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보고 받고 묵인했다”…6·25때 군·경 ‘좌익 학살’ 美도 책임

워싱턴 | 김진호특파원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한국군 및 한국 경찰에 의해 자행된 좌익사범 집단사살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묵인·방관했을 뿐 아니라 조건부 승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AP통신은 5일 서울발 기사에서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여름과 가을에 저질러졌던 집단사살로 인해 최소 10만여명이 아무런 혐의나 재판과정 없이 총살당했다면서 이같이 보도했다.

지난 5월 대전보도연맹 사건을 집중 재조명했던 AP통신은 이번 특집에서 한국전 당시 미국의 입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통신에 따르면 특히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갖고 있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당시 곳곳에서 벌어진 좌익사범 무단처형을 보고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50년 8월 도쿄에 머물고 있던 맥아더 장군은 대구 인근에서 처형된 200~300명 가운데 여성과 12세 또는 13세 소녀도 포함됐다는 보고를 받고 남한 경찰의 ‘극단적인 잔인함’에 대해 언급했던 것으로 AP통신이 발굴한 미 육군 1급비밀 보고서에서 드러났다. 맥아더 장군은 그러나 존 무초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관련 사실을 전했을 뿐 이를 중단시키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에 파견됐던 국무부 관리 세발드는 12월19일자 전문에 맥아더 사령부는 ‘남한 내부의 문제’로 보고 있으며, 행동을 유보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대량학살의 비극은 50년 6월29일 남쪽으로 후퇴하던 한국군 및 미군 고문관들이 북한군이 서울 시내 교도소 수감자들을 징발했다는 보고를 접하면서 시작됐다. 미군 군사고문관 롤린스 에머리히는 부산 시내에 수감 중이던 3500명을 즉각 처형하려고 하는 한국군 대령에게 북한군이 부산 외곽까지 진군해온다면 기관총으로 수감자들을 사살하라고 말함으로써 사실상 승인했다. 같은 해 7월1일 공군 첩보장교 도널드 니콜스는 수원에서 1800명의 수감자가 처형되는 장소에 입회해 사진을 찍었다고 81년 출간한 회고록에 기록했다.

당시 영국 공산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밍턴은 대전지역의 경우 7월1일부터 사흘 동안 집단처형이 자행됐으며, 지프에 탄 미군 장교들이 학살을 지켜보았고, 중앙정보국(CIA) 및 미군 첩보대는 늦어도 7월3일 이를 상부에 보고하면서도 미군이 입회 또는 감독했다는 사실은 빠뜨렸다고 전했다. 영국 주재 미국대사관은 되레 ‘데일리 워커’의 대전 집단처형 보도에 대해 ‘조작극’이라고 비난했다.

미국의 책임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미국의 인지 사실을 털어놓은 익명의 미 육군 퇴역중령(81)은 AP통신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주권이 있었으며, 책임은 한국인들에게 있다는 데 한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는 이에 대해 “미국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전학살극을 은폐했다”면서 미국의 책임론을 지적했다.

안병욱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은 “미 육군 관련 사례들에 대한 조사를 끝낸 뒤 미국 정부에 대해 자체 조사를 벌일 것을 권고할 계획”이라고 통신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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