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최고 디딤돌 판결은 ‘동성커플 건강보험 자격 최초 인정’ 판결

김혜리 기자

민변·경향신문 2023년 10대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경향신문이 동성 커플에게도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 판결을 올해 최고의 디딤돌 판결로 선정했다. 최악의 걸림돌 판결로는 공무원이 받는 수당을 공공부문 무기계약직 노동자에겐 지급하지 않는 것을 ‘차별적 처우’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을 꼽았다.

올해 최고 디딤돌 판결은 ‘동성커플 건강보험 자격 최초 인정’ 판결

‘2023년 10대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위원회’는 민변 각 위원회 등에서 추천받은 각급 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결정을 심사해 21개의 디딤돌·걸림돌 판결을 선정했다. 지난해 11월1일부터 올해 10월31일까지 나온 판결과 결정을 대상으로 했다. 사건의 특징, 기존 판례와의 차이, 사회에 미친 영향, 인권 증진 기여 정도 등을 주요 심사 기준으로 삼았다.

선정위원장은 김남준 변호사(민변 전 사법위원회 위원장)가 맡았다. 김소리 변호사(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월간변론 편집위원), 랄라 활동가(다산인권센터), 민선 활동가(사랑방), 오동석 교수(아주대학교), 유승익 교수(한동대학교), 이종훈 변호사(민변 사무차장), 이지현 사무처장(참여연대), 장예정 사무국장(천주교인권위원회), 김혜리 기자(경향신문)가 선정위원으로 참여했다.

민변은 4일 ‘한국인권보고대회’를 열어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 결과를 발표하고, 주요 인권 현안에 대한 토론회를 진행한다.

원심 깨고 ‘동성커플 건강보험 자격’ 처음 인정··· “법원 책무는 소수자 권리 보호”

동성 커플 소성욱·김용민씨가 지난 2월21일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달라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뒤 기뻐하고 있다. 김희진 기자

동성 커플 소성욱·김용민씨가 지난 2월21일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달라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뒤 기뻐하고 있다. 김희진 기자

서울고법 행정1-3부(재판장 이승한)는 지난 2월 소성욱씨가 “동성인 배우자도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로 인정해달라”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을 뒤집고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동성혼이 법제화되지 않은 한국에서 동성 커플의 사회보장제도상 권리를 처음 인정한 판례였다.

소성욱씨와 김용민씨는 ‘결혼 5년차’ 부부다. 이들은 동성커플이라는 이유로 부부의 법적 지위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소씨는 2020년 2월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인 김씨의 피부양자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후 공단은 8개월 만에 소씨의 피부양자 등록이 착오였다며 취소했다. 이에 부부는 실질적인 혼인 관계임에도 동성이란 이유로 사실혼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피부양자 자격을 박탈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소송에 나섰다. 1심은 혼인은 ‘남녀의 결합’이라 둘의 사실혼 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2심 재판부도 소씨 부부의 사실혼 관계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소득이나 재산 없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의미나 목적을 고려한다면 사실혼 배우자와 마찬가지로 정서적·경제적 생활공동체를 꾸린 동성 커플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소씨에게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자의적 차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이어 “세계 각국과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사법적 관계에서조차 성적 지향이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며 “사회보장제도를 포함한 공법적 관계를 규율하는 영역에서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할 것”이라고 밝혔다.

선정위원들은 이 판결을 최고 디딤돌 판결로 꼽았다. 만장일치였다. 선정위는 “법원이 동성커플의 법적 지위를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라며 “동성 간 사실혼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소수자의 권리 보호가 인권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임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전경. 권도현 기자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전경. 권도현 기자

강제퇴거 대상 외국인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하는 법 조항은 헌법에 어긋난다고 한 헌재 결정도 디딤돌 판결에 선정됐다. 헌재는 보호(구금) 기간에 상한을 두지 않아 강제퇴거 대상자를 무기한 구금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되며, 구금의 개시나 연장 단계에서 공정하고 중립적인 기관에 의한 통제절차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보호기간의 비합리적인 장기화와 불확실성으로 야기되는 피해를 방지해야 하지만, (해당 법 조항은) 행정의 편의성과 획일성만 강조해 피보호자의 신체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했다”고 판단했다.

선정위는 “문제의 조항으로 10개월 된 아동이 2개월간 구금되거나 제대로 된 조력을 받지 못한 채 4년 이상 구금되는 등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한 바 있다”며 “이번 결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더 이상 외국인을 무기한 구금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헌재가 해당 조항이 합헌이라고 한 2016, 2018년 결정을 뒤집고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점도 높게 평가했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한 판결도 디딤돌 판결로 꼽혔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2월 베트남인 응우옌 티 탄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불법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 판결은 대한민국이 베트남전 참전국이었음을 명시한 점, 민간인학살 피해자에 대한 배상 책임을 국가에 묻게 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응우옌 티 탄(63)씨가 지난2월7일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뒤 화상통화로 기자회견에 참여하고 있다. 응우옌 씨는 “뛸듯이 기쁘다”며 “학살된 영혼들이 이제 안식할 수 있다”고 전했다. | 화상통화 캡쳐

응우옌 티 탄(63)씨가 지난2월7일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뒤 화상통화로 기자회견에 참여하고 있다. 응우옌 씨는 “뛸듯이 기쁘다”며 “학살된 영혼들이 이제 안식할 수 있다”고 전했다. | 화상통화 캡쳐

경찰이 위법하게 시위를 진압한 경우 최종 지휘권자에게 형사책임이 있다고 본 대법원 판결도 디딤돌 판결로 꼽혔다. 고 백남기 농민은 2015년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는데, 대법원은 구은수 당시 서울경찰청장이 총괄 책임자로서 지휘권이 있었음에도 이를 적절히 행사하지 않았다며 형사책임(주의의무 위반)을 인정했다. 최종 지휘권자가 형사책임을 지는 선례를 만든 것이다. 이 판결로 인해 안전사고가 예견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책임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 기대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밖에도 ◇대통령 집무실을 관저로 보아 경찰이 행한 집회금지통고처분을 취소한 판결 ◇공정방송을 목적으로 한 2012년 MBC 파업은 정당하다며 노동조합 집행부의 무죄를 확정한 대법원 판결 ◇CJ대한통운이 택배노조와의 단체교섭을 거부한 것은 부당노동행위라고 본 판결 ◇미성년 자녀가 있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을 허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강제추행죄 구성요건인 폭행·협박의 범위를 확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정보주체가 개인정보보호법상 식별가능정보에 대해 가명처리 정지를 요구할 수 있다고 본 판결이 디딤돌 판결로 선정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2차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2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손을 들며 법원을 나서고 있다. 2023.11.23 문재원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2차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2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손을 들며 법원을 나서고 있다. 2023.11.23 문재원 기자

선정기간 후 선고됐지만 시의성과 중요성을 고려해 추가로 선정된 디딤돌 판결도 있다. 서울고법은 지난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해당 판결은 ‘위안부’ 피해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항소심에서 처음 인정한 사례로 매우 유의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1대 디딤돌 판결에는 선정되지 못했지만 비정규직·소수자 문제를 다룬 하급심 판결들도 후보에 대거 포함됐다. 현대자동차가 파업한 노동자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노조와 개별 조합원의 책임 범위를 동일하게 볼 수 없다고 한 대법원 판결, 장애인 당사자의 요청에 따라 판결 이유를 쉽게 풀어쓴 서울행정법원 판결 등도 의미있는 판결로 주목받았다.

대법 “공공부문 무기계약직 수당 미지급, 차별 아니다” 올해 최악의 걸림돌 판결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경향신문 자료사진

최악의 걸림돌 판결로는 공공부문 무기계약직과 공무원 간 차별이 균등대우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본 대법원 판결이 만장일치로 꼽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9월 공공부문 무기계약직 노동자에게 공무원이 받는 수당을 주지 않는 것은 근로기준법이 금지하는 차별적 처우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근로기준법은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한 차별적 처우를 금지하는데, 무기계약직은 ‘사회적 신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무원과 무기계약직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비교집단으로 삼을 수 없다고도 했다.

선정위원들은 “공공부문 무기계약직 노동자는 차별에 대한 시정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규정이 헌법과 근로기준법인데 (이 판결로) 그 규범력이 후퇴하는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했다”면서 “근로 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 행위를 적극 인정해 무거운 비판을 받을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0월26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군인권센터가 ‘형법 92조의6 관련 군인권센터 지원 사건 12건 헌법재판소 선고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정효진 기자

지난 10월26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군인권센터가 ‘형법 92조의6 관련 군인권센터 지원 사건 12건 헌법재판소 선고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정효진 기자

군대 내 동성애를 처벌하는 군형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본 헌재 결정도 걸림돌 판결로 꼽혔다. 군형법 92조의6은 군인·군무원 등이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하면 2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는데, 합의에 의한 남군 간 성관계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해 성소수자의 평등권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지난해 대법원은 동성 군인이 사적 공간에서 합의 하에 성관계를 맺었다면 군형법 추행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올해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받았는데, 헌재는 2002년, 2011년, 2016년에 이어 4번째 합헌결정을 내렸다. 선정위는 헌재가 역사적 과오를 바로잡을 기회를 저버리고 심대한 인권침해 상황을 또다시 연장하는 퇴행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혹평했다.

이 밖에 ◇세월호참사 구조실패 해경지휘부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한 대법원 판결 ◇이상민 장관에 대한 탄핵 심판청구를 기각한 헌재 결정 ◇외국인에게 선별적으로 HIV 검사를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 대법원 판결 ◇국가보안법 7조 합헌 결정 ◇아동학대특례법 시행 이전 피해자가 성인이 된 경우 공소시효 정지 규정이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 대법원 판결 ◇소수자 혐오 종교방송에 대한 방통위 제재조치명령을 취소한 서울행정법원 판결 ◇코호트격리사망자 국가 손해배상청구 기각 1심 판결 등이 10대 걸림돌 판결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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