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홀로 노래하는 이의 슬픔…깊은 저음·긴 울림, 시대를 넘다

문학수 선임기자

르네상스의 악기 ‘류트’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1571 ~ 1610)의 ‘The Lute Player’. 1596년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1571 ~ 1610)의 ‘The Lute Player’. 1596년작으로 알려져 있다.

‘류트’의 조상은 아랍에서 건너온 ‘우드’

구글에서 ‘Lute Player’를 검색해보면 수많은 이미지들이 주르륵 올라온다. 한데 특이하다. 류트 연주자를 묘사한 대개의 회화 작품들이 르네상스 시대의 것들이다. 시기적으로 조금 늦더라도 르네상스 직후인 바로크 초기에 해당하는 것들이 많다. 이는 그 이전 시대의 회화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장면이다. 그래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왜 르네상스 화가들은 류트 연주자를 이토록 많이 그렸던 것일까.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당대의 사람들이 그 어떤 악기보다 류트를 사랑했던 까닭이다.

이 유서 깊은 현악기의 재료는 예나 지금이나 나무다. 주로 전나무로 뒷배가 불룩한 공명판(body)과 긴 목(neck)을 만들었다. 목에는 상아를 덧대 강도를 높였다. 많은 회화 작품들에서도 보이듯이 목의 끝부분은 직각으로 꺾여 있다. 양의 창자로 만든 현(弦)을 목의 끝부분에 걸고 그것을 공명판의 하단에 연결했으며, 꺾인 목에 부착된 줄감개로 음의 높낮이를 조절했다. 팽팽하게 조이면 음이 높아지고 풀면 낮아진다. 얼핏 기타(guitar)와 흡사하지만 몸체가 볼록한 배 형태를 띠고 있고 목이 직각으로 꺾여 있는 외형이 기타와 다르다. 측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반달처럼 생긴 이 악기의 고향은 아랍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를 종합하면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사용했던 현악기 바르바트(barbat)가 조상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바르바트는 중국의 비파와도 매우 닮아서 당대에 두 지역의 문화적 교류가 매우 활발했음을 엿보게 한다.

이 악기들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모든 악기의 이면에는 장구한 세월에 걸친 발명과 개량의 역사가 존재한다. 바르바트도 마찬가지였다. 멀리로는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부조에 등장하는 악기에서 그 유래를 찾는 경우도 있으니, 류트의 선행(先行) 역사는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유구하다고 할 수 있다. 유럽으로 전해진 것은 중세 초기였으며 애초의 이름은 ‘알우드’(al’ud)였다. 처음에는 스페인 지역에서 유행하다가 14세기 무렵에는 유럽 어디에서나 이 악기를 연주했다. 이름도 ‘류트’(lute)로 바뀌고 알우드(지금은 그냥 ‘우드’라고 부름)에 비해 목이 점점 더 길어졌다. 연주법도 변했다. 중세에는 새의 깃털뼈로 만든 플렉트럼(plectrum, 기타의 ‘피크’, 거문고의 ‘술대’도 일종의 플렉트럼)으로 현을 뜯어 연주했으나 15세기부터 손가락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음악적으로 큰 변화가 생겼다. 2개 이상의 현을 동시에 뜯거나 퉁기면서 화성을 구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류트를 손가락으로 연주하기 시작한 시기에 유럽에서는 다성음악(多聲音樂, polyphony)이 한창이었다.

16세기의 작곡가들은 류트를 위한 음악을 악보로 출판했다. 그만큼 이 악기가 보편화했음을 방증한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의 작곡가 빈첸초 카피롤라(1474~1548)의 작품집은 당대의 류트 음악을 증거하는 자료로 손꼽힌다. 물론 류트의 개량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주로 저음부를 보강하는 방향으로 이뤄졌다. 그러다가 16세기 말에 등장한 ‘테오르보’(theorbo)는 과거의 류트가 지녔던 저음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었다. 인터넷에서 ‘테오르보’를 검색하면 기존의 류트에 비해 목(neck)이 2배쯤 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목이 길어지면 당연히 현(string)도 길어진다. 현이 길어지면 음은 낮아진다. 그래서 테오르보는 앞 시대의 류트가 표현할 수 없었던 깊은 울림의 저음을 만들어냈다. 중세와 르네상스 음악을 주로 연주하는 ‘무지카 템푸스’(Musica Tempus)의 윤현종 감독에게 물으니, “16세기 말에 이탈리아에서 오페라가 탄생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반주 악기가 류트”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류트가 지닌 저음의 한계 때문에 목이 길고 현이 14개인 테오르보가 출현했다”는 얘기다.

세상은 넓고 악기는 많다. 물론 모든 악기들은 처음부터 완벽한 형태로 ‘발명’되지 않는다. 세월의 풍화를 겪으면서 어떤 악기들은 사라지고 또 어떤 악기들은 점점 발전해 ‘음악사’라는 무대에서 주요 배역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무대의 중앙에 오른 악기는 이후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고 더욱 보편화하면서 ‘명곡의 탄생’을 이끈다. 한데 여기서 잠깐 돌이켜보자. 류트의 조상이었던 아랍과 이슬람의 ‘우드’는 어떻게 됐을까. 이 고색창연한 현악기는 다행히도 현존한다. 주로 이집트와 이라크, 터키, 시리아 등지의 전통음악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우드는 목에 프렛(fret)이 없어서 일반인들은 음정을 맞추기가 좀 어렵지만, 우드의 명인들은 수많은 연습과 훈련으로 깨끗하고 정확한 음정을 만들어낸다. 눈부시게 화려한 테크닉으로 듣는 이의 귀를 완전히 사로잡기도 한다. 지금 당장 유튜브를 검색해 팔레스타인 출신의 형제들로 이뤄진 ‘트리오 주브란’(Trio Joubran)의 연주를 감상해보길 권한다. 세 대의 우드로 펼쳐내는 앙상블이 현란하기 그지없다.

르네상스, ‘인간다움’을 갈망하다

요절한 천재 마사초(1401~1428)의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1426~1427년작으로 알려져 있다. 알몸으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의 표정과 그림자를 통해, 비록 고통스럽지만 ‘인간의 시대’가 왔음을 알린다.

요절한 천재 마사초(1401~1428)의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1426~1427년작으로 알려져 있다. 알몸으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의 표정과 그림자를 통해, 비록 고통스럽지만 ‘인간의 시대’가 왔음을 알린다.

왜 르네상스의 사람들은 류트를 사랑했던 것일까. 그 맥락을 살피려면 ‘르네상스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떠올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르네상스를 ‘문예부흥’이라 배웠다. 그리스·로마의 학문적, 예술적 전통을 되살렸다는 의미에서다. 한데 이 네 글자로는 르네상스의 실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는다. 르네상스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무엇을 꿈꿨으며, 일상적 삶에서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지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더 들어가본다.

알려져 있다시피 ‘르네상스’라는 말은 화가이자 비평가였던 조르조 바사리(1511~1574)에게서 비롯했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던 그는 “가장 존귀하신 피렌체 공, 코시모 데 메디치 각하의 손에 공손하게 키스”하면서 바쳤던 자신의 책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올재 클래식스, 이근배 옮김, 원제는 ‘뛰어난 건축가, 화가, 그리고 조각가들의 삶’)의 서설(序說)에서 ‘리나시타’(Rinascita, 재생·부활)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이것이 프랑스어와 영어로 옮겨지면서 ‘르네상스’라는 용어로 안착했다.

15~16세기에 활약했던 예술가 200여명의 생애와 작품을 기록하고 있는 이 방대한 저술에서 바사리가 일관하게 지녔던 시선은 무엇일까. 르네상스를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가 이 책을 쓰면서 지녔던 마음을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대의 미술사(예술사)를 거대담론으로 서술하지 않고 예술가 한 명 한 명의 개인적 삶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바사리는 전체와 집단이 아니라 ‘개인’에 집중했다. 이 지점은 중요하다. 바사리를 비롯한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사고방식은 과거와 달랐다. 그 이전의 시대, 다시 말해 중세의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예술가’로 자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이름 없는 석공이거나 환쟁이, 혹은 풍각쟁이였다. 하지만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달랐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서서히 싹텄으며 드디어 자신의 작품에 이름(서명)을 남기기 시작했다. 바사리가 주목했던 시대정신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의 해설에서 최병진 교수(한국외국어대 이탈리아어과)도 “자의식의 탄생”이라는 문구를 강조한다.

물론 이 시기에도 지배적 세계관은 여전히 교회였으며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전처럼 강력하진 않았지만 종교적 권위는 여전히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 작동했다. 하지만 굳건한 성채에는 균열이 가고 있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표현하자면, 이제 ‘신’에 대한 복종과 그의 가호보다는 ‘살아있는 나’의 실존이 소중해졌다. 내세와 천국이 아니라 현세의 삶이 더 중요해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앞 시대와 선명히 구분되는 명작들이 탄생한다. 요절한 천재 마사초(1401~1428)는 ‘에덴에서의 추방’(1426~1427년 작)에서 알몸으로 쫓겨나면서 통곡하는 아담과 이브를 그렸다. 추방된 자의 절규는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반면에 피터르 브뤼헐(1525?~1569)의 ‘웨딩 댄스’(1566년 작)는 흥청망청 술 마시고 춤추는 군상의 모습을 통해 당대가 ‘축제의 시대’였음을 증언한다.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1553)는 ‘청춘의 샘’(Der Jungbrunnen)이라는 풍자적 그림을 통해 ‘영원한 젊음’ 혹은 ‘현세적 쾌락’이라는 당대의 욕망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렇듯이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기에 인간적인 것들이 부활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개인주의와 자의식이 싹텄다. 욕망과 감정의 표현에서도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중세의 권위주의에서 벗어난 음악은 명료하고 단순해졌으며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류트의 황금기로 이어졌다. 르네상스는 ‘노래의 시대’였다. 그 노래는 엄숙한 성가가 아니라 혼자 부르는 노래, 스스로의 감정과 욕망을 드러내는 노래였다. 이럴 때 류트야말로 가장 요긴한 악기였다.

흘러라 나의 눈물이여

스팅이 류트를 안고 있다. <songs from the labyrinth> 음반의 내지에 수록돼 있는 사진이다. 유니버설 제공

스팅이 류트를 안고 있다. <songs from the labyrinth> 음반의 내지에 수록돼 있는 사진이다. 유니버설 제공

이제 영국의 작곡가 존 다울랜드(1563?~1626)가 등장할 차례다. 영국은 르네상스 초기에 존 던스터블(1385?~1453)이라는 탁월한 음악가를 배출했지만, 현재 전해지는 그의 작품들은 전적으로 교회의 전례음악이기 때문에 이 지면에서는 논외로 치겠다. 이제 우리가 만날 음악가는 탁월한 류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다울랜드다. 그의 젊은 시절은 런던 태생이라는 사실 외에는(더블린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음) 거의 안개에 싸여 있다. 역으로 보자면 청년 다울랜드가 적잖이 방황하고 떠돌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16세에 파리로 건너가 6년을 보내고 영국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독일 북부와 이탈리아 등지를 떠돌았다. 방랑 탓에 빚에 쪼들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떠돌이의 삶을 청산하고 완전히 돌아온 것은 1590년대 후반쯤이었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였다. 여왕이 다스리던 약 50년간(1558~1603)은 정치·종교적으로 격변이 휘몰아쳤지만 왕실의 후원으로 찬란한 문화가 꽃핀 시기이기도 했다. 다울랜드와 거의 동년배인 셰익스피어(1564~1616)의 명성은 이미 그때부터 확고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다울랜드는 ‘궁정 음악가’가 될 수 없었다. 영국에서는 국교회(성공회)가 이미 공식적인 종교로 확립돼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여왕의 류트 연주자였던 존 존슨(John Johnson, 1545?~1594)이 세상을 떠나자 그 자리를 자신에게 허락해달라고 청원하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영국의 음악가들은 궁정이나 교회에 소속되거나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경우로 양분됐는데 다울랜드는 후자에 속했다. 한데 이 지점에서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것이 당시 영국의 프리랜서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정서적 경향이다. 그들은 주로 슬프고 우울한 시를 짓거나 노래를 작곡했는데, 그것을 이른바 ‘영국적 멜랑콜리(melancholy)’라고 부른다. 이는 엘리자베스 시대에 빈번히 드러나는 예술적 경향이었다. 물론 그것은 앞서 거론했듯이 르네상스적 징후였다. 르네상스의 음악가들이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에서는 특유의 우울함, 혹은 ‘눈물의 정서’가 등장했다. 일부 학자와 비평가들은 축축하고 음울한 날씨도 한몫했다는 해석을 덧붙인다.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시인과 음악가들은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다울랜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그는 ‘주류 음악사’에서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그밖의 작곡가들’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의 이름과 ‘에어’(Ayre, 류트로 반주하는 독창곡)는 오늘날의 대중에게까지 널리 알려졌으니, 그것은 바로 ‘스팅’이라는 예명으로 활약하는 영국의 뮤지션 고든 매튜 토머스 섬너(1952~ )에 의해서였다. 물론 많은 이들에게 단박에 떠오르는 스팅의 음악은 ‘잉글리시맨 인 뉴욕’(Englishman in New York)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스팅이 그룹 폴리스 시절에 불렀던 ‘에브리 브레스 유 테이크’(Every Breath You Take)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스팅은 ‘대중음악’이라는 틀에만 가둘 수 없는 뮤지션이다. 1985년 그룹 폴리스가 해체되고 솔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클래식’의 범주에 속하는 다양한 음악들을 자신의 음악세계 안으로 끌어들였다. 바흐와 프로코피예프, 심지어 현대음악가 한스 아이슬러의 음악을 차용해 과감한 재창조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스팅은 2006년 내놓은 여덟번째 솔로 앨범 <미로에서 온 노래들>(Songs from the Labyrinth)에서 400여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스스로 고백하듯이 “20년간 다울랜드의 음악과 류트를 공부”한 결과였다.

이 음반은 딱 한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울랜드의 노래들로 채워졌다. 스팅은 보스니아 출신의 에딘 카라마조프와 함께 류트를 연주한다. 텁텁하고 걸걸한 특유의 목소리로 ‘키 작은 나무도 꼭대기가 있다네’ ‘오거라 무거운 잠이여’ ‘그녀는 나의 잘못을 용서할까’ 등을 노래한다. 그중에서도 ‘흘러라 나의 눈물이여’(Flow My Tears)야말로 백미로 손꼽힌다. “눈물아 흘러라, 눈물을 떨구어라/ 영원히 추방당한 나를 슬퍼하라/ 밤마다 검은 새가 오명을 노래하는/ 그곳에서 나는 쓸쓸히 살아가련다”(1절 첫 연)

이 노래는 영국의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1949~ )의 맑고 깨끗한 목소리로 들어도 좋지만 스팅의 어둡고 탁한 목소리는 또 다른 매력을 풍긴다. ‘르네상스의 악기’ 류트는 이처럼 고독과 슬픔, 혹은 절망을 노래했다. 물론 때로는 즐거움과 기쁨, 경쾌함과 위트를 표현하기도 했고, 앞서 언급했듯이 초기의 오페라를 반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류트는 홀로 노래하는 사람의 슬픈 악기였다.

[클래식 오디세이 - 음악의 역사를 항해하다]⑦홀로 노래하는 이의 슬픔…깊은 저음·긴 울림, 시대를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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