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는 얼마나 공정한가(하)

세 살부터 대학 학비 2배 영어학원 다닌 그들…‘노력’으로 따라갈 수 있나

이하늬 기자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탄희 의원실 공동기획

능력 격차는 영·유아기부터

서울 용산구에 사는 A씨의 자녀는 영어유치원을 거쳐 외국인학교에 다닌다. A씨는 자녀 학비로만 1년에 3300만원 정도를 쓴다. 4년제 대학 연간 등록금(지난해 1월 기준 674만원)의 5배 수준이다. A씨는 “학비 외에 추가로 드는 돈도 있어 매우 비싸지만 국제바칼로니아(IB) 프로그램을 이수한다는 것은 굉장한 메리트”라며 “단순히 영어학원을 보내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IB는 국제학위협회(IBO)에서 운영하는 국제 표준 교육 프로그램이다. A씨 자녀가 다니는 학교 졸업생 대부분은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한다. A씨는 “학교에서 지식적인 면은 물론 정서적인 부분까지 개별 학생에 맞춰 보충을 해주는 게 좋다”고 말했다. A씨 자녀가 받는 교육과 그로 인해 얻게 될 능력은 공정하게 주어진 것일까. 다른 아이들도 노력하면 A씨 자녀와 같은 생애 단계를 밟을 수 있을까.

■ 3세부터 가구소득에 따른 격차

3세부터 아동 집안 경제력 따라
인지·비인지능력의 격차 존재
영·유아기 지나면 투자 효과 낮아

이 같은 물음에 대해 국내외 다수 연구는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영·유아기에 형성된 ‘인적자본’은 생애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며, 이후에도 격차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능력’은 교육, 직업, 소득, 사회적 지위로 연결된다.

문제는 집안의 경제력에 따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능력에 차이가 생긴다는 점이다. 권성준 한국조세재정연구원 부연구위원의 ‘영·유아기 인적자본 격차의 지속성에 관한 소고’ 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3세부터 가구소득에 따른 인지능력 및 비인지능력의 격차가 존재한다. 인지능력은 사고력·언어력·창의력·학습능력 등을, 비인지능력은 공감능력·사교성·자기통제력 등을 말한다. 이런 인지·비인지 능력의 격차로 저소득가정 아동은 고소득가정 아동에 비해 정서불안,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반항행동 등 문제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고 권 부연구위원은 분석했다.

실제 육아정책연구소가 2012년 만 2세 아동이 있는 1802가구를 분석한 결과 근육운동이나 사회성에는 가구소득에 따른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의사소통능력과 문제해결력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의사소통능력의 경우 고소득가정 아동의 평균값은 54.25였으나 저소득가정 아동은 50.94로 나타났다. 또 문제해결력 평균값은 고소득층 아동이 54.64, 저소득층 아동이 53.42였다.

영·유아기의 능력은 이후 ‘투자 효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영·유아기 단계에서 교육 투자가 부족하면 능력의 수준이 낮게 형성돼 이후 투자를 한다 해도 효과가 적다는 것이다. 김기헌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유아에서 초등, 중등, 고등 교육으로 넘어갈수록 투자비용이 증가한다”고 설명했다.

■ 지역·소득에 따른 분리교육

유아 대상 영어학원, 강남 집중
보편 교육에 기반 둔 능력주의
공정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듯

영·유아기에 만들어지는 능력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2년과 2013년 시작된 누리과정이 대표적이다. 누리과정은 만 3~5세 아동에게 공통적으로 제공하는 교육·보육 과정이다. 학부모의 교육·보육 부담을 완화하고자 도입됐다. 정부는 국공립유치원은 1인당 월 13만원, 사립유치원과 어린이집은 1인당 월 33만원을 지원한다. 이로 인해 공교육 밖에 있던 아동 상당수가 공교육 내로 진입했다. 2001년 유치원 취원율과 어린이집 이용률은 각각 27.2%, 28.8%에 불과했지만 2019년 유치원 취원율과 어린이집 이용률은 각각 47.8%, 50.1%까지 올랐다.

그러나 영·유아기 능력 격차는 줄지 않고 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생애초기 교육불평등’(2018) 연구에서 “공교육은 보편 단계에 진입해 사회계층 간 격차가 줄었지만 사교육은 줄지 않고 있으며 계층 격차 또한 크게 벌어져 있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2019년 서울시 유아 영어학원을 분석한 결과, 지역과 소득에 따른 격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의 유아 대상 영어학원 288개 중 55.9%가 ‘사교육 과열지구’인 강남·서초(84개), 강동·송파(52개), 강서·양천(25개) 지역에 있었다. 영어학원 월평균 학원비는 약 106만5000원, 서울에서 가장 비싼 곳은 월 224만원이었다. 1년 단위로 환산하면 월평균 학원비는 1278만원, 가장 비싼 영어학원은 2692만원에 달한다. 이는 각각 4년제 대학 연간 등록금(674만원)의 1.9배, 4배 수준이다.

유아 대상 수학·과학 학원의 지역 분포도 비슷하다. 서울의 유아 대상 수학·과학 학원 117개 중 37개(31.6%)가 서초·강남에 집중돼 있으며, 강동·송파와 강서·양천 지역에 각각 15개(12.8%)가 있다. 월평균 학원비는 17만1000원, 가장 비싼 곳은 53만5000원이었다. 홍민정 사걱세 대표는 “특정 지역과 고소득계층 중심의 분리교육이 진행되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 기회의 평등? 능력주의의 착시효과

발달 격차 완화 위한 지원 필요
영·유아기 공교육의 질을 높여야

1970~1980년대 교육은 계층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했다. 이런 경험은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다. 경기도교육원은 ‘평등교육실천론’ 연구에서 “이는 개인의 교육적 성취에 따른 차별적 대우를 공정한 것으로 인식하도록 했다. 기회만 균등하게 주어진다면 누구든지 노력을 해서 사회이동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영·유아기에 만들어진 능력이 생애 전반에 지속된다는 다수 연구와 지역·소득에 따른 영·유아기 교육 격차를 볼 때 능력주의는 공정하다고 하기 어렵다. 정원식 교사는 “보편화된 학교 교육은 기회의 평등을 실현한 것 같은 착시효과를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31조 1항 역시 ‘공정’하지 않다.

전문가들은 능력주의에 대한 고찰과 동시에 현실에서 영·유아기 능력 격차를 줄이기 위한 실질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저소득층 영·유아에 대한 지원은 의료비나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이기 때문에 능력 발달 격차를 좁힐 수 없다는 것이다.

육아정책연구소에 따르면 영·유아 월 양육비용(2018년 기준)은 소득분위 1분위는 61만원, 3분위 73만원, 6분위 91만원, 9분위 106만원으로 가구소득에 따라 오른다. 소득분위가 높을수록 고소득가구에 속한다. 특히 양육비용 중 교육·보육비는 가구소득 299만원 이하 가구가 17만2000원인 데 비해 가구소득이 600만원 이상인 가구는 49만7000원으로 3배 가까운 차이를 보였다.

권 부연구위원은 “식비와 보건의료비는 가구소득에 따른 큰 차이가 없었지만 가구소득이 높아질수록 교육·보육비와 여가문화생활비는 일관되게 상승한다”며 “영·유아기 발달 격차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교육, 보육, 체험학습, 완구, 도서 등에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유아기 공교육 격차를 줄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모두 누리과정을 적용하고 있지만 교사 양성 과정, 관리 시스템 등은 다르다. 홍 대표는 “이 과정에서 격차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집·유치원을 통합해 영·유아기 공교육의 질을 상향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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