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되지만 보람이 더 크죠" 매일 새벽 밥짓는 사람들

류인하 기자
서울 서초구 청룡마을4길22 주택에 마련된 작업장에서 21일 자활근로자들이 도시락 포장 마무리작업을 하고 있다. 류인하 기자

서울 서초구 청룡마을4길22 주택에 마련된 작업장에서 21일 자활근로자들이 도시락 포장 마무리작업을 하고 있다. 류인하 기자

매일 오전 7시 서울 서초구 청룡마을4길22 주택 앞은 고소한 밥 냄새로 가득 찬다. 일반 가정집을 빌려 개조한 부엌에는 매일 4명의 직원이 분주하게 밥과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인다. 이들이 만든 밥과 반찬은 내곡동과 양재1·2동, 방배2동, 서초1동 취약계층 주민들에게 도시락으로 제공된다. 각 동의 돌봄매니저들은 식사지원이 필요한 독거노인이나 퇴원 후 돌봐줄 사람이 없는 취약계층, 보호자의 보살핌이 잠시 중단된 중증장애인 등을 발굴해 자활센터에 도시락을 신청한다. 이명환 서초지역자활센터 자활사업단 담당은 “많이 들어올 때는 하루에 80~90개의 도시락을 준비한다”고 말했다.

21일 메인 메뉴는 소고기잡채다. 참기름 향이 가득한 숙주나물볶음과 파래무침, 북어국도 도시락에 가득 담았다. 박철용씨(48·가명)는 “어르신들은 밥이 많아야 좋아하신다. 밥은 무조건 한 가득 담아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반찬과 국은 모두 저염식으로 만든다.

서초구와 서초지역자활센터는 코로나19 장기화로 혼자 식사준비가 어려운 돌봄대상자를 대상으로 지난 2월부터 시범사업으로 도시락 제작 및 배송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신청자가 크게 늘면서 지난 7월 이곳의 주택 한 켠을 빌려 본격적인 도시락 제작일을 시작했다. 내년에는 서초구 전 지역으로 사업을 확대한다.

이곳에서 일하는 11명은 모두 기초생활수급자다. 4명의 제작팀이 오전 8시30분까지 도시락을 만들어 포장작업을 마무리하면 7명으로 꾸려진 배송팀이 각 지역으로 도시락을 실어나른다.

송기열씨가 21일 소고기잡채 등 반찬을 담고 도시락 수량을 확인하고 있다. 왼쪽의 깍두기는 전날 직접 담갔다. 류인하 기자

송기열씨가 21일 소고기잡채 등 반찬을 담고 도시락 수량을 확인하고 있다. 왼쪽의 깍두기는 전날 직접 담갔다. 류인하 기자

각종 메인메뉴와 나물반찬 등을 만드는 일은 40년 요리경력의 송기열씨(58)가 맡고 있다. 함께 일하는 김연주씨(60·가명)는 “음식을 빨리 만들고 맛도 좋아서 우리는 그냥 주방보조만 할 뿐”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송씨는 “김씨가 어찌나 재료를 깨끗하게 씻는지 파래가 없어지는 줄 알았다”면서 장단을 맞췄다. 지난 여름에는 삼계탕도 직접 끓여 특식으로 제공했다. 부엌 한 켠에는 22일 동짓날에 맞춰 팥죽으로 제공될 팥알이 한가득 물에 담겨 있었다.

김씨는 “예전에는 유치원 화장실 청소일을 했는데 혼자 일하다보니 외롭고 쓸쓸했지만 지금은 마냥 즐겁다”고 말했다. “매일 오전 6시까지는 출근해야하고, 2시간 이상 꼬박 서서 일해야 하니 몸이 힘들죠. 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자체로 참 행복해요. 송씨가 휴대전화로 노래도 틀어주니 더 신나고요.”

박씨는 “가끔 배달팀 손이 빌 때 대신 배달을 가기도 하는데 도시락을 받으시고 계속 ‘감사하다’ 인사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며 일의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들의 공식 일과는 오후 2시가 돼야 끝난다. 다음날 제공할 반찬 재료 손질작업까지 마무리해야 퇴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절연휴 등 특식이 제공되는 날은 오후 5시까지 일하기도 한다. 송씨는 “깍두기도 어제 미리 손질해서 담가놓았다가 오늘 제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부지런한 11명의 손을 거친 맛있는 밥은 지난 2월부터 최근까지 총 499가구에 1만2228개의 도시락으로 전달됐다.

배송 자활근로자가 21일 서울 서초구 방배2동 취약계층에 도시락과 크리스마스 부식을 전달하고 있다. 류인하 기자

배송 자활근로자가 21일 서울 서초구 방배2동 취약계층에 도시락과 크리스마스 부식을 전달하고 있다. 류인하 기자

기초생활수급자들은 노동의지가 있어도 더이상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다. 일정 소득이 발생하면 수급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 지병을 갖고 있어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제공되는 의료비지원을 받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서 자활근로를 하는 사람들은 “기회가 된다면 내 일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 도시락 제작팀 참여자 4명 중 3명은 일을 하며 식재료관리사 2급 자격을 취득했다.

천정욱 서초구청장 권한대행은 “도시락 제작배송과 같은 공공주도의 사회적 돌봄 사업을 확대해 근로취약계층과 돌봄취약계층 모두가 건강한 자립 생활을 할수 있도록 더욱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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