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자료제출 거부한 정성식 교사 "교사 현실적 어려움 이해해야"

교실에 설치된 TV모니터에 들판에 핀 민들레꽃 한 송이가 찍힌 사진이 떴다. “자, 지금부터 윤하의 마음을 읽으면 돼. 윤하가 왜 이 장면을 골랐을까? 2분 안에 각자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보자. 정답은 없는 거야. 친구의 마음을 읽으면 돼.”

정성식 교사(47·전북 익산시 이리동남초등학교·사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각자 떠오르는 문장을 공책에 적었다. 집중력은 그러나 채 10분을 가지 못했다. 갑자기 태권도 동작을 하며 교실을 돌아다니는 아이가 등장했다. 연필로 칫솔질을 하며 소리를 내는 아이, 책상을 주먹으로 치는 아이, 몸을 아예 뒤로 돌려 잡담하는 아이까지 등장했다. 정 교사는 “일반적인 1학년 교실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의원 자료제출 거부한 정성식 교사 "교사 현실적 어려움 이해해야"

그는 현재 실천교육교사모임 초대 회장을 맡고 있다. 최근에는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를 앞둔 지난 10월 6일부터 ‘의원실 요구자료 거부운동’을 벌였다. 현행법상 국회의원 개인에게 각종 자료 제공을 할 근거가 없으므로 자료 제공을 거부하고, 의원실에 항의전화를 하자고 독려했다. 실천교육교사모임 이름으로 청와대 국민청원도 넣었다. 청원은 18일 현재 7367명이 동의한 상태다.

국감철마다 교사에게 떨어지는 공문은 수십 건에 달한다. 2014년에는 80건, 2015년 62건, 2016년 42건, 2017년 63건, 국감 전인 지난 10일 기준 20건의 자료 제공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긴급]이라는 머릿글이 달린 각종 공문들이 교사들에게 쏟아진다. 학생들을 돌보고 교과연구를 해야 할 교사들이 행정업무에 치여 옴짝달싹을 할 수 없다”면서 “법적 근거도 없는 무분별한 자료 요청을 매년 교사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을 누군가는 지적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교사들이 의원실을 상대로 거부운동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매년 국정감사만 앞두면 수십 건의 자료 제공 요청이 쏟아지는데 도대체 뭘 근거로 의원들이 이런 요청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국회법 제128조를 비롯해 각종 근거 법들을 찾아보니 자료제출 요구권한이 의원 개인에게 있는 게 아니라 본회의, 위원회 또는 소위원회에 있었다. 또 국정감사를 위한 서류제출 요구시에는 의결 또는 재적위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로 할 수 있도록 돼 있었다. 교사들은 지금껏 의무 없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들인 셈이다. 한 의원실에서 농구공 브랜드별 보유 현황 자료 제공 요청을 하니 학교에서 진풍경이 벌어졌다. 각 교실에 비치돼 있는 농구공을 전부 강당으로 가져오라는 방송이 나오고, 선생님들은 ‘그 농구공이 어디에 있지’ 하면서 하나하나를 찾아 강당에 갖다놓으면 그걸 또 브랜드별로 분류하고 있다. 수업준비만으로도 빠듯한 시간에 국정감사 자료 챙기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청와대 청원도 실천교육교사모임 이름으로 나갔던데 회원들 전체의 동의를 얻은 것인가.

“먼저 제안을 했다. 우리는 각종 성명이나 의견을 낼 때 일정 기준이 있다. 활동의 기반은 페이스북이다. 나를 비롯한 집행부의 의지로 어떤 일을 추진하기도 하지만 일반회원들도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제안을 한다. 현재는 어떤 제안을 했을 때 동의하는 경우 ‘좋아요’를 누르고, 그 숫자가 만 하루 동안 100개를 넘어야 추진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좋아요’ 100개가 쉬운 일은 아니다. 청와대 청원도 처음 페이스북에 제안했을 때 많은 선생님들이 동의해서 가능했다. 부득부득 우겨서 뭔가를 추진하면 회원들은 대거 이탈한다. 우리 단체는 위아래의 개념이 없다. 집행부가 하달하고 하부조직이 수행하는 형태가 아니다.”

의원 자료제출 거부한 정성식 교사 "교사 현실적 어려움 이해해야"

-집행부는 어떻게 선출되나.

“하고 싶으면 한다. 현재 우리는 7개의 팀으로 구성돼 있다. 팀장에게는 자동으로 이사 권한이 부여된다. 누구나 팀장이 될 수 있다. 요건을 갖춰 ‘어떤 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하면 계획을 갖고 오면 된다. 요건을 갖춰서 기존 이사회 승인을 받으면 된다. 조건은 있다. 정관에 비춰봤을 때 공공의 목적에 부합하면서 모임의 이득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 회계도 팀별로 독립적으로 운영한다. 다만 집행부 간부는 반드시 현직교사가 맡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실천교육교사모임은 교원단체로 설립된 지 만 3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단체다. 그동안 내놓은 성과가 있나.

“지난해에는 교육부 특별사업을 분석해서 없앴다. 외부에서는 잘 모르지만 ‘100대 교육과정’이라는 것이 있다. 각 학교별로 ‘우리 학교는 이런 것이 우수합니다’라는 우수사례를 내놓는 것이다. 현장 교사들은 치를 떠는 사업이다. 아이들에게도, 교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것을 지난해 없앴다. 물론 미시적인 부분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교사들은 이런 미시적인 일들 때문에 힘들다. 디지털 교과서 추진, 교육부 차원의 연구학교, 학교 스포츠클럽 대회 등 6개의 대표적인 사업을 없앴다. 우리는 현장 교사 80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여 그 결과물을 근거로 교육부에 사업 폐지 요구를 했다. 스승의 날 폐지 청원도 실천교육교사모임 소속 선생님이 제안하고, 국민청원도 들어갔었다. 현재는 현장 교사들이 회계지침분석 특별위원회를 꾸려 학교 현장에서부터 교육청, 교육부로 순환되는 돈의 흐름을 분석해 각종 예산들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파악하고 있다.”

-교육현장을 교사가 주도해서 가져가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맞다.”

-전교조 초창기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렇게 말씀하는 분도 있고, 비판적으로 보는 분들 중에는 ‘전교조와 뭐가 다르냐’는 분도 있다. 우리는 교원단체로서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부분을 향해 같이 노력할 뿐이다. 나도 전교조 조합원이지만 노동운동으로서의 교육은 분명 일정한 한계가 있다. 비슷한 점도 있겠지만 전교조는 노동조합이고, 우리는 학술단체·연구모임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마지막으로, 왜 실천교육교사모임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보나.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이지 않을까. 교사들마다 문제인식이 있었지만 그것을 함께 고민하고 소통할 창구가 그동안 없었다. 전교조를 비롯해 교육운동단체들이 큰 역할을 해온 것은 사실이나 상명하달식 조직 운영, 투쟁 일변도의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실천교육교사모임은 교사들의 ‘플랫폼’ 역할을 한다는 데에 기존 단체들과의 차별점이 있다. 그게 모임을 만들고 꾸려가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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