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그들 안의 ‘랟펨’을 들추다

백승찬 기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서 쟁점포럼 열어 ‘래디컬 페미니즘’ 비판적 성찰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30일 ‘래디컬을 다시 질문한다’ 포럼이 열렸다. 포럼은 청중 없이 진행됐고, 온라인 생중계됐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유튜브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30일 ‘래디컬을 다시 질문한다’ 포럼이 열렸다. 포럼은 청중 없이 진행됐고, 온라인 생중계됐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유튜브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난민·퀴어 반대 등 ‘타자’ 배제
비판 불허하는 폐쇄적 인식론
유럽 극우 인종주의와 유사

2018년 예멘 난민 수백명이 제주도를 통해 입국했을 때, 일부 페미니즘 커뮤니티에서는 이들을 ‘남민’이라 부르며 비난했다. 난민 대부분이 남성이며, 이슬람의 여성인권이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이들 난민 남성이 한국 여성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도 문제 삼았다.

‘래디컬 페미니즘’(랟펨)으로 불리는 이 세력은 지난해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도 반대했다. 트랜스 여성이 여성만의 공간인 여대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이들은 최근 도쿄 올림픽에서 뉴질랜드의 트랜스 여성 선수가 여자 역도 경기에 출전하자 ‘공정하지 않다’고 비판했고,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기도 한다.

지난 30일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는 쟁점 포럼 ‘래디컬을 다시 질문한다’가 열렸다. 한국 내 랟펨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자리였다.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 진영 내부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토의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포럼은 청중 없이 열렸으며 온라인으로 생중계됐다.

김보명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제도화된 여성운동이 여성혐오, 성차별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사이, 랟펨이 이를 직접적·대중적 언어로 고발함으로써 밀레니얼 여성들에게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봤다. 미투, 불법촬영 등 젠더 이슈의 부각에 실천적 동력을 제공한 것은 기성 여성운동이 아니라, 랟펨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김 교수는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이들의 폐쇄적인 인식론을 비판했다. 그는 “스스로 계보도 언어도 없는 ‘근본 없는’ 여성들이라 말하면서 ‘생물학적 성’이라는 근본주의적 수사를 고집하고, 여성과 ‘권력’의 새로운 공식을 원하지만 시장과 국가 이외의 대안을 찾지 못하는 ‘랟펨’의 폐쇄적이고 자기반복적인 행보”를 지적했다.

페미니즘, 그들 안의 ‘랟펨’을 들추다
2018년 7월12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국내 체류 난민들이 예멘 난민의 조속한 난민심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위 사진). 2019년 6월1일 서울광장 일대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난민, 퀴어를 공공연히 비판한다.  정지윤·김창길 기자

2018년 7월12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국내 체류 난민들이 예멘 난민의 조속한 난민심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위 사진). 2019년 6월1일 서울광장 일대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난민, 퀴어를 공공연히 비판한다. 정지윤·김창길 기자

트랜스 여성 올림픽 출전 비판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만 강조

포럼 기획한 영화제집행위원
“이견 감추지 않고 토론할 것”

루인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상임연구원은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만을 강조하는 랟펨에서 ‘본질주의’를 읽었다. 랟펨의 주장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보부아르)이라는 페미니즘 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구를 부정한다. 랟펨은 트랜스 여성이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기에 여성의 경험을 공유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생물학적 여성 집단 역시 공통적인 경험을 하지는 않는다. 루인 연구원은 앨리스 워커, 벨 훅스 같은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베티 프리단 등 ‘백인 중산층’ 페미니스트를 비판한 것을 언급했다. 차별과 혐오는 성, 인종, 계급에 복잡하게 엮여 있기에 “단순한 하나의 적을 상정하는 행위,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서로 간에는 연대 불가능하고 각각은 완전히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으로 이해하는 태도”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랟펨의 반(反)다문화 기조, 난민 거부가 유럽 극우의 인종주의적 주장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2018년 예멘 난민의 제주도 도착 당시 한 랟펨 커뮤니티에는 인종적 편견이 담긴 ‘무슬림남 행동 매뉴얼’이 게시됐다. 이 게시물은 랟펨이 만든 것이 아니라, 반다문화 커뮤니티에서 이전부터 유통되던 것이었다. 랟펨이 난민 반대를 외치자, 반다문화 커뮤니티에서 “여성단체와 손잡자”고 제안하는 일도 있었다. 전의령 전북대 인류학과 교수는 유럽의 우익 포퓰리스트가 주장하는 ‘페모내셔널리즘’(페미니즘+내셔널리즘)과 한국 랟펨의 유사성을 언급했다. 페모내셔널리즘에서는 ‘위험한 무슬림 남성 vs 피해자이자 구출되어야 할 무슬림 여성’ ‘젠더평등한 서구적 가치 vs 여성억압적 무슬림 문화’의 구도 아래 제국주의, 식민주의적 인식을 되새김한다. 여성인권이라는 이름 아래 랟펨과 반다문화 세력이 ‘우연한 연합’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엄혜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랟펨의 등장을 신자유주의적 주체성과 연결지었다. 고도화된 경쟁의 장에서 낙오한 남성들이 스스로 피해자임을 자처하고 이를 여성에 대한 공격으로 해소하려 하자, 여성은 ‘피해자로서의 위치 회복’에 주력했다는 것이다. 랟펨의 주요 전략인 미러링 역시 표면적으로는 급진적이지만, 결국 자기 피해에 대한 공감에 호소하는 전략이라고도 봤다. 이 과정에서 공감을 위한 동질성 확보에 주력하다보니 타자는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발제 후 라운드테이블에서 엄 교수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문제는 “여성들이 주체화되고 공적 담론에 참여하는 일반적인 구조에서 바라봐야 한다”며 “특정 집단, 세력의 돌출적인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현미 연세대 인류학과 교수는 “현재의 페미니즘 정치학은 과도하게 긴장돼 있다”며 “우리 안의 긴장을 어떻게 낮추면서 정치적 공유지로 이동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고 말했다.

포럼 기획자인 권김현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은 기자와 통화하며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가 심하지만 내부의 이견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페미니즘은 단일한 입장을 공유함으로써가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토론하면서 더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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