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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단 소년에서 칸타타의 대가로…그의 뿌리는 ‘코랄’이었다
독일의 중앙에 자리한 작은 도시 아이제나흐…루터의 자취가 남은 이곳에서 2세기의 세월이 지나 태어난 바흐성 게오르크 교회의 보이 소프라노였던 그는 죽을 때까지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 살며 ‘코랄’을 몸과 영혼에 원형처럼 새긴다■루터와 바흐의 도시, 아이제나흐독일 중부에 아이제나흐(Eisenach)라는 도시가 있다. 비유하자면 ‘독일의 배꼽’이다. 독일의 딱 중앙에 자리한 이 도시는 마르틴 루터(1483~1546)가 청소년기를 보낸 도시로 유명하다. 물론 출생지는 아니다. 루터는 아이제나흐에서 북동쪽으로 160㎞쯤 떨어진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고향’이라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머문 시간이 생후 1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훗날 기독교의 역사를 전복할 아들이 뒤뚱뒤뚱 걸음마를 뗄 무렵에 만스펠트(Mansfeld)라는 근처의 도시로 이주했다. 현재 이 도시의 인구는 약 3000명에 불과하니, 그때나 지금이... -
영국 음악을 잠에서 깨운 이방인…그의 선율은 ‘최고의 선물’이다
바흐·스카를라티와 함께…1685년은 헨델을 우리에게 안겨준 고마운 해여섯 살 때 ‘깜짝 데뷔’한 독일 소년은 훗날 영국 음악을 이끌며 화려한 꽃을 피웠다■1685년, “이 얼마나 위대한 해인가!”지난 회에 언급한 헨리 퍼셀은 36세에 세상을 떴다. 훗날 모차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참으로 짧은 생애였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래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더라면 영국 음악의 위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들은 이런 가정법을 부질없는 공상으로 만든다. 헨리 2세 시절에 음악가로 첫걸음을 뗀 그는 제임스 2세 치하를 거쳐 윌리엄과 메리 2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활약했지만, 이어지는 조지 1세의 시대에 영국 음악을 주도한 인물은 뜻밖의 이방인이었다.짐작하듯이 그의 이름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andel)이다. 독일 할레(Halle)에서 1685년 태어난 그는 20대 후반부터 1759년 74세로 사망할... -
눈부시지는 않지만 우아하다…깊이와 품격을 돋을새김한 선구자
올리버 크롬웰의 시대“요컨대 바로크 음악은 이탈리아 음악이거나 프랑스 음악이었다.” 이 말은 당대 음악의 거장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1929~2016)의 입에서 나왔다. 두 나라가 바로크 음악에서 그만큼 절대적 위치를 차지했다는 뜻이다. 바로크 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또 루이 14세 시대에 국가의 주도로 예술이 융성했던 프랑스가 양대 산맥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듣는 음악은 대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작품들인 까닭이다. 당시 그곳의 음악가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 지점을 짧게나마 설명하면 이렇다. 당시의 독일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음악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특히 이탈리아 쪽에 경도돼 있었다. 17세기 독일 궁정에서 활동하던 음악가들은 대다수가 이탈리아인이거나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독일인이었다. 텔레만과 바흐의 시대는 아직 ... -
발레광 루이 14세를 등에 업고 프랑스 음악계 지배한 이탈리아인
‘바로크 음악의 뿌리’ 이탈리아2016년 타계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1929~2016)는 옛 음악을 당대의 악기와 연주 관습으로 해석하고 재현해낸 지휘의 거장이었다. ‘원전연주’ ‘당대연주’ ‘역사주의 연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방식은 그에게서 비롯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때로 아르농쿠르는 당대와 현대를 결합한 ‘수정주의’를 선보이기도 했으나, 그의 이름을 오늘까지도 그리고 미래에도 여전히 기억하게 만들 키워드는 역시 ‘당대’라는 두 글자일 터이다. 첼리스트로 출발한 그는 한 시대를 이끈 지휘자였을 뿐 아니라 음악학자이기도 했다. 생전에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바로크 음악은 ‘말’한다>(Musik als Klangrede, 강해근 옮김, 2006)에는 금과옥조 같은 문장들이 숱하게 등장해 밑줄을 긋게 만든다. 개인적 고백을 조금 덧붙이자면 매우 아끼는 책이다. 앞서의 연재에서 바로크 시대의 미술과 음악이 뿜어내는 생동... -
달리고 튀어오르고 춤춘다…삶의 파노라마가 담긴 ‘소리의 축제’
(10) 바로크와 협주곡의 탄생바로크란 무엇인가바로크(Baroque)는 움직인다. 달리고 튀어오르고 춤춘다. 이 ‘활달한 생동감’이야말로 가장 두드러지는 바로크의 특징이다. 이와 관련해 여러 예술사 서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례는 아마도 다비드상(像)일 것이다. ‘르네상스의 다비드’와 ‘바로크의 다비드’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두 시기에 각기 만들어진 다비드상은 150년이 흐르는 동안에 일어난 예술적 변화를 한눈에 가늠하게 해준다. 르네상스의 조각가 도나텔로(1386~1466)는 다비드상을 두 점 남겼는데 하나는 대리석으로, 다른 하나는 청동으로 제작했다. 오늘의 시선으로 봤을 때 한층 극적인 작품은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의 명을 받아 1440년경에 완성된 청동 다비드상일 것이다. 당대에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누드 청동상이다. 어린 소년의 몸매를 매우 노골적으로 묘사했다. 이어서 35년쯤 뒤에 화가이자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 -
⑨고통 서린 천상의 목소리 “신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콘세르바토리오(Conservatorio)의 등장16세기의 나폴리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마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애초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분할 통치했다. 하지만 곤살로 데 코르도바(1453~1515)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프랑스군을 완전히 몰아내면서 나폴리를 한입에 삼켰다. 사실 프랑스와 스페인은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오랫동안 경쟁했고 우위를 점한 쪽은 대체로 프랑스였다. 하지만 ‘엘 그란 카피탄’(El Gran Capitan, 위대한 장군)으로 불리는 코르도바가 전세를 뒤집었다. 1505년 양국이 체결한 리옹 조약에서부터 스페인은 나폴리를 독점 지배했다. 뿐만 아니라 16세기 중반부터 베네치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이탈리아 국가들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했다. 1700년까지 이런 상태가 이어졌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이탈리아 도시들은 그렇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중에서도 나폴리는 200년에 걸쳐 스페인의 지배... -
⑧오페라 <오르페오>, 처음은 아니지만 ‘최초’다
평론가에는 대개 두 부류가 있을 터이다. ‘사실’ 혹은 ‘근거’에 충실한 이들이 있을 것이고, 그보다는 화려한 수사에 치중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빨강과 파랑으로 양분되지 않는다. 대다수 평론가들은 그 둘을 겸비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넓은 스펙트럼의 어느 중간쯤에 자신의 푯대를 꽂는다. 그런 전제하에서 얘기하자면, 미국의 음악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화려한 수사’ 쪽에 가까울 것이다. 1915년 뉴욕에서 태어나 2003년에 타계한 그는 주로 뉴욕타임스에 글을 썼다. 미국 음악계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한국에도 두 종의 책이 번역돼 있는데,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이 세 권짜리로,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두 권짜리로 출간돼 있다. 음악책 시장이 협소한 국내에서도 상당히 많은 독자들이 구입해 읽은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숀버그를 ‘음악의 스승’으로 여기는 ‘예찬론자’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감히 말하거니와 ... -
⑦홀로 노래하는 이의 슬픔…깊은 저음·긴 울림, 시대를 넘다
‘류트’의 조상은 아랍에서 건너온 ‘우드’구글에서 ‘Lute Player’를 검색해보면 수많은 이미지들이 주르륵 올라온다. 한데 특이하다. 류트 연주자를 묘사한 대개의 회화 작품들이 르네상스 시대의 것들이다. 시기적으로 조금 늦더라도 르네상스 직후인 바로크 초기에 해당하는 것들이 많다. 이는 그 이전 시대의 회화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장면이다. 그래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왜 르네상스 화가들은 류트 연주자를 이토록 많이 그렸던 것일까.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당대의 사람들이 그 어떤 악기보다 류트를 사랑했던 까닭이다.이 유서 깊은 현악기의 재료는 예나 지금이나 나무다. 주로 전나무로 뒷배가 불룩한 공명판(body)과 긴 목(neck)을 만들었다. 목에는 상아를 덧대 강도를 높였다. 많은 회화 작품들에서도 보이듯이 목의 끝부분은 직각으로 꺾여 있다. 양의 창자로 만든 현(弦)을 목의 끝부분에 걸고 그것을 공명판의 하단에 연결했으며, 꺾인 목에 부착된 줄... -
⑥예술 깎아내린 루터의 종교개혁…음악만은 ‘믿음의 도구’로 섬겼다
탐미주의자 레오 10세교황 레오 10세(1475~1521)는 지난 회에 언급했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둘째 아들이었다. 뚱뚱하고 시력이 안 좋았으나 머리 회전은 빨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렌초는 차남을 성직자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일찌감치 세워 교회에 봉헌했다. 아이가 일곱 살 때였다. 적장자에게 가문의 수장 자리를 잇게 하고 차남을 성직자로 만드는 것은 당대의 명문가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로렌초의 주도면밀한 계획은 그 이상을 원했다. 메디치 가문이 세속과 교회의 권력을 모두 장악하는 것, 다시 말해 양손에 떡을 들려는 야심이었다. 고조부의 이름을 이어받아 ‘조반니’로 불렸던 차남은 고작 열네 살이던 1489년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됐으며 3년 뒤 승격해 로마의 추기경단에 입성했다. ‘메디치’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1513년 3월11일, 바티칸의 콘클라베(Conclave)는 마침내 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 -
⑤르네상스 예술 꽃핀 피렌체, 음악의 향기도 남달랐다
‘꽃의 도시’ 피렌체피렌체는 ‘꽃의 도시’(La Citta del Fiore)로 불린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아르노강 유역에 주둔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강변에 꽃이 만발한 풍경을 보고 ‘플로렌티아’(Florentia)라고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카이사르가 작명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처음에는 도시라기보다 군사적 요새에 가까웠다. 동서남북으로 1.6㎞를 넘지 않았다. 번듯한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1세기에 들어서면서였다. 같은 세기 후반에 피렌체의 인구는 5만명에 근접했다. 파리보다 적었지만 런던보다는 많은 인구였으니 ‘대도시’라는 표현이 어색치 않았다. 동방과의 교역을 통해 상업도시로 부상했던 1300년 무렵에는 인구 10만명을 넘어섰다. 물론 지난 회에 언급했듯이 1347~1350년의 첫 흑사병 유행으로 적어도 인구의 3분의 1이 줄었다. 하지만 피렌체와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 등 이탈리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