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경 작가 “충무로에 작가 실종···남성 배우만 나오는 블록버스터 낳아”

오경민 기자
지난 3일 한국영화감독조합에서 주최한 ‘벡델데이 2022’ 행사 중 ‘벡델리안과의 만남’에서 정서경 작가가 발언하고 있다. 한국영화감독조합 유튜브 갈무리.

지난 3일 한국영화감독조합에서 주최한 ‘벡델데이 2022’ 행사 중 ‘벡델리안과의 만남’에서 정서경 작가가 발언하고 있다. 한국영화감독조합 유튜브 갈무리.

“영화계에 시나리오를 쓰고 데뷔한 작가들, 여러분들이 작가로서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드라마를 쓰고 있다. 충무로에 작가가 없어졌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말씀 드리겠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여름, 추석을 맞아 개봉하고 있다. 이 영화의 극본을 쓴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감독이다. 이 영화들이 어딘가 비슷하다고 느끼실 거다. 제1역할, 제2역할, 제3역할, 제4역할까지 남자 배우다. 5번째, 6번째에서야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여성 배우들이 제가 보기에 민망한 장면을 연기하러 나온다.”

영화 <헤어질 결심> <아가씨> <친절한 금자씨> 등을 쓴 정서경 작가가 지난 3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열린 2022 벡델데이 행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정 작가는 드라마와 달리 전문적인 양성 과정이 없고,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상황 속에 연대가 어렵고, 저작물에 대한 권리가 없는 영화 작가들의 현실을 언급하며 ‘작가의 실종’이 결과적으로 영화의 다양성을 해친다고 지적했다.

정 작가는 “감독과 제작자에게 악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 감독이 여자 캐릭터를 쓰고 연출하는 게 너무나 힘들다는 걸 안다. 감독에게 지지 않고 캐릭터를 이렇게 끌고 나가겠다는 의지와 재능을 보이는 여성 작가가 있었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영화에서 (적극적으로) 성평등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 감독 (산업적인)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호의와 선의를 가진 영화 제작자들이라도 ‘이런 기획이 있는데 시나리오를 써주시겠냐’ ‘이런 감독과 일하고 있는데 시나리오를 써주겠냐’고 묻는다. 반면 드라마 제작자들은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냐’고 묻는다”며 “작가, 감독, 제작자 모두로부터 새로운 게 나와야한다. 작가에게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냐고 묻지 않는 영화 풍토에서 새로운 영화, 다른 관점의 영화가 나오기 힘들다”고 했다.

‘여성 재현에 있어서 영화보다 드라마가 한발 앞서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 작가는 “드라마를 만들 때, 더 좋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만드는 게 아니다. 여성 시청자가 봐주면 망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 시청자를 늘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여성 시청자를 생각하면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게 돼 있다. 영화 관객을 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아마 40대 남성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작가는 남성은 남성 이야기를, 여성은 여성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익숙한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저는 (여성 이야기에) 이유 없이 주목한다. 제가 살아온 삶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가장 편한 관점”이라며 “캐릭터를 쓸 때 박찬욱 감독님은 주로 여성을 더 멋지게 그리고 싶어하시고, 저는 존경하고 좋아할 수 있는 이상적인 남성을 원한다. 반면 저는 여성 캐릭터의 부족함, 결함을 드러내려고 하고 감독님은 남성의 찌질함 등을 드러내려고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미디어에서 재현된 여성 캐릭터들을 보면 남성이 사랑할 수 있는 이상적인 여성상인 경우가 많다. 여성들은 안다. 우리 자신은 아름답고 착하고 경이롭고 선량한 존재가 아니다. 저는 여성으로서 여성 캐릭터를 그릴 때, 결함과 부족함이 드러나 있는 상태로 사랑받기를 바란다.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캐릭터가 성장할 수 있다. 올바른 선택, 완전한 선택을 하는 캐릭터의 이야기는 시작할 여지가 없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벡델리안은 박찬욱 감독님인 것 같다. 저와 함께 일하는 이유도 여성적인 관점을 채우기 위해서였다고 말씀하셨고, 일하는 과정에서도 느낀다. 타자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제가 감독이라면 다른 사람의 시나리오와 관점을 그렇게까지 넓게 수용할 자신이 없다”며 “제가 박 감독님과의 작품을 가장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박 감독님 만큼 저를 작가로서 존중해 주는 감독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 작가는 <친절한 금자씨>를 시작으로 박 감독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등 다섯 편의 영화를 함께 작업했다. 드라마는 2018년 <마더>에 이어 지난 3일 tvN에서 첫 방영된 <작은 아씨들>을 집필했다.

한국영화감독조합은 ‘벡델데이 2022’에서 올해의 벡델리안 작가 부문에 정 작가와 박 감독을 선정했다. 앞서 성평등 관점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보인 10편의 영화 ‘벡델 초이스10’를 선정했고, 이에 참여한 영화인 중 감독, 작가, 배우, 제작자 부문으로 나눠 올해의 벡델리안을 뽑았다.

지난 3일 벡델데이 2022의 ‘벡델리안과의 만남’에 참여한 민규동 감독, 신수원 감독, 정서경 작가, 신혜연 제작자, 봉태규 배우(왼쪽부터). 한국영화감독조합 사무국 제공.

지난 3일 벡델데이 2022의 ‘벡델리안과의 만남’에 참여한 민규동 감독, 신수원 감독, 정서경 작가, 신혜연 제작자, 봉태규 배우(왼쪽부터). 한국영화감독조합 사무국 제공.

벡델데이 2022 유튜브 영상. 신수원 감독, 정서경 감독, 신혜연 제작자가 나오는 ‘벡델리안과의 만남’은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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