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불리지 않는 이름…내일은 ‘내 일’을 알 수 있을까

이보라 기자

인력시장 일용직 노동자 정호창씨의 삶과 꿈

올해 폭염에 일자리 ‘기근’ 땀 샤워해도 ‘노가다 살’

‘장기고용’ 바라지도 않아, 중개수수료 부담도 커…P2P 구직 앱 개발됐으면

오늘도 불리지 않는 이름…내일은 ‘내 일’을 알 수 있을까

오늘도 일터로 가지 않았다. 어차피 이름이 불리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정호창씨(50·사진)는 하루 하루 선택받아야 일을 할 수 있는 일용직 노동자다. 그는 지난 23일 공사현장 대신 광주광역시의 한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냈다. 유례없는 폭염이 찾아온 뒤 일감은 뚝 떨어졌다. 일을 쉰 지 벌써 한 달째. 지난해보다 두 배나 긴 ‘보릿고개’다.

정씨는 다른 동료에 비해 그나마 운이 좋다. 맞벌이하는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용직 일을 하러 오는 60대 노인들을 볼 때 정씨는 체력적으로 자신감이 충만하다. 하지만 일은 없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줬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됐다’라는 시구가 있다. 직업대기소로부터 이름이 불리지 않은 그는 ‘꽃’이 되지 못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돌아가는 ‘하루살이’다.

오늘도 불리지 않는 이름…내일은 ‘내 일’을 알 수 있을까

■ 선택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정씨의 하루는 남들보다 이르다. 새벽 4시에 무거운 눈꺼풀을 든다. 수면시간은 3시간30분에서 4시간에 불과하다. 버스를 타고 30분 남짓 가면 새벽 5시쯤 광주의 한 직업대기소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정씨처럼 일을 찾으러 나온 동료들이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100명가량 대기하고 있다. 초조함과 조바심으로 두 시간 정도를 보내고 나면 선택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간에 희비가 교차한다. 자신의 이름이 명단에 오르는 ‘행운’을 얻으면 오전 8~9시부터 현장에 나가 8시간 동안 일을 할 수 있다.

일용직 노동자에게 봄과 가을은 ‘풍년’의 계절이다. 일감이 꽤 있어 대다수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여름과 겨울은 사정이 좋지 않다. 정씨는 “여름엔 일용직 구직자의 30%, 겨울엔 10%만이 일을 얻는다”고 했다. 나머지는 일찍 나온 보람 없이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한다.

특히 이번 여름은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기근’과 다를 바 없다. 살인적인 폭염으로 일감이 더욱 줄었기 때문이다. “하루 나가봤는데 일이 없어 그 주는 아예 안 갔어요. 어차피 일이 없을 거니까. 일을 구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올 때 드는 자괴감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 ‘땀 샤워’는 기본…직업병은 ‘노가다 살’

일을 구해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일을 하면 하루 종일 ‘땀’으로 샤워를 한다고 정씨는 말했다. “그나마 지난해 여름엔 땀으로 젖은 옷에서 수분이 날아갈 때 시원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올해는 너무 더워서 젖은 옷마저 뜨거웠어요.”

땀을 너무 흘리다 보면 ‘이러다 곧 죽겠구나’ 싶은 순간이 온다. 정씨는 “그럴 때는 그늘에서라도 쉬거나 일을 며칠간 쉬면서 컨디션을 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일을 하려면 유일한 재산인 몸을 지키는 것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땀을 통해 배출된 전해질 등을 보충하기 위해 영양제도 섭취해야 한다. “약국에서 파는 손톱만 한 알약이 있어요. 보통 한 개만 먹는데 우린 두 개를 먹어야 해요. 안 그러면 못 버텨.”

무거운 자재를 옮기는 등 체력 소모가 큰 일이기에 부상은 물론 직업병도 많다. 이른바 ‘노가다 살’이란 것도 있다. “몸이 먼저 알아버려요. ‘아, 오늘도 하루 종일 땀을 흘리겠지, 힘을 많이 쓰겠지.’ 그러면 몸이 열량을 안 태우는 거예요. 그게 날마다 축적되면 땀을 흘리고 일하는데도 살이 안 빠져요.”

■ 바라는 건 하나, ‘내일’을 알 수 있는 삶

정씨가 바라는 것은 장기 고용이 아니다. 단지 ‘내일’ 일할 수 있을지 여부를 전날 미리 알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만 알아도 여유가 생기죠. 새벽에 일어나 직업대기소에서 허탕치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요. 삶이 달라질 겁니다.”

정씨는 “사용자와 노동자가 직접 채용·구직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P2P(개인 간 거래) 애플리케이션이 개발되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 내일 일자리 여부를 하루 전에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직업대기소가 노동자의 일당 10만~15만원에서 떼가는 중개수수료 10%도 낼 필요가 없을 것이란 바람에서다.

정씨는 일용직 노동자의 경우 주휴수당을 받을 수 있는 조건도 너무 까다롭다며 정부의 보호 정책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애플리케이션이라도 만들어 달라고 청와대 국민청원에 직접 제안했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에요.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일용직 일은 누군가가 해야 할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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