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41)높속알은 함없

김종길 다석철학 연구자

늙은이(老子) 38월은 속알줄(德經)의 첫 글월이다. 길줄(道經) 끄트머리 37월의 마음자리(心地)는 그 글월 첫줄에 쓰인 “길은 함없어도 늘 아니하는 게 없”이다. 함없이 늘 하는 게 길이란 이야기다. 없이 하시는 님이요, 그 님이 바탈(性)과 일름(命)의 알짬(精)으로 솟아 참나(眞我)를 깬다. 속알줄의 꼭지마음(核心)도 다르지 않다. “높속알(上德)은 함없고 라함없”는 얼숨(靈氣)이기 때문이다.

얼숨은 검얼(神靈)의 숨돌(氣運)이다. 집집 우주의 모든 잘몬(萬物)을 산숨(生氣)으로 짓고 일으키는 그 숨돌. 이 숨돌이 어떤 일을 만나도 꿰뚫어 밝히고 또 아는 힘을 솟나게 한다. 크고 큰 슬기가 솟아나는 것이다.

앞에서 ‘높속알’이라 했듯이 속알은 ‘얕속알(下德)’도 있다. 속알은 높속알과 얕속알로 두 갈래다. 얼숨이 비어 빈 빈탕의 속알로 가득가득 있으면 높속알이요, 그렇지 않고 조금이라도 범벅이 뒤섞여 마음보가 얇아지면 속알은 없다. 그야말로 소갈머리 없는 놈이다. 높오르는 속알은 아예 속알을 기대하지도 않고 기대지도 않으니, 오히려 속알이 텅 비어서 시원시원하게 가득가득 있다. 얕내리는 속알은 속알을 놓지 않고 거기에 기대고 기대하니, 시원하게 비어 빈 빈탕의 속알은 아예 없다.

속알이 길을 바짝 따른다고는 하나, 사실 다 큰 속알이 바로 길이라는 얘기도 되지. 속알이요, 길이라고 달리 부르지만 그것은 달리 부르는 ‘하나’인 셈이거든. 닝겔, 밀월, 종이에 수채, 2008

속알이 바로 길

속알이 길을 바짝 따른다고는 하나, 사실 다 큰 속알이 바로 길이라는 얘기도 되지. 속알이요, 길이라고 달리 부르지만 그것은 달리 부르는 ‘하나’인 셈이거든. 닝겔, 밀월, 종이에 수채, 2008

속알은 맨 처음의 없꼭대기(無極)로 높오르는 스스로 저절로의 텅 빈 참 움돌(生生化化)이요, 참 숨돌이다. 스스로 저절로 돌아가니 참 움돌은 ‘함없’이요, 또 무언가 하라는 ‘라함없’으니 걸릴 것도 없다. 하라함 없이도 세상의 잘몬은 잘도 돌아가고 집집 우주의 길도 뻥 뚫렸다. 속알은 씨알과 같아서 그 작고 작은 속에 이미 산일름(生命)의 우주가 다 있다. 제절로 깨 캐내 높높이 높올라 열매 맺고 영글어 터지는 그 숨돌의 힘 찬 속을 보라!

노자 늙은이 21월에서 “다 큰 속알의 얼골은, 오직 길, 밭삭 따름.”이라고 했다. 속알 키우는 것이 길 따르는 삶이다. 다 큰 속알의 얼굴은 오직 길이요, 그 길 바싹 따르는 일이다. 바투로 다붙어 밭아야 속알이 빛난다. 오직 옳고 바른 올바른 길을 따라야 텅텅 비어 빈 속알의 시원한 큰 얼굴이 된다. 글월을 풀면서 늙은이는 이렇게 말했다 : “속알이 길을 바짝 따른다고는 하나, 사실 다 큰 속알이 바로 길이라는 얘기도 되지. 속알이요, 길이라고 달리 부르지만 그것은 달리 부르는 ‘하나’인 셈이거든. 다만 속알이 길을 따르니 길은 비롯의 ‘비(없:無:虛)’요, 속알은 비롯의 ‘롯(있:有:實)’이라고 할 수 있지. 있없 번갈아 도는 유무상생(有無相生)으로 살펴야 돼.”

자, 그럼 38월을 소리 내어 읽어보자.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41)높속알은 함없

큰 강이 흐른다. 강줄기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주검을 태운다. 불이 치솟으며 푸르스름한 연기를 길게 내 뱉는다. 불 끝에서 연기가 소용돌이친다. 저녁노을이 지는 강의 하늘은 불그스레하다. 그 불그스레한 하늘로 연기가 솟아서 둥둥 떠간다. 새들이 날아오르고, 종소리가 울리고, 여기저기서 우는 노래가 떠가는 연기를 좇는다. 바글바글, 웅성웅성, 어디선가 아우성이 번지고 그 소리들 틈바구니 뚫고 떠돌이와 깨달이가 걷는다.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41)높속알은 함없

떠돌이 : 높오르는 속알은 속알에 기대지 않으니 속알이 있지. 속알 놓아야 비로소 속알이 솟거든. 속알이 솟은 자리는 텅 비었으나 얼숨의 숨돌이 돌아가는 빈탕이야. 얕내리는 속알은 속을 놓지 않으니 싶음이 들어찬 속이야. 속알 없지.

깨달이 : 하고잡, 하고픔, 싶음(欲)이 끼어들면 속알은 속알 놓지 않으려고 야단이야. 속알 없는 짓이란 걸 몰라. 가만 가만히, 맑고 고요하게, 없꼭대기로 속알이 높올라야 속알이 보이지. 하늘일름(天命)의 얼줄이 내려 닿은 씨알 속 바탈(性)인 온뿌리제꼴(本來面目)을 보는 거야.

떠돌이 : 다석은 올라가 올라가라고 했어. 올라가다가 ‘나 무던히 올라왔지?’ 하지 말고 더 더 올라가 올라가라는 거야. 하느님 아들 되는 지경까지 올라가라는 거지. 그렇게 올라가 올라가면 아버지를 머리 위에 모시게 되는데, 그때 그 자리에 돌아가면, 아버지가 크게 벌려놓으신 우주 속이나 우주 밖이나 그만큼, 우리가 하느님아버지 나라에 돌아갈 거라는 거야. 속알 놓고 높오르니 속알이 있는 거지.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41)높속알은 함없

깨달이 : 그래. 그래서 높속알은 스스로 저절로 오르니 함없고(無爲), 하라는 라함없어(無以爲). 그런데 얕속알은 달라. 하고(爲) 하라는 라함이 있거든(有以爲). 높사랑(上仁)은 하되(爲) 하라는 라함없고(無以爲), 높옳(上義)은 하되(爲) 하라는 라함이 있지(有以爲). 게다가 높낸감(上禮)은 하라고 해서 말 안 들으면 팔을 끌어다 그대로 치르기도 해.

떠돌이 : 높속알(上德), 얕속알(下德), 높사랑(上仁), 높옳(上義), 높낸감(上禮)으로 바꾼 우리말이 참 아름다워. 그 말들의 몸짓 맘짓에 함없고 하라는 라함없으며, 하고 하라는 라함이 있는 뜻도 슬기로워. 함(爲), 함없(無爲), 라함없(無以爲), 라함있(有以爲)의 뜻말도 잘 알아서 받아내니 재미가 있고. 높낸감의 낸감은 감(制) 낸 걸 말해. 큰 감은 통째로 쓰지 썰어서 쓰진 않아. 그런데 그걸 내어 쓰면 낸감(禮)이 되는 거야. 낸감도 아니고 높낸감인데 하라고 해서 말을 안 들으니 팔을 잡고 끌어다 그대로 높낸감을 치를 수밖에.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41)높속알은 함없

깨달이 : 다 큰 속알의 얼굴은 오직 길이요, 그 길 바싹 따름이야. 속알 키우는 게 길 따르는 삶이고. 바투로 다붙어 밭아야 속알이 빛나지. 속알이 길을 따르니 길은 비롯의 ‘비(없)’요, 속알은 비롯의 ‘롯(있)’이라고도 했어.

떠돌이 : 그러니 길 잃은 뒤에 속알 보이고, 속알 놓친 뒤에 사랑 보이고, 사랑 잃은 뒤에 옳 보이고, 옳 얽힌 뒤에 낸감 보여. 높낸감이 아닌 낸감은 맘속(忠) 맘믿(信)의 얇고 얇은 얄팍얄팍이오, 어질어질의 머리지.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41)높속알은 함없

깨달이 : 속알 보이고, 사랑 보이고, 옳 보이고, 낸감 보이니 그것을 보고 있는 데에 서 있는 이는 자기가 길의 꽃(道之華)인줄 알 터. 바로 그것이 어리석의 비롯이란 걸 모르고 하는 생각이지. 그래서 사나이(산아이)는 두터운 데로 가지 얇은 데로 가지 않아.

떠돌이 : 길의 꽃이 어리석의 비롯이라니!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41)높속알은 함없

깨달이 : 사나이는 열매를 맺지 그 꽃을 볼라 하지 않거든! 그러므로 이를 집고 저를 버리지. 집어야 하는 이는 열매요, 두터운 데이고, 맘속, 맘믿이야. 버려야 하는 저는 홀리는 꽃이요, 얇은 데이고, 낸감, 얄팍얄팍이지.

떠돌이 : 속알도 놓고, 뜻도 놓고, 일을 이루려는 마음도 놓고, 자기를 높이려는 싶음도 놓고, 저 잘난 척에 빠지는 제뵘도 놓아야 높속알에 오르겠어. 자, 그럼 38월도 새로 새겨볼까!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41)높속알은 함없

■김종길은

다석철학 연구자다. 1995년 봄, 박영호 선생의 신문 연재 글에서 다석 류영모를 처음 만났는데, 그 날 그 자리에서 ‘몸맘얼’의 참 스승으로 모셨다. 다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민중신학과 우리 옛 사상, 근대 민족 종교사상, 인도철학, 서구철학을 좇았다. 지금은 그것들이 모두 뜨거운 한 솥 잡곡밥이다. 함석헌, 김흥호, 박영호, 정양모, 김흡영, 박재순, 이정배, 심중식, 이기상, 김원호 님의 글과 말로 ‘정신줄’ 잡았고, 지금은 다석 스승이 쓰신 <다석일지>의 ‘늙은이’로 사상의 얼개를 그리는 중이다.

■닝겔은

그림책 작가다. 본명은 김종민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큰 기와집의 오래된 소원>, <소 찾는 아이>, <섬집 아기>, <워낭소리>, <출동 119! 우리가 간다>, <사탕이 녹을 때까지> 등을 작업했다. 시의 문장처럼 사유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독자들과 만나는 작가다.


Today`s HOT
휴전 수용 소식에 박수 치는 로잔대 학생들 침수된 아레나 두 그레미우 경기장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해리슨 튤립 축제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