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위부 직파간첩 사건’ 무죄… 위법 진술조서로 ‘무리한 간첩몰이’

정희완 기자

진술거부권 등 충분히 안 알려… 심리적 억압 상태서 허위 자백

영상물 등 객관적 물증도 없어… 민변 “검·국정원, 사실상 조작”

북한군 보위사령부에서 직파돼 간첩 활동을 벌이려 했다는 홍모씨(41)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직접증거는 홍씨의 진술이 담긴 조서와 반성문 등이었다.

자신이 2012년 5월 보위부 공작원으로 선발돼 훈련을 받고 이듬해 6월 지령에 따라 탈북 브로커 유모씨(55)를 북한·중국의 접경지대로 유인해 납치하려다 미수에 그쳤고, 탈북자로 가장해 국내에 잠입해 각종 정보를 빼내려 했다는 것이다.

간첩 혐의로 기소된 홍모씨(왼쪽)가 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변호인 장경욱씨와 함께 법원 청사를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간첩 혐의로 기소된 홍모씨(왼쪽)가 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변호인 장경욱씨와 함께 법원 청사를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법원은 5일 홍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국가정보원과 검찰에서 작성한 피의자 신문 조서, 홍씨의 자필 진술서·반성문·의견서 등 모든 직접 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홍씨가 법정에서 조서에 작성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했고, 조서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작성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작된 증거로 유우성씨(34)를 간첩으로 몰아 큰 비난을 받았던 국정원과 검찰이 다시 한번 무리한 간첩몰이를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검찰이 피의자를 조사하면서 기본적인 권리도 제대로 고지하지 않아 무능한데다 반인권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6부(김우수 부장판사)는 홍씨가 검찰에서 첫 번째 조사를 받을 때 작성된 조서가 법을 어겼기 때문에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진술 내용의 사실 여부를 따질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검사나 사법경찰관은 피의자를 조사하기 전 진술거부권과 변호인조력권 등 피의자의 권리를 고지해야 한다. 재판부는 그러나 검찰이 홍씨에게 이런 것들을 사전에 충분히 알리지 않은 채 조사를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검사가 홍씨에게 진술을 거부할 수 있다고 알리긴 했으나 “진술을 거부해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라거나 “진술은 법정에서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등 법에 명시된 내용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8번째 검찰 조사에서 작성된 조서도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았다. 홍씨가 법정에서 조서의 내용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조서내용을 입증할 수 있는 영상녹화물 등 객관적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정원에서 12차례에 걸쳐 작성된 홍씨의 조서도 같은 이유로 증거능력이 부정됐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과 검찰의 수사관행을 비판했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진술에만 의존해 무리한 간첩 수사를 벌인다는 것이다. 채희준 변호사는 “출생부터 탈북까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진술서를 쓰게 한다”며 “이런 식으로 진술서를 작성케 한 뒤 국정원 수사관이 피의자 조서를 작성하고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밝혔다. 홍씨를 변호한 박준영 변호사는 “(직접 증거가) 자백뿐인 사건에서는 진술증거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이것이 사실상 조작됐다는 의미”라면서 “검사는 (홍씨가) 자기 앞에서 자유롭게 자백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훈련된 자백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합동신문센터에서 자유를 제한하는 반인권적 행태, 잔인한 폭행 때문에 자백했고 허위사실을 계속 말하다 보니까 그럴듯하게 진술하게 됐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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