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 속 비수도권 쉼터의 겨울나기(2)

“마라탕집·인생네컷 편히 가는 게 소원”···그룹홈 소녀들이 마주한 ‘현실의 벽’

윤기은 기자
지난 15일 경북 포항시의 한 아동·청소년 그룹홈 거실. 윤기은 기자 사진 크게보기

지난 15일 경북 포항시의 한 아동·청소년 그룹홈 거실. 윤기은 기자

가로 1.5m, 세로 2.5m 크기의 황토색 전기장판 위에 여섯 식구가 옹기종기 모였다. “언니들이 다 먹어삐는지 잘 보래이.” 방문 밖에서 들려온 ‘엄마’의 농담을 듣고 다섯살부터 열여덟살에 이르는 여자아이들은 쟁반에 담긴 과자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분홍색 패딩점퍼, 베이지색 플리스 외투, 검은색 지퍼형 후드, 회색 트레이닝용 외투 등 각각 두꺼운 겉옷을 입은 채였다.

지난 15일 경북 포항시에 있는 한 아동·청소년 그룹홈을 찾았다. 그룹홈 시설은 보호자로부터 보살핌을 받기 어려운 처지의 미성년자들이 소수 단위로 사회복지사들과 함께 지내는 곳이다. 방문한 그룹홈에는 18세 2명과 17세, 11세, 5세, 6세, 3세 각 1명 등 여성 아동·청소년 7명이 ‘엄마’라고 부르는 시설장과 함께 살고 있다.

고물가의 영향으로 이들의 생활도 달라졌다. 식비가 1년 전보다 1.5배가량 오르는 바람에 시설장은 과일 등 일부 음식을 사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용돈이 더 필요했지만, 어른이 내쉬는 한숨을 보고 차마 조르지 못한다. 시설장과 아이들은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식비 올라 없어진 ‘치킨데이’···후원도 ‘뚝’

지난 15일 경북 포항시의 한 아동·청소년 그룹홈에 등유 보일러가 설치돼 있다. 윤기은 기자 사진 크게보기

지난 15일 경북 포항시의 한 아동·청소년 그룹홈에 등유 보일러가 설치돼 있다. 윤기은 기자

이날 오후 2시쯤 그룹홈의 보일러는 꺼져 있었다. 난방비를 줄이려고 낮 시간대에는 보일러 대신 전기장판을 켜놓는다고 했다. 밤에만 보일러가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도록 설정해뒀다.

시설의 난방 연료는 등유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서비스 오피넷에 따르면 경북 지역 평균 등유 가격은 지난 1월 기준 ℓ당 1462원으로 지난해 같은 달(1075원)보다 약 36% 올랐다. 그룹홈이 있는 건물의 주인은 최근 열효율이 높은 LNG 도시가스를 연결해보려 했지만, 배관망을 이으려면 1000만원의 비용이 든다는 소식에 포기했다고 한다.

지난 8일 경북 포항시의 한 아동·청소년 그룹홈이 시설 아동들의 식재료 등을 사고 받은 마트 영수증. 윤기은 기자 사진 크게보기

지난 8일 경북 포항시의 한 아동·청소년 그룹홈이 시설 아동들의 식재료 등을 사고 받은 마트 영수증. 윤기은 기자

김나윤 시설장은 지난 8일 마트에서 장 봐온 영수증을 펼쳐 보였다. 영수증에 적힌 물건 가격은 총 23만6410원. 그는 ‘*애호박(개) 1,980’이라고 적힌 글씨를 가리키며 “작년까지만 해도 한 개에 1000원이 안 됐다. 돼지랑 소고기 같은 건 가격이 더 저렴한 정육점에서 산다. 이 영수증에는 다른 가게에서 사는 고기나 빵값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5일치 장을 보면 18만~22만원 정도가 들었지만 최근에는 30만원 넘게 든다고 했다.

김 시설장을 비롯한 그룹홈 사회복지사들은 지출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최근 식자재 마트도 찾아간다고 했다. 특히 식비가 부쩍 올라 월 2회 있던 ‘치킨데이’도 지난해 말부터 없앴고, 집 안에서 과일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김 시설장은 “원래 ‘먹는 게 집안에서 떨어지면 절대 안 된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장 보는 것을 조금씩 줄이게 돼 애들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아이들을 시내로 실어나르기 위해 장만한 소형 차량도 있었지만, 지난해 9월 포항에 유례없이 내린 폭우로 침수돼 폐기했다.

생활에 필수적인 지출은 늘었지만 그룹홈의 수입이 되는 후원금은 코로나19와 불황을 거치며 줄어들고 있다. 김 시설장은 1년 전까지 후원자는 약 60여명이었지만 이 중 10여명이 후원을 끊었다고 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7명의 아이를 위해 매월 시설에 상시 지급하는 시설운영비와 생계비는 지난해 약 100만원에서 117만여원으로 소폭 올랐다.

어른들 ‘주머니 사정’에 “용돈 더 달라” 말 못 하는 아이들

지난 15일 경북 포항시의 한 아동·청소년 그룹홈에 사는 박유나양(가명·18)이 인터넷 쇼핑몰 애플리케이션에 ‘찜한 상품’ 목록을 보여주고 있다. 윤기은 기자 사진 크게보기

지난 15일 경북 포항시의 한 아동·청소년 그룹홈에 사는 박유나양(가명·18)이 인터넷 쇼핑몰 애플리케이션에 ‘찜한 상품’ 목록을 보여주고 있다. 윤기은 기자

박유나양(가명·18)은 한참 스마트폰을 쳐다봤다. 화면에는 10대 사이에서 인기인 인터넷 쇼핑몰 애플리케이션이 켜져 있었다. ‘찜한 상품’ 목록에는 청바지, 검은 재킷 등 박양이 마음에 들어 저장해둔 옷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옆에 있던 최한샘양(가명·18)은 “얘 20벌도 넘게 찜했을걸요”라며 웃었다. 박양은 “최근에 엄마가 장 보고 왔는데 걱정이 한가득했다”며 “말은 안 하셔도 힘든 게 보여 뭘 더 달라 못한다”고 했다.

그룹홈 청소년들의 일주일 용돈은 지자체 지원금 6000원, 그룹홈 지원금 4000원을 합쳐 1만원이다. 학교는 장학금을 받아 다니고 있지만,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인 즉석 사진 ‘인생네컷’을 찍거나 마라탕, ‘엽기 떡볶이’를 먹기에는 용돈이 턱없이 모자라다.

“저도 이제 세상 물정 어느 정도 아는데, 식구가 많아 이래저래 들어가야 할 돈이 많아 선뜻 돈 달라 못하겠어요. 운동하고 싶다고 말하니 얼마 전 헬스장 회원권 끊어줬는데 고맙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김서윤양(가명·17)도 고민이 많았다. “포항 시내에서 더는 할 게 없다”며 경주시 등 먼 곳으로 놀러 가자는 친구들의 제안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바리스타를 꿈꾸는 김양은 학교에 비치된 핸드드립 자격증 학원 전단도 읽다가 그대로 내려놓았다. 학원비 20만원이 부담됐기 때문이다.

최양도 “친구들이랑 놀러 가면 돈 걱정부터 한다”며 “놀러 갈 때 엄마가 추가 용돈 주는데도 부족해서 친구들이 빌려주고 하는데, 계속 그러다 보니 눈치도 많이 보인다”고 했다.

김 시설장이 말했다. “빈곤은 입는 거나 먹는 것보다도요, 애들 마음에서 더 드러나요. 친구가 지갑에 5만원짜리 아무렇지 않게 넣고 다니는 것 보고 애들이 느낄 거 생각하면 마음 아프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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