 노동운동의 이야기가 아닌 평등한 시위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여성의 언어를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년의 남성이 오필리아라는 젊은 여성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모습이 언뜻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을 가진 연극 속 오필리아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한 여성과 임씨의 문답이 이어진다. ‘아저씨 딸 이름이 뭐였더라?’ ‘애란이, 초란이.’ ‘어때요? 집에가서 보시면?’ ‘애틋하지, 우리 딸들이 내 심정, 오필리아 같은 마음이 아닐까.’ ‘맞아요, (딸들이) 아저씨 상황을 다 이해할 수 없을 거 아니야.’

보통의 노동자였던 임씨가 투쟁을 위해 길거리에 나섰을 때, 딸들은 아버지의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임씨의 투쟁에서 가족은 아픈 부분이었다. 영화는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장편 다큐멘터리를 대상으로 하는 비프메세나상을 받는 등 각종 영화제에서 이미 상영됐으나, 두 딸은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얘기는 했는데, 아직 안 봤어요. (투쟁할 때) 아이들은 학생이었고, 내가 하도 고생한 걸 아니까. 볼지 안 볼지 모르겠네요.”

콜트·콜텍의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 영화 <재춘언니>의 한 장면. 시네마 달 제공

콜트·콜텍의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 영화 <재춘언니>의 한 장면. 시네마 달 제공

콜트·콜텍의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 영화 <재춘언니>의 한 장면. 시네마 달 제공

콜트·콜텍의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 영화 <재춘언니>의 한 장면. 시네마 달 제공

길어지는 투쟁에 노동자의 일상이 농성장과 함께 흘러가는 모습이 다큐에 담겼다. 임씨와 동료들은 농성장에서 함께 밥을 먹고 기타를 치고 등목을 한다. 평범해 보이는 날들이지만, 이 광경들 사이사이 길거리와 법원, 회사 앞에서 시위를 하는 이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거리의 소음 속에서 노동자들의 시위는 별일 아닌 것처럼 묻혀가는 듯 보인다.

다큐를 통해 지난 투쟁을 돌아봤다는 임씨는 “사실 노동자들이 집회 하면 사람들이 그러지 않나. ‘저 사람들 또 도로 막네.’ 욕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도 우리 투쟁은 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한 평화로운 투쟁, 투쟁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줬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이어 “기타는 내 인생이었지만, 투쟁은 나를 사회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했다.

미리 끝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은 아니었으나 어느 순간엔 감독도 결말을 고민했다. 이 감독은 “만약 투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있었을 것”이라면서도 “끝나지 않는 상황 자체를 담은 영화를 하나 만들었을 것 같다. 투쟁 타결이 되고 드라마가 완성되면 영화적으로는 더 재밌을 수도 있겠지만, 노동자들의 시간은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임씨의 뒷모습처럼 여전히 끝없이 열려있는 시간들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영화는 상당 부분 흑백을 유지한다. 이 감독은 흑백 설정에 대해 “흑백이 주는 느낌이 13년의 투쟁 기간을 유예된 시간처럼 표현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컬러로 전환되는 부분은 투쟁을 끝낸 임씨가 집이 있는 대전으로 내려가 공사 현장의 인부로 일하는 모습을 담을 때뿐이다. 그제서야 임씨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있다는 표현으로 보인다.

이 감독은 2012년 <깔깔깔 희망버스> 이후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고민하는 다큐를 여럿 작업했다.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어려운 작품을 계속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대학시절 영화서클을 하고, 영화운동 1세대라고 할만한 활동도 했다. 이후 상업 영화 쪽에서 잠깐 일했지만, 언제나 갈증이 있었다”며 “2011년 희망버스를 타면서 내 영화 인생에도 변곡점이 생겼다. 그 이후 거리에서 투쟁하는 이들의 삶을 계속 담아왔다. 프로라기보다는 영화를 작업하는 것이 내 삶의 한 부분이라 생각하고 아마추어 정신으로 계속 작업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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