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헌 | 변호사·전 감사원장

기관원 M “김대중 관련 출판 말라”… 대선 전 필자·편집자 구속

■ 쿠데타 정권하의 필화 홍수

압제 정권이 능사로 침해하는 국민의 기본권은 크게 보아 신체의 자유와 정신적 자유로 대별할 수 있다. 그리고 정신적 자유 중에서도 언론의 자유, 창작의 자유를 포괄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접점에서 필화(또는 설화)가 일어난다. 독재정권의 극한이라 할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유별나게 필화가 잦았던 것은 바로 그 집권자의 반민주적 체질을 반영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의 ‘민족일보’ 사건(1961)을 서막으로 하여 이 땅에 빚어진 필화를 대충 열거해보면 이러하다. 조선일보 리영희 기자의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사건(1964), MBC사장 황용주의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 사건(1964), 작가 남정현의 소설 ‘분지’ 사건(1965), 동양통신의 ‘군기’ 사건(1968), 신동아의 ‘차관’ 기사 사건(1968), 김지하의 담시 ‘오적’ 사건(1970), 시인 양성우의 ‘겨울 공화국’ 사건(1975), 한승헌의 ‘어떤 조사’ 사건(1975), 월간 ‘다리’지 사건(1971), ‘민중교육’지 사건(1986), 세 언론인의 ‘보도지침’ 폭로사건(1986) 등이 형사문제로까지 번진 사례들이었다.

감옥이나 법정까지 가지는 않았더라도 연행, 입건 또는 일시 구속된 사례는 일람표를 만들기에 지칠 정도로 많았다. 형사처벌과는 달리 행정조치로 폐간당한 경우도 있으니 ‘사상계’ 사건(1970)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일러스트 | 박건웅

일러스트 | 박건웅

■ ‘사상계’를 잇는 비판적 정론지로

‘사상계’는 1953년 장준하 주도하에 창간된 종합 월간지로서 지식인과 학생층으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얻으며 성장하였다. 그런데 이 월간지가 5·16 후의 군정 연장, 굴욕적 대일외교, 부정부패 등을 격렬하게 반대하자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특히 함석헌 선생의 ‘5·16을 어떻게 볼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등은 국민들에게는 큰 깨달음을, 쿠데타 집권자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 거기에다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싣자 그 작자는 물론 발행인도 구속을 당하는 등 (그것도 반공법 위반으로) 탄압을 받던 끝에 ‘인쇄시설 미비’라는 이유로 정부가 잡지사의 등록을 취소함으로써 끝내는 폐간되고 말았다.

그 뒤, 정론지의 부재를 아쉬워하던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 ‘사상계’지를 대체할 만한 월간지의 출현을 대망하는 공론이 일어났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자 뜻 있는 몇 사람의 노력으로 세상에 나온 잡지가 바로 월간 ‘다리’였다. 이 잡지의 간행에 필요한 자금은 정계의 현역 국회의원인 김상현이 대고 운영은 범우사(출판사) 사장 윤형두가 맡기로 했다.

‘다리’지가 창간된 것은 1970년 9월이었다. ‘사상계’지의 자유와 민권을 향한 민주정신도 이어가겠다는 다짐 아래 대화의 가교를 자부하고 창간된 이 잡지는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필진도 넉 달 전까지 ‘사상계’에 기고하던 필자들을 거의 재결집하였고, 이에 더하여 젊은 신예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아주 탄탄해졌다. 당시 필자들의 면면을 보면, 함석헌 김재준 이병린 박순천 유진오 천관우 안병욱 김동길 황성모 리영희 장을병 등 당시로선 민족정신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사상가, 학자, 논객들이었다. 그런 성향으로 해서 자연스레 박정희 정권의 장기 독재에 비판적인 잡지가 됐고, 독자의 뜨거운 호응에 비례하여 정치권력 쪽의 주시와 미움은 점차로 커지게 되었다.

‘대화의 가교’라는 부제가 붙은 월간 ‘다리’ 창간호(1970년 9월)와 2호(10월), 3호(11월)의 표지(왼쪽부터).

‘대화의 가교’라는 부제가 붙은 월간 ‘다리’ 창간호(1970년 9월)와 2호(10월), 3호(11월)의 표지(왼쪽부터).

■ 김대중 홍보물 봉쇄 위한 구속사태

이런저런 불길한 징후가 겹치던 끝에 마침내 정부 당국의 탄압이 검거선풍으로 화했다. 1971년 2월11일 새벽, ‘다리’지의 주간인 윤형두(36)가 집으로 들이닥친 가죽점퍼 차림의 건장한 중년 두 사람에 의해서 ‘신한무역’이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당국자는 뜻밖에도 그 전해 11월호 ‘다리’지에 실렸던 문학평론가 임중빈(31)의 글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을 문제 삼고 나왔다. 필자인 임중빈은 2월10일에, 잡지의 발행인 윤재식(36)도 그 무렵에 별도로 연행되어 있었다.

임중빈의 그 글이 어떻단 말인가? 그때는 모든 출판물은 사전에 정부당국에 납본을 하고 검토를 거친 뒤 소위 납본증이 나와야 배포를 할 수 있는 시절이었는데, 임중빈의 위 글이 실려 있는 ‘다리’ 1970년 11월호도 아무 탈 없이 납본증이 나와서 버젓이 판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 무슨 영문일까? 윤형두가 연행당하기 이틀 전, 정보 계통에 있는 M이라는 사람이 그를 찾아왔었다.

M은 이런 요구를 했다. 임중빈이 쓰고 있는 <김대중 회고록>을 출판하지 마라. 이미 발간한 김대중의 <내가 걷는 70년대>를 더 찍지 마라.

그 밖에 김대중의 이름이 들어 있는 간행물을 일절 내지 마라. 심지어 월간 ‘다리’의 판권을 자기들이 정하는 출판사에 넘기라고까지 요구하면서 위협적인 언사도 썼다. 물론 윤형두는 그런 요구를 거절했다. 그리고 직감했던 대로 이번 검거가 바로 김대중에 관련된 탄압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윤형두, <한 출판인의 자화상>, 범우사, 2011)

김대중은 그 전해인 1970년 9월20일, 1971년 4월에 실시될 대통령선거에 나설 신민당(야당)의 후보로 선출되었고, 그런 뜻밖의 사태에 놀란 박 정권은 김 후보에 대한 감시 탄압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위의 세 사람이 구속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계 정치인으로서 ‘다리’의 후원자인 김상현은 현역 국회의원이어서 그때는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 후 형사범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은 바 있음.)

■ ‘다리’지 넘겨라, 기관원 M의 협박

이 사건으로 구속된 3명의 피의자는 모두 김대중 후보의 대선 출마 준비에 일역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당국에서 김대중계 월간지로 보는 ‘다리’의 주간이자 김대중 대선 출마를 지원하는 출판 업무를 총괄하는 윤형두, 김대중의 자서전을 집필하는 임중빈, 거기에다 구속된 또 한 사람인 윤재식은 ‘다리’지의 발행인이자 김대중의 공보비서였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단순한 필화사건이 아니라, 김대중을 표적으로 하는 정치적 탄압사건의 한 부분임이 분명했다. 윤형두에게 기관원 M이 마지막 기회라고 하면서 “이번에 걸려들면 심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외국에 나가서 공부라도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한 말이 괜한 위협이 아니었다.

1971년 2월12일, 위 세 사람은 반공법(제4조 1항, 반국가단체의 찬양 고무 등) 위반으로 정식 구속되었다. 서울형사지방법원 유태흥 부장판사가 발부한 구속영장에는 문제된 임중빈의 글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요약해놓았다.

“프랑스의 극좌파 학생운동인 1968년의 ‘파리 5월혁명’에 의한 드골 정권의 타도와 미국의 극좌파인 ‘뉴 레프트’의 타당성을 전제하면서 우리나라 학생운동은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하되, 문화혁명을 통한 정치혁명으로써의 길만이 학생운동의 정도이며, 무엇보다도 능동적 참여를 통한 변혁이 필수의 것으로 요청된다고 논단하여, 임중빈은 은연중 우리 정부 타도를 암시, 반국가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했고, 윤형두·윤재식은 이를 알면서도 잡지에 게재했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그날 서울지검(주임검사 김종건·이규명)의 신문을 받고 곧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 박정희 3선 성공 후 공판 진행

첫 공판은 세 사람이 끌려온 지 두 달쯤 되는 4월9일, 서울형사지방법원 목요상 판사 단독 심리로 열렸다. 변호인석에는 김대중 후보 측에서 선임한 것으로 보이는 홍영기·이택돈·이명환 변호사와 윤재식 피고인이 선임한 이상혁 변호사가 나와 있었다. 그런데 서울지검의 김종건·이규명 두 검사가 파리에서 모종의 참고서류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판 연기 신청을 하는 바람에 그날 재판은 공전되고 말았다. 첫 기일에는 통상 검사가 공소사실에 관해서 피고인에게 직접신문을 하는데, 나중에 증거조사 단계에서나 필요한 참고서류(증거 보강)를 이유로 공판을 연기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검찰이 지연 작전을 쓴다는 의심을 살 만했다. 더구나 그때까지도 피고인들에게는 일절 접견이 허용되지 않았고, 서적의 차입(영치)조차 금지된 상태였다. 변호인석의 이명환 변호사가 판사에게 이 점을 거론하며 그런 부당한 처사를 시정케 해달라고 요청했다.

대통령 선거(김대중 후보 낙선)가 끝난 뒤인 1972년 4월30일에 제2회 공판이 열렸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무리한 3선개헌 후에 일어났던 ‘다리’지 사건은 앞서의 여러 사실에서 간파되듯이 당시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매우 민감한 사건이었다. (국가정보원,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2007) 여기서 말하는 ‘3선개헌’이란 대통령의 중임규정을 고쳐서 3선을 가능케 하는 개헌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위한 개헌안이 나오자 야당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철야농성을 하고 있을 때, 여당 의원들만 국회 건물 건너편에 있는 국회 제3별관에 새벽 2시50분(9월14일)에 몰래 잠입하여 “이의 없지요. 예”로 전광석화처럼 몇 분 만에 처리해버렸다. 그 다음 해 4월27일에 실시된 대통령선거는 김대중 후보의 맹렬한 추격에 당황한 정부 여당의 온갖 부정이 난무한 가운데 박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사흘 만에 이 사건의 2회 공판이 열린 것이었다. (그 후 박 대통령은 10월유신을 선포하고 불법으로 헌정을 중단시킨 다음 국무회의 의결로 유신헌법을 만들어 악명 높은 유신통치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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