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국산 주류 식재료였던 밀, 99% 수입에 의존하게 된 이유

이호준 기자

1970년대 국내 생산량 22만t 달해
밀 산업 붕괴 출발점 ‘한국전쟁’
미국산 대량 수입으로 자취 감춰

최근 국제 가격 폭등…밥상 위협
가격·수익 경쟁력 없어 경작 저조
“자급률 제고·수입처 다변화 시급”

밀 가격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전 세계 밀 수출량의 약 25%를 차지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장기화되고 인도는 최근 밀 수출을 금지했다. 한국은 밀 전부를 사실상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 밀 가격은 국내 판매가격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칼국수를 비롯해 짜장면, 소면, 라면 등 밀가루를 원료로 하는 서민들의 밥상물가가 요동치는 이유다.

정부가 연일 밀가루값 안정을 위해 “가용한 정책수단을 총동원”하겠다는 결의를 내보이고 있지만, 국제 밀 가격이 폭등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다. 수입선을 다변화해 공급망을 추가로 확보하거나, 가격 상승분의 일부를 재정으로 지원해 소비자 가격 인상폭을 최소화하는 정도가 전부다.

■ 국산 밀 비극된 밀 원조

농림축산식품부 자료를 보면 2019년 기준 밀의 식량자급률은 0.7%다. 쌀은 말할 것도 없고 대두(26.7%), 옥수수(3.5%)에 비해서도 턱없이 낮다. 식생활 변화에 따라 수입한 식용밀만 250만t에 육박하며 쌀 소비량을 뒤쫓고 있지만, 국내 생산량은 1만t 수준에 불과하다.

국내 밀 생산이 처음부터 소수점대 자급률은 아니었다. 기원전 100년경 도입된 국산 밀은 조선시대를 지나 근대에서도 한국 주류 식문화 중 하나였다. 실제로 1970년까지도 전국 경작지 9만7000ha(헥타르)에서 연간 21만9000t의 밀을 생산할 정도로 밀 경작은 국내서 활발했다.

국산 밀 산업 붕괴의 출발점은 한국전쟁이었다. 전후 식량난을 겪고 있던 한국과 달리 당시 미국은 농산물이 남아돌았다. 미국은 자국 농민의 생산비 보장을 위해 밀을 수매했는데, 재고가 넘쳐 창고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미 정부는 타개책으로 저개발국에 잉여농산물을 지원하는 ‘농업수출진흥 및 원조법’(PL480)을 법제화했다. 잉여농산물 문제를 해결하고, 국외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기아에 허덕이던 한국에는 단비 같은 원조였지만 밀 생산 기반은 타격이 불가피했다. 1956년 20여만t 수준이던 미국산 밀 수입은 1968년에는 다섯배 넘게 수입되며 국산 밀을 시장에서 밀어냈다.

때마침 쌀 가격 급등에 따른 혼분식 장려 운동으로 밀 수입이 가속화되고, 1984년 ‘밀 수매제도’까지 폐지되면서 국내에서 밀밭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1990년 집계된 국내 밀 재배면적은 300ha로 생산량은 1000t, 밀 자급률은 0.05%에 불과했다.

■ 자급률 높이기? 안정적 수입망 확보?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자 한국의 곡물 자급률이 급락했다. 자급률이 90%를 넘는 쌀을 제외한 주요 곡물들의 자급률이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정부는 2016년 ‘밭 식량산업 중장기 발전대책’을 통해 2020년까지 밭 식량작물 생산량과 재배면적, 자급률을 각각 81만9000t, 1000ha, 15.2%까지 높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생산량은 2010년 59만5000t에서 2019년 54만9000t으로 오히려 더 줄었다. 생산면적과 자급률 역시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수입의존도가 가장 높은 밀의 경우 생산량이 2010년 3만9000t에서 2019년 1만5000t으로 60% 가까이 급감했다. 국내산 밀이 힘을 못 쓰는 것은 수입산과의 가격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밀은 수입산 1㎏이 329원인데 국산은 925원으로 3배 가까이 비싸다. 다른 작물과의 수익성 차이도 크다. 노동시간당 소득의 경우 밀을 재배하기보다 쌀을 재배하면 시간당 소득이 2배 가까이 높다. 밭 1000㎡당 밀 소득은 16만2000원으로 마늘(129만1000원)이나 양파(110만8000원)의 13~15% 수준에 그친다.

밀은 농사를 지을 경제적 유인효과가 크지 않은 데다 안정적인 공급처도 부족하고, 균질한 품질을 보장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농촌현장에서 밀 경작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정부는 2020년 ‘밀 산업육성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2025년까지 밀 자급률을 5%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내놨지만 달성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새 정부도 밀 자급률 목표를 2027년 7%로 설정했지만, 단순히 전 정부의 2030년 자급률 9.9% 목표를 따라 했을 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좀처럼 오르지 않는 밀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밭 직불금 등 적극적인 재정을 투입한 일본의 사례를 참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일본은 정부가 밀을 독점 수입한 뒤 이윤을 붙여 민간에 공급하고 그 이윤을 밀 경작 농가에 지원하는 형태로 현재 17%대의 밀 자급률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소매시장에서 소비자들이 사먹는 밀가루 가격과 관련 제품 가격이 그만큼 높아져 국내에서 동일한 정책을 도입하기란 쉽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자급률 제고 노력과 별개로 전쟁이나 재난으로 인한 공급불안을 대비하는 것이 먼저라는 주장도 있다. 안정적으로 국내에 밀을 들여올 수 있는 공급망을 탄탄히 갖추는 게 현실적으로는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7번째로 곡물 수입량이 많은 국가지만 몇몇 주산국에 수입물량 대부분을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밀은 미국과 호주, 우크라이나 등 3개국에서 약 80%를 수입하고 있다. 콩은 미국, 브리질에서 90%, 옥수수는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3개국에서 80%를 수입하고 있다. 이들 국가가 수출금지 등 무역제한 조치를 단행할 경우 가격 상승 위험에 대처할 방법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비상 상황에서도 공급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이들 국가와 협력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지속적으로 곡물 수입국 다변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김종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국제 곡물가격이 급등하면 긴급하게 공급선 추가 확보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국제 가격이 안정적일 때는 자급률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면서 “어느 한쪽만 정답이라고 평가하기 힘든 만큼 자급률을 높일 방안을 찾는 한편, 해외 농업개발을 통한 물량 확보, 수입선 다변화 등 밀 공급 안정을 위한 조치들도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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