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화해는 한국도 일본 아픔 공감할 때 가능” 美 전문가

워싱턴|손제민 특파원

“언젠가는 달라진 전략적 환경에 직면해 일본 지도자가 소녀상의 목에 스카프를 걸어주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날이 올 지 모른다. 또 언젠가는 한국 지도자가 히로시마 원폭기념관을 방문해 원폭 공격에 희생된 일본인 그리고 수많은 한국인들의 영혼을 기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낮아보인다. 하지만 1945년에 독일인들이 노르망디 상륙을 연합군 국민들과 함께 기념하리라는 것도 똑같이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언젠가 서유럽처럼 일본과 한국도 망자(亡者)를 함께 묻을 수 있길 바란다.”

전쟁 기억과 국제적인 화해라는 주제를 전공한 제니퍼 린드 미국 다트머스대 교수(사진)의 이 말은 2일 동북아역사재단과 조지워싱턴대 시거센터 주최로 조지워싱턴대 엘리엇스쿨에서 열린 카이로선언 70주년 학술행사에서 별로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토론자로 나온 최운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그것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린드 교수는 “일본이 2차대전 중 자국민들의 죽음과 피해에 대해서만 특별히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고, 먼저 주변국들에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면서 “역사화해는 결국 가해자가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 것인데, 피해자도 받을 준비가 돼있어야 가능하다. 한국도 일본의 아픔에 공감함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제니퍼 린드 다트머스대 교수

제니퍼 린드 다트머스대 교수

그는 발표 후 기자와 만나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매우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안다”면서 “하지만 전쟁의 고통을 함께 겪은 원폭피해자들이 한국에도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린드 교수는 독일과 프랑스의 사례를 들었다. 침략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프랑스인들은 1950년대 후반 화해를 추구했고, 프랑스인들은 독일인들 역시 전쟁의 피해자였음을 인정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프랑스인들이 관대했기 때문만도, 독일인들이 진심어린 사과를 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전략적인 이해관계에서도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에 서유럽에서 전쟁 위협이 상존했고, 소련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전략이 환경으로 작용했다. 미국이 소련에 비해 재래식 무기에서 열세인 상황에서 소련의 침공이 있을 경우 그것은 곧 핵무기 사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프랑스 정부와 독일 정부는 미국의 이러한 전략에 두려움을 느꼈고, 함께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반면 북한과 안보 경쟁을 하는 한국으로서는 최선의 옵션은 미국과의 동맹이었지 일본과의 협력은 아니었다. 일본 역시 미국과 강한 동맹을 구축하며 한국과 화해할 필요성이 높지 않았다. 이러한 동북아의 전략적 환경이 한·일 간의 화해를 저해했다고 린드 교수는 말했다.

그는 이러한 전략적 환경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내 및 국제 정치적 환경이 변화하면 한국과 일본은 관계 개선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릴 수 있다. 그러한 전략적 전환은 중국에 대한 증대된 위협 의식에서 올 수도 있고, 미국의 동북아에서의 동맹 종료(아시아 재균형을 외치는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지만)에서도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전환이 비화해적인 내러티브로 정치적 이익을 얻고 있으며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화해 제스처를 보였다가는 정치적 위험에 노출되는 서울과 도쿄의 국내 정치 지도자들로 하여금 비용-편익 계산을 달리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토머스 버거 보스턴대 교수는 “독일이 사과를 한 것은 단지 유대인들을 많이 죽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유럽 내에서 협력해야 할 다른 많은 나라들에도 피해를 줬기 때문에 이해관계에 따라 강제된 측면이 있다”면서 “하지만 일본은 그런 압력을 미국으로부터 받긴 했으나 미국의 압력도 나중에 후퇴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과란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인데, 일본은 90년대 초 그리고 후반에 김대중에게 사과했으니 이걸로 끝이라는 게 일본의 태도”라고 말했다.

미 의회조사국(CRS) 연구위원을 지낸 래리 닉쉬 한미문제연구소(ICAS) 연구위원은 “독도 문제는 한일간의 최대 갈등요인”이라며 “메이지 시대 때 일본 정부에서 나온 문건들을 보면 많은 경우에 독도가 한국 영토라고 밝히고 있는 등 한국 영토라는 주장에 근거가 더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독도가 반환대상에서 누락된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라며 “미 국무부가 기록관리청에 지시해 당시 비밀자료들을 확인해볼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양다칭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결국 3국이 참여하는 역사대화와 교과서 함께 만들기를 통해 인식 공동체를 만드는 작업을 이어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학술행사 마지막에 한 일본인 방청객은 “도대체 어떤 사과를 해야 한국인들이 수용하게 되느냐. 영구적인 사과라면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겠느냐” “독도/다케시마가 분쟁지역이라면 왜 ICJ에 가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던져 좌중이 조용해졌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돈을 댄 행사여서 이런 종류의 질문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 사회자가 “또다시 하루 종일 논의해야 하는 주제를 제기하셨다. 뒷풀이 때 더 논의하도록 하자”고 넘기며 행사는 막을 내렸다.

카이로 선언은 2차대전 종반부인 1943년 12월2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연합국에 참여한 미국, 영국, 중국이 발표한 공동 선언이다. 일본의 항복과 종전 후 일본이 점령했던 지역을 반환하기로 한 내용을 담았으며 만주와 타이완을 중국에 귀속하고,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Today`s HOT
이란 유명 래퍼 사형선고 반대 시위 올림픽 성화 범선 타고 프랑스로 출발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