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구조' 돼지 새벽이, 생추어리 가다…'고기'와 다른 삶 꿈꿔도 될까요

이보라 기자
동물권단체 DxE 코리아가 지난해 7월23일 경기도 화성시의 한 돼지농가에서 돼지 ‘새벽이’를 구출하고 있다. DxE 코리아 제공

동물권단체 DxE 코리아가 지난해 7월23일 경기도 화성시의 한 돼지농가에서 돼지 ‘새벽이’를 구출하고 있다. DxE 코리아 제공

국내 최초 '구조' 돼지 새벽이, 생추어리 가다…'고기'와 다른 삶 꿈꿔도 될까요

고구마와 찐 감자, 바나나를 좋아한다. 오렌지 같은 신 과일은 먹지 않는다. 코로 흙을 파낼 때면 신난다. 땅을 밟을 때면 매번 코가 흙범벅이 된다. 옷 입기를 죽을 만큼 싫어한다. 추워도 품에 안겨 벌벌 떠는 쪽을 택한다. 부엌에만 가면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친다. 음식을 얻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는 ‘고집불통’이다. 국내 최초로 ‘구조’된 돼지 ‘새벽이’의 이야기다.

새벽이는 지난해 7월 초 경기도 화성시의 한 돼지농가에서 태어났다. 그해 7월23일 새벽, 돼지농가의 분만사(分娩舍)에서는 엄마 돼지들이 철창에 갇혀 꼼짝도 못한 채 누워 있었다. 새벽이는 다른 아기 돼지들처럼 엄마 돼지 옆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필사적으로 젖을 찾는 소리였다. 동물권단체 ‘DxE(Direct Action Everywhere) 코리아’가 찾은 분만사는 악취가 코를 찔러 속이 울렁댈 정도였다고 한다. DxE가 촬영한 영상을 보면 바닥에는 오물과 쓰레기, 이미 죽은 아기 돼지들이 널브러져 있다.

동물권단체 DxE 코리아가 지난해 7월23일 경기도 화성시의 한 돼지농가에서 돼지 ‘새벽이’를 구출하고 있다. DxE 코리아 제공

동물권단체 DxE 코리아가 지난해 7월23일 경기도 화성시의 한 돼지농가에서 돼지 ‘새벽이’를 구출하고 있다. DxE 코리아 제공

DxE는 이때 새벽이와 또 다른 돼지 ‘노을이’ ‘별이’를 ‘공개 구조’했다. 별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노을이도 이내 숨졌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새벽이는 현재 한 보호소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하루에 0.5㎏씩 체중이 늘더니 어느덧 90㎏으로 불어났다. 새벽이는 생후 6개월이면 ‘고기’가 돼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다. 이제는 본래 수명대로 10~15년은 거뜬히 살아갈 것이다.

사람들은 최근 새벽이의 새 보금자리를 준비 중이다. 이달 말 정비가 마무리되는 대로 입주한다. 몸집이 커진 새벽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 옮긴다. 입주 비용은 후원으로 마련하고 있다. 새벽이가 입주하면 국내 최초 ‘생추어리’(Sanctuary)가 탄생한다. 생추어리는 공장식 축산 환경과 반대되는, 농장 동물의 안식처라는 뜻이다. 미국과 유럽 등 해외에 많다. 동물이 평생 가능한 한 온전하게 살아가는 공간이다.

■ “동물이 주인, 여러분이 방문객입니다”

11일 오후 자원봉사자들이 돼지농가에서 구출된 돼지 ‘새벽이’의 생추어리가 마련될 모처의 한 공터에서 새벽이가 몸을 비빌 통나무를 심고 있다. / 권도현 기자

11일 오후 자원봉사자들이 돼지농가에서 구출된 돼지 ‘새벽이’의 생추어리가 마련될 모처의 한 공터에서 새벽이가 몸을 비빌 통나무를 심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지난 11일 오후 모처에 위치한 생추어리 정비 현장을 찾았다. 봉사자 30여명이 목장갑을 끼고 정비를 시작했다. 청소, 삽질, 모종 심기, 진흙 조달 등으로 역할을 나눴다. 생추어리를 지을 땅은 330㎡(100평) 정도. 땅 주변에는 초록색 울타리를 쳤다. 잡초가 무성히 자랐고 곳곳에는 작은 돌들이 박혀 있는 휑한 공간이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닭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비닐하우스에서는 닭들이 자유롭게 다닌다. 이곳 역시 나름의 생추어리다. 옆 집 주인의 개 서너 마리가 정비 현장에 구경 나왔다. 봉사자들에게 꼬리를 흔들며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개 ‘똑순이’는 잡초 위에 드러누워 등을 비벼댔다. 똑순이와 닭들은 새벽이가 만날 첫 이웃이다.

봉사자 아영씨(25)는 유기동물 보호소 봉사를 종종 다닌다고 했다. 그는 “유기동물 보호소들을 다니면서 (동물 구조 활동에는) 돈보다 노동력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사육동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곳도 많지가 않아 돕고자 왔다”고 했다.

새벽이가 먹을 상추 등의 모종 심기와 청소를 담당한 유지향씨(27)는 불과 한 달 전 새벽이를 알았다. “시골에서 소나 닭은 키워봤는데 돼지는 생소해요. 직접 돼지를 보고 나면 더 생명으로 느끼기 쉬울 것 같았죠. 한 달 전부터 동물권에 관심을 갖다가 새벽이를 알고 봉사하러 왔어요.”

자원봉사자들이 지난 11일 모처의 한 공터에서 돼지 ‘새벽이’ 생추어리 정비 활동을 하고 있다. 이보라 기자

자원봉사자들이 지난 11일 모처의 한 공터에서 돼지 ‘새벽이’ 생추어리 정비 활동을 하고 있다. 이보라 기자

유씨가 동물권을 생각하게 된 건 자택 베란다에 수십마리의 벌들이 들어왔다가 죽은 모습을 본 뒤부터다. 그는 “세월호 참사가 생각나고 힘들었다. 비거니즘(채식주의)을 접한 뒤 다른 존재들도 더 생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생추어리 정비는 쉽지 않았다. 첫 정비인 데다 정비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다행히 봉사자 표아름씨(23)와 동행한 아버지 표도영씨(48)가 큰 도움이 됐다. 표도영씨는 봉사자들에게 삽으로 땅을 가는 법 등을 설명했다. 웅덩이를 만들 곳도 찾아줬다. 그는 “딸이 집에선 하나도 도와주지 않으면서 여기선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며 웃었다.

표씨는 이날 아침 아름씨가 생추어리 정비 봉사를 한다는 얘길 듣고 곧장 따라나섰다.

“(생추어리가) 뭔 말인지 아직도 잘 몰라요. 그냥 돼지를 건강하게 키우는 데를 가서 봉사한다고만 알고 왔어요. 아가씨가 삽자루 들고 지하철 탄다고 하니까 도와주러 나왔죠.”

돼지 ‘새벽이’가 지난해 8월 구조 이후 활동가의 자택에서 처음 밟아보는 카페트에 코와 입을 대고 있다. DxE 코리아 제공

돼지 ‘새벽이’가 지난해 8월 구조 이후 활동가의 자택에서 처음 밟아보는 카페트에 코와 입을 대고 있다. DxE 코리아 제공

아름씨는 지난해 4월 넷플릭스에서 동물권 다큐멘터리 <몸을 죽이는 자본의 밥상>을 본 뒤 육식을 끊었다. 동물권 시위에도 몇차례 참여했다. 아름씨는 새벽이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새벽이' 페이스북 링크)에서 처음 보고는 놀랐다고 했다.

“돼지를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코로 흙을 파는 걸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사람들이 외모를 비하할 때 ‘돼지’란 말을 쓰잖아요. 그런데 돼지가 영리하고, 바나나와 찐 감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신기했어요. ‘새벽이는 고유하게 존재하는구나’ 하고요.”

이날 봉사자들이 새벽이를 위해 땅에 박은 통나무 앞에 나무 팻말이 놓였다. 팻말에는 ‘여러분은 지금 동물들의 안식처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들이 주인이고 여러분이 방문객임을 잊지 말아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혔다. 인간이 ‘주’고 동물이 ‘객’이라는 기존 권력구조를 뒤집어놓는 말이다. 이곳에서만은 동물이 인간과 동등한 존재, 그 이상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뜻이다.

하지만 고민거리는 남아 있다. 아영씨는 생추어리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했다.

“생추어리도 결국 동물이 인간에게 기대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이잖아요. 돼지의 행복한 모습을 계속 노출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에선 소비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팟캐스트 ‘흉폭한 채식주의자들’ 운영자인 나무씨도 “인간이 비인간동물을 대리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인간중심적 감정을 비인간동물에게 투영하지 않으면서도, 비인간동물들의 삶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고 뒤로 물러서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들의 삶을 ‘번역’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라고 했다.

지난 11일 돼지 ‘새벽이’의 생추어리가 마련될 모처의 한 공터에 ‘여러분은 지금 동물들의 안식처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들이 주인이고 여러분이 방문객임을 잊지 말아주세요’라는 팻말이 놓여 있다. 이보라 기자

지난 11일 돼지 ‘새벽이’의 생추어리가 마련될 모처의 한 공터에 ‘여러분은 지금 동물들의 안식처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들이 주인이고 여러분이 방문객임을 잊지 말아주세요’라는 팻말이 놓여 있다. 이보라 기자

■ “생추어리는 천국도 동물 해방도 아냐”

DxE 측은 새벽이를 농가로부터 ‘구매해’ 구조한 게 아니다. 허락 없이 데려왔으니 ‘불법’이다. 하지만 이들은 새벽이를 ‘물건’처럼 구매하고 싶지 않았다. 돼지를 죽이는 폭력 현장과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해외 동물권단체들도 이런 방식으로 동물을 공개 구조한다.

DxE 활동가이자 새벽이의 구조자인 감향기씨는 “돼지를 죽이는 게 합법이고 구조하는 게 불법인 상황이다. 이에 순응하지 않고 의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했다. 해당 돼지농가 주인은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출범한 DxE 코리아는 국내에서 생소하면서도 논쟁적인 활동들로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음식점들을 기습해 “음식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구호를 외치거나 마트 정육점에 조화를 놓는 식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는 DxE 해외지부가 유럽과 북미 등에서 주로 해온 운동 방식이다.

이들은 새벽이의 구조를 통해 돼지가 죽어 누군가에게 먹혀야 할 존재가 아니라 본연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DxE 활동가이자 새벽이 구조자인 은영씨는 “새벽이가 15~20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돼지의 삶이 원래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사고로 위험에 빠진 동물을 구하는 것만 구조가 아니다.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매일 죽어가는 동물을 구하는 것도 구조”라고 했다.

돼지 ‘새벽이’가 지난 2월 한 동물단체 보호소에서 코로 흙을 퍼올리고 있다. DxE 코리아 제공

돼지 ‘새벽이’가 지난 2월 한 동물단체 보호소에서 코로 흙을 퍼올리고 있다. DxE 코리아 제공

이들에게 새벽이는 구조된 돼지 한 마리가 아니다. 동물을 대표하는 존재다. DxE 활동가이자 새벽이 구조자인 섬나리씨는 “돼지나 닭, 소가 사회에서 ‘고기’로만 존재하니 사람들 역시 음식으로만 본다”며 “새벽이 구조를 통해 개나 고양이 외에 다른 동물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새벽이는 단순히 구조된 동물 한 마리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동물권 활동가다. 사는 것 자체가 동물권을 말한다”고 했다. 은영씨도 “새벽이 하나가 모든 농장 동물을 대변한다. 악취가 진동하는 환풍기 밑에서 태어나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돼지의 모습에 대해, 새벽이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진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다만 생추어리가 동물들의 천국도, 동물 해방도 아니라고 이들은 말했다. 은영씨는 “새벽이는 구조됐지만 현재도 바깥에 자유롭게 나갈 수 없고 습성대로 온전히 살 수 없다. 권력을 가진 인간들이 최대한 배려를 해준 상황에서도, 주어진 조건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 우리 목표는 생추어리가 늘어나는 게 아니다. 새벽이가 인간과 맞춰 살 필요가 없는 동물 해방을 원한다”고 했다.

이들은 새벽이를 보고 사람들이 충격와 슬픔을 느끼기를 바란다. 은영씨는 “새벽이를 보고 ‘돼지도 키울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 세상이 얼마나 인간중심적이기에 새벽이가 이렇게 한정된 곳에 살까’ 하며 마음 아파해줬으면 한다”고 했다. 섬씨는 말했다.

“사람들이 새벽이를 인간처럼 몸을 가진 동등한 존재, 느끼는 존재로 보길 바랍니다. 구조된 돼지 한 마리가 아니라 사회가 외면하는 진실을 드러내는 사회정의 운동으로 인식했으면 합니다.”

※새벽이 생추어리 조성 후원 계좌(우리은행 1005-103-950529. 새벽이 생추어리)

DxE 코리아 활동가들인 섬나리씨, 김향기씨, 은영씨(왼쪽부터)가 지난 12일 경기도 용인시의 냇가 인근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보라 기자

DxE 코리아 활동가들인 섬나리씨, 김향기씨, 은영씨(왼쪽부터)가 지난 12일 경기도 용인시의 냇가 인근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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