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치밀하고 잔인하게…죽음을 전시당한 이 고래

최명애 문화생태지리학자

테이 고래 전시

테이 고래 사진에 풍경을 합성해 만든 관광엽서.  위키피디아

테이 고래 사진에 풍경을 합성해 만든 관광엽서. 위키피디아

1883년 11월 말, 스코틀랜드 테이(Tay)강과 북해가 만나는 던디의 삼각주로 수컷 혹등고래 한 마리가 흘러들어왔다. 아마도 고래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고래였을 것이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을 잘못 찾아왔다. 당시 던디는 영국의 대표적인 포경항 중 하나였다. 매년 그린란드 북극해로 포경선단을 보내는 곳이었다. 하필이면 북극해 포경이 쉬는 겨울철이었다. 700여명의 던디 포경선원은 근질근질한 몸도 풀 겸 이 고래를 잡기 위해 일어섰다. 4주간의 숨바꼭질 끝에 마침내 포경선 ‘폴라스타’호에서 쏜 작살이 고래의 목에 꽂혔다. 세 척의 포경선이 고래를 바짝 추격했다. 저녁에 시작된 고래 사냥은 새벽까지 이어졌고, 스물두 시간의 사투를 벌였으나 포경선들은 고래를 놓치고 말았다. 자존심에 금이 간 선원들은 변명거리를 생각하며 빈 배를 돌려야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근처 스톤헤이븐(Stonehaven) 앞바다에서 작살 세 개가 꽂힌 큰 고래 한 마리가 떠올랐다. 몸길이 12m의 혹등고래. 이 일대를 떠들썩하게 한 바로 던디의 ‘테이 고래’였다. 던디의 고래기름 상인 존 우즈가 226파운드, 오늘날로 치면 1만2000파운드(약 2000만원)에 고래를 낙찰받았다. 예인선 엑셀시어호가 테이 고래를 인양해 던디항으로 돌아온 것은 이듬해 1월11일 한밤중이었다. 항구는 ‘괴수’를 보러 나온 주민 2000여명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70t의 대형 크레인이 부두에 세워졌고, 꼬리를 묶인 고래가 달빛을 받아 조금씩 몸뚱이를 드러냈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경탄을 내뱉았다. 고래는 두 대의 화물 수레로 옮겨졌고, 30마리의 말이 단단히 수레 앞에 묶였다. 고래를 실은 수레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은 고래의 영국 순회 전시

1883년 스코틀랜드 던디 앞바다에서 잡힌 테이 고래는 7개월간 영국 순회전시 끝에 던디로 돌아와 맥마너스 갤러리 및 박물관에 영구 전시돼 있다.   남종영씨 제공

1883년 스코틀랜드 던디 앞바다에서 잡힌 테이 고래는 7개월간 영국 순회전시 끝에 던디로 돌아와 맥마너스 갤러리 및 박물관에 영구 전시돼 있다. 남종영씨 제공

테이 고래의 이야기는 이 다음부터다. 이 거대한 고래의 사체는 ‘괴수 전시’로 새로운 상업적 생명을 얻는다. 때는 19세기 말. 세기말의 기묘한 광기와 인류의 기술적 진보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이 흐르던 시대였다.

파리의 해부학 박물관에서는 신체가 일그러진 기형아들을 포르말린에 담아 전시했고, 숙녀들이 손수건을 코에 대고 유리 진열장에 전시된 시체를 구경하러 모르그(영안실)들을 돌아다니던 때였다. 테이 고래는 인간이 ‘정복’한 거대한 ‘괴수’를 보여줄 기회였다. 좌초한 고래는 앞서 네덜란드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도 전시됐다. 그러나 이번은 치밀하게 계획된, 새로운 형태의 상업적 이벤트였다.

존 우즈의 집 앞마당에 전시된 테이 고래. 고래의 입을 벌려 나무 기둥으로 고정시키고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 기념사진을 찍었다.<br />던디 레저 앤드 컬처 웹사이트 캡처

존 우즈의 집 앞마당에 전시된 테이 고래. 고래의 입을 벌려 나무 기둥으로 고정시키고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던디 레저 앤드 컬처 웹사이트 캡처

테이 고래를 구입한 존 우즈는 탁월한 사업가였다. 그는 자기 집 마당에 고래를 부리고, 고래의 입을 열어 나무 기둥으로 고정시킨 뒤 유료 전시를 시작했다. 입장료는 주간 1실링, 야간엔 반값 할인해 6펜스였다. 첫 토요일 하루 동안 1만2000명이 고래를 보러 찾아왔다. 던디의 철도 회사는 고래 관광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 할인 열차 승차권과 전시 입장권을 묶은 패키지 상품을 만들어 팔았고, 지역 사진가들은 고래 입속에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하고 기념 사진을 찍어 줬다. 던디항으로 고래가 들어오는 기념 사진도 있었지만, 인기 기념품은 스톤헤이븐에 인양된 테이 고래 사진에 테이강의 일몰 풍경을 합성한 기념 엽서였다. 수완 좋은 존 우즈는 인근 병원이나 고아원의 청소년들에게는 무료로 전시장을 개방하고, 왕복 교통편도 주선해 줬다. 2주일 동안 고래 관람객은 5만명을 넘어섰다.

추운 영국 북부의 겨울이었지만, 지방이 많은 고래는 곧 썩기 시작했다. 애버딘 대학의 스트루더스 교수가 고래 해체를 맡았다. 존 우즈는 이 고래 해체를 ‘특별 이벤트’로 만들어 특별 입장료를 받고 관람객을 모았다. 브라스 밴드가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스트루더스 교수와 해부 전문가 두 명이 고래의 배를 가르는 기묘한 행사였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관람객들은 얼굴을 감싸쥐고 객석 뒤편으로 뒷걸음질쳤다. 스트루더스 교수는 고래의 척추와 갈비뼈를 조심스럽게 들어내고, 썩기 시작한 내장과 기관을 제거했다. 고래 표면이 손상되지 않게 조심하면서 뼈는 나무로, 내장과 살이 있던 자리는 짚으로 채우고, 갈라진 부분은 다시 꿰맸다. 그런 뒤 썩지 않도록 고래 전체에 석탄산을 고루 뿌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살아있는’ 테이 고래는 다시 대중 앞에 전시됐다. 이번엔 던디와 그 주변이 아니라 영국 전역이었다. 존 우즈는 특수 제작한 수레에 고래를 싣고, 수레를 기차에 매달아 애버딘으로 떠났다. 이어 스코틀랜드 중심지 글래스고, 영국 중부의 리버풀과 맨체스터까지 여행했다. 고래 사체뿐 아니라 고래를 잡은 작살도 함께 전시했고, 사람 비슷한 소리를 내도록 물범을 훈련시켜 ‘말하는 물범’ 쇼도 선보였다. 자연사 박물관, 포경 문화유산에 동물 서커스가 상업적 목적으로 결합한 기묘한 전시는 7개월간 이어졌다.

전국 순회 공연을 마치고 테이 고래가 던디로 돌아온 뒤, 스트루더스 교수는 나머지 고래 뼈를 발라내 기존의 척추, 갈비뼈와 합체시켜 완벽한 형태의 고래 골격을 만들어냈다. 밀려드는 유럽과 미국의 순회 전시 요청을 마다하고, 존 우즈는 테이 고래의 골격을 던디의 앨버트 인스티튜트에 기증했다. 테이 고래는 그 뒤로 132년째, 지금은 이름이 바뀐 던디의 맥마너스(McManus) 갤러리 및 박물관에 걸려 있다.

■미지의 ‘괴수’에서 지적인 생명체로

자동차가 던디로 진입하자 라디오에서 ‘테이 FM’이 잡혔다. 던디 앞을 흐르는 강의 이름이 테이다. 5월 중순이지만 계기판에 표시된 기온은 5도였다. 날씨도, 풍경도, 던디는 아주 보통의 영국 지방 소도시처럼 보였다. 페인트로 상호를 적은 사탕 가게와 드러그스토어 부츠, HSBC 은행, 코업(Co-Operative) 슈퍼마켓이 나란히 서 있다. 테이 고래가 아니었다면 올 일이 없었을 작은 도시다. 맥마너스 갤러리 및 박물관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시내 한가운데의 첨탑이 뾰족한 건물이다.

테이 고래는 1층 천장에 걸려 있었다. 고래잡이 작살, 고래 뼈로 깎은 조각, 향고래 기름 같은 것들이 전시된 유리 전시장 위였다. 낡고 오래된 박물관인데, 테이 고래 골격 아래에는 최신식 터치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테이 고래 포획과 전시의 역사를 지역 신문과 사료를 이용해 재구성해 놓은 장치다. 첫 화면을 눌렀다. “머리 위에 걸린 거대한 골격은 이 박물관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전시물입니다. 1883년 던디를 뒤흔들어 놓았던 혹등고래의 골격이죠.”

지금은 골격으로 남아 있는 이 고래를, 당시 던디 사람들은 ‘괴수(monster)’라고 불렀다. 고래 전시 광고에도, 테이 고래를 다룬 스코틀랜드 시인 윌리엄 맥고나갈의 시에도, 존 우즈 자신의 편지에도 테이 고래는 ‘괴수’로 표현돼 있었다. 테이 고래는 어쩌다 괴수가 됐을까.

고래 개론서인 <고래의 노래>에서 남종영은 고래와의 간헐적이고 부분적인 조우가 서양 문화권에서 고래를 ‘거대하고 신비한 괴물’로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18세기 네덜란드와 영국의 포경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고래의 몸 전체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뱃사람에게조차 고래는 뿌연 물줄기, 넓은 등, 거대한 입 등 그들이 이따금 목격한 신체의 일부분으로만 존재했다. 사람들은 이 미지의 해양 생물을 신기해하는 한편 두려워했던 것 같다. 16~17세기 네덜란드 동판화에는 고래의 좌초 장면이 묘사돼 있는데, 죽음의 천사나 월식, 일식 같은 불운과 재앙의 상징들이 함께 나온다. 고래의 좌초는 신의 분노가 표출된 불길한 사건으로 여겨졌고, 고래와 인간의 조우는 종종 재앙으로 귀결됐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구약성경의 <요나서>다. 신의 분노 때문에 요나는 고래 배 속에 들어가게 됐고, 사흘 밤낮을 회개한 끝에 살아서 나올 수 있었다.

포경은 이 미지의 괴수와 인간의 한판 대결이었다. 특히 포경이 득세한 던디에서 고래는 괴수 그 자체로 여겨졌다. 1752년 시작된 던디의 북극해 포경은 150여년간 이어졌다. 던디에서 고래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1836년에는 한 시즌 동안에만 두 척의 포경선이 박살났고, 70여명의 포경선원이 목숨을 잃었다. 포경항 던디와 포경 국가 영국에서 고래는 먼 북극의 얼음바다에서 생활하며 포경선을 뒤집는 괴수였다. ‘전리품’으로 돌아온 고래의 뼈나 기름만 봐 온 이들에게, 테이 고래 전시는 처음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실체가 낱낱이 드러난 괴수를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던디 포경선들은 북극고래를 주로 잡았고, 테이 고래는 북극해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혹등고래였지만 그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눈앞에 드러난 괴수에 열광했다. 한 점의 전시물로 존 우즈네 마당에 놓여 있는 괴수. 테이 고래 전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선망, 두려움, 무엇보다도 인간의 ‘승리’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맥마너스 박물관처럼, 지금 전 세계 많은 자연사 박물관에는 고래의 골격이 전시돼 있다. 런던 자연사 박물관에 걸린 28.3m의 대왕고래 골격은 오랫동안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 골격이었다. 이 골격을 바탕으로 석고와 나무로 만든 실물 크기의 대왕고래 모형도 함께 전시돼 있다. 모형이 제작된 1938년만 하더라도 실제 대왕고래를 본 사람이 거의 없어서 상상력을 동원해야 했다. 그 결과 모형은 실제 대왕고래보다 훨씬 뚱뚱하다.

이들 골격과 모형 앞에서 ‘괴수’를 떠올리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이들은 대왕고래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해 준 고마운 존재다. 전시물은 그대로인데 우리의 시각이 바뀌었다. 과거 우리 눈앞의 ‘괴수’들은 1960년대 이후 독특한 생태적 특성과 지능을 가진 아름다운 생명체로 바뀌었다. 인간과 동물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인간-고래의 관계 변화는, 300여년에 걸친 우리의 근대 포경이 다섯 종의 고래를 사실상 멸종위기로 몰아넣었다는 데 대한 뼈아픈 반성에서 나온다. 던디 출신의 논픽션 작가 짐 크럼리는 테이 고래를 다룬 책 <겨울 고래(The Winter Whale)>를 ‘사과’라는 챕터로 끝낸다. 고래를 바다로 풀어주지 않고, ‘살해’해서, 내장과 기관을 모두 제거하고, ‘죽음’을 전시한 과거에 대한 사죄다.

2006년 1월, 런던 템스강으로 암컷 북방짱구(병코)고래(Northern bottlenose whale) 한 마리가 거슬러 올라왔다. 수천명의 런던 시민이 타워브리지까지 올라온 이 고래를 보러 운집한 가운데, 구조대가 힘겹게 병코고래를 얕은 강물에서 구출해냈다. 그러나 바다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고래는 결국 숨졌고, 운집한 관중은 눈물을 터트렸다. 120년 전 강을 거슬러 올라온 혹등고래를 사냥해, 괴수로 전시한 바로 같은 나라에서다. 고래의 운명은 그렇게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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