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정신, 행복한 마음

의사 1명당 환자 60명…‘마음 치료’가 될까

백종우 법사사회특별위원장·경희대병원 교수

(4) 정신응급이라는 필수의료

[건강한 정신, 행복한 마음]의사 1명당 환자 60명…‘마음 치료’가 될까

‘아픔 자각’ 힘든 정신응급환자
체계적 의료복지체계 필요에도
10년간 정신과 병상 급감 추세
인권 보호·체계적 치료 힘들어
정신응급도 ‘필수의료’ 분류를

1997년 의대를 졸업하고 첫 인턴생활 근무지는 지방병원 응급실 파견이었다. 어느 주말 경찰과 함께 한 젊은 여성이 실려 왔다. 강도에게 피습을 당해 의식이 혼미한 상태였다. 외과 당직 선생님을 호출하고 응급실의 모든 의료진이 달라붙어 지혈하고 수혈을 시작했다. 혈압이 잡혀갈 때쯤 지켜보시던 어머님이 쓰려지셨다. 어머님 옷의 핏자국은 딸의 것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어머니는 목에 자상이 있었다. 딸보다 더 위험한 상태였지만 딸을 먼저 치료하라고 자신의 상처를 숨긴 것이었다. 다들 눈물을 참고 달라붙었다.

백종우 법사사회특별위원장·경희대병원 교수

백종우 법사사회특별위원장·경희대병원 교수

다행히 두 분 다 응급수술을 받고 사셨다. 그때 어머님의 눈빛과 딸을 위한 선택에 대한 기억은 오랜 여운을 남겼다. 이후에도 그와 비슷한 눈빛을 자주 보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만나게 되는 부모님들이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신체응급환자는 의식이 없어 도움을 청하지 못했지만, 정신응급환자는 자신의 병을 인식하지 못해 도움을 청하기보다 더 강하게 거절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평소와 같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환청에 이끌려 누군가를 위협하고 절망에 빠져 세운 자살계획을 시도하기도 한다. 평생 키워온 자식의 낯선 모습을 두고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선택을 해야 한다.

처음 만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이 상황에서 다른 대안이 없다며, 입원을 권유한다. 입원을 법원이나 정부가 결정하는 외국과 달리 부모에게 맡겨진 이 선택의 결과는 치명적일 수도 해피엔딩일 수도 있다. 부모의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다고 오히려 상처만 남지 않을까? 저렇게 싫다는데 치료가 될까? 결국 자식이 원하는 대로 너무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가 안타까운 사고 소식을 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신응급상황에서 대개의 부모가 바라는 것은 같다. 첫째로 낫기를 바란다. 둘째로 좋은 환경에서 치료받기를 원한다. 셋째로 앞으로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이러한 간절한 마음대로 위기가 지나가고 가족의 일상을 찾기 위해 어떤 의료복지체계가 필요할까?

정신응급치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안전한 이송과 함께 급성기 치료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전문가와 공간 그리고 신체 질환에 대한 치료기능이 핵심이다. 이러한 첫 입원을 시작하는 우리나라 병원 환경은 충분히 좋은가? 2020년 국내 첫 코로나19 사망자가 발생한 곳은 정신병원이었고 첫 사망자는 만성조현병 환자였다. 당시 열악한 만성정신병동의 환경도 충격을 주기도 했다. 보건복지부는 입원환경개선협의체를 운영해 전국적 조사를 진행하고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올해부터 시행규칙개정으로 6인실 이하로 병동 공간은 다소 개선되었지만, 그에 따른 치료환경 개선을 위한 후속 조치는 전혀 진행되고 못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의사 한 명이 20명의 환자를 보는 일반병원, 40명의 환자를 보는 요양병원과 달리 유독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60명의 입원환자를 보는 시행규칙에 묶여 있다. 한 명당 10분 면담을 하려면 10시간을 쉼 없이 일해야 하는 환경에서 당사자와 부모의 기대를 충족할 수 있을까? 한 명의 간호인력이 달라붙어 공감하여 신체적 강박 없이 위기를 넘기게 도울 수 있을까?

그 결과 그나마 치료환경이 좋은 수련 및 대학병원의 병상은 일반과의 3분의 1 수준의 수가로 2009년부터 10년간 800병상이 사라졌다. 복지부가 국회에 제출한 통계에 따르면, 4년간 정신병원 입원병상은 3000병상 감소했다. 인권과 급성기 치료를 지향하던 좋은 병원들부터 문을 닫고 의사들은 개원가로 향하고 있다.

작년 신경외과 응급수술이 필요했던 한 생명을 잃고 필수의료에 대한 재정비가 정부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정신의료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알마아타선언, 미국의 오바마케어에도 필수의료로 정의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에도 정신질환, 응급진료 등을 먼저 제공하도록 하지만 아직 정신응급은 필수의료로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

고도성장기 중증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을 격리해 수용하던 정신의료시스템은 당시에는 비인가 시설보다 나았을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대한민국에 어울리지 않는다. 조기에 발견하고 빨리 치료할수록 중증정신질환도 낫는다. 당사자와 부모들의 간절함에 화답하여 정신응급시스템이 필수의료로서 우리나라에서도 빨리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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