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기사가 밀친 주민 사망사건, 배심원의 판결은?

전현진 기자

국민참여재판 ‘그림자 배심원’ 체험기

“평결 전 네이버 지식인에 물으면 안돼요”

지난 7월 3일 서울에 사는 대학생 전현수씨(22)를 부산지법에서 만났습니다.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숙소를 잡고 전날 미리 부산에 왔다고 했습니다. 현수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세 차례나 부산지법에 왔습니다. 현수씨가 법원에 온 건 재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국민참여재판의 그림자 배심원으로 재판을 ‘하기’ 위해서였죠.

그림자 배심원은 신청자가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해 사법 제도를 경험해 볼 수 있도록 법원이 운영하는 체험 프로그램입니다. 실제 배심원단처럼 국민참여재판의 모든 과정을 참관한 후 유무죄에 관한 판단과 양형 등 평의 과정을 체험하게 됩니다.

2008년 도입된 국민참여재판은 투명한 재판과 국민의 사법 참여를 통해 일반 시민의 판단을 판결에 반영하기 위해 시행됐습니다. 국민참여재판은 어떻게 진행되고, 배심원들은 어떤 고민을 하게 될까요. 기자가 지난 3일 열린 국민참여재판에 그림자 배심원으로 참여해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하늘에 별 따기’ 국민참여재판 배심원 되기

부산지법이 있는 부산시 연제구의 부산법원종합청사.

부산지법이 있는 부산시 연제구의 부산법원종합청사.

부산지법 304호 법정에 모인 20명의 그림자 배심원은 대체로 20대 청년이었습니다. 법학전문대학원 진학을 희망하거나 대외 활동이 필요한 대학생들이 주로 신청하기 때문입니다.

담당 직원의 간단한 안내에 이어 김유신 부산지법 공보판사가 그림자 배심원들 앞에 섰습니다. 김 판사는 “민주주의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인데, 사법권 역시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의미에서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됐다”고 했습니다. 김 판사는 이어 그림자 배심원 프로그램과 유무죄 및 양형 판단에 필요한 사항을 설명해줬습니다.

그동안 실제 재판이 열리는 301호 법정에선 배심원 선정 절차가 진행됐습니다.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은 해당 법원 관할 시민 중 무작위로 뽑힌 후보 중에서 선정됩니다.

이날 국민참여재판에는 모두 7명의 정식 배심원이 선발됐고, 1명을 예비 배심원으로 선정했습니다. 배심원으로 선정되면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하는 동안은 공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여겨 재판 내용을 누설하거나 사건 관계자로부터 금품을 받으면 공무원에 준해 처벌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배심원 선정 과정에 대해 들으면서 ‘왜 내 주위에는 배심원이나 배심원 후보로 선정된 이들이 없을까’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관련 통계를 확인해 보니 쉽게 그 원인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국민참여재판 자체가 많이 열리지 않기 때문에 배심원도 그만큼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2021년 기준 국민참여재판은 767건이 접수됐고, 이 중 84건만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죠. 같은 해 국민참여재판 대상이 되는 1심 형사합의부 사건은 1만8769건이 접수돼 이 중 1만7963건이 처리됐습니다. 같은 해 배심원 후보자 8634명이 소환됐고, 선정기일에 출석한 건 2692명이었습니다. 한 사건에 예비 포함 배심원 8명을 선정한다고 가정하고 단순 계산해 보면 2021년 한 해에 672명만이 국민참여재판 배심원을 맡은 것입니다. 배심원에 선정되는 건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내가 원한다고 지원할 수도 없으니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림자 배심원은 사법 절차에 참여해 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림자 배심원 프로그램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해 온 부산지법을 제외하면 전국 법원 중 그림자 배심원을 운영하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그림자 배심원 체험을 희망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신청 경쟁이 벌어집니다. 전현수씨가 그림자 배심원을 하기 위해 부산지법에만 세 번 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프레젠테이션으로 친절한 설명 “일반 재판과 달라”

한 택배노동자가 배송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뛰어 나오고 있다. 문이 닫히기 전 다시 돌아와야 해 전속력으로 달려야 한다. 기사에서 다룬 사건과 관련이 없는 참고용 사진이다. 우철훈 선임기자

한 택배노동자가 배송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뛰어 나오고 있다. 문이 닫히기 전 다시 돌아와야 해 전속력으로 달려야 한다. 기사에서 다룬 사건과 관련이 없는 참고용 사진이다. 우철훈 선임기자

배심원 선정 절차가 마무리된 뒤, 실제 국민참여재판이 열리는 301호 법정으로 이동했습니다. 재판은 배심원 선서로 시작됩니다. 재판장은 “편견을 가지면 안 됩니다”며 “‘특정 종교인은 거짓말 안 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증거로만 판단해야 합니다”라고 배심원에게 주의를 줬습니다.

국민참여재판은 일반 재판과 다르게 보통 하루 안에 모든 절차가 마무리됩니다. 하루 동안 모든 증거조사와 증인신문을 마치고 배심원 평결에 이어 재판부의 선고까지 진행되죠. 일반적인 재판은 간단한 사건도 선고까지 2차례 기일로 나눠 진행됩니다. 그래서 하루 안에 끝낼 수 없는 복잡한 사건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지 않는 게 일반적입니다.

모든 국민참여재판이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재판 경험이 없는 배심원에게 하루 안에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는 셈입니다. 재판에 익숙하지 않은 배심원을 위해 검찰과 변호인, 그리고 재판부는 일반적인 재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법률 교육을 받지 않았을 배심원을 위해 최대한 어려운 용어를 쓰지 않고, 법률 용어는 가능한 풀어서 설명해 줍니다.

일반적인 재판에선 공판 검사가 자리에 앉아 간략하게 공소 사실을 이야기하며 모두진술을 마칩니다. 그런데 국민참여재판인 이날은 공판 검사가 법정 중앙으로 나왔고 화면에는 직접 만든 프레젠테이션 화면이 띄워졌습니다.

이날 재판은 상해 치사 혐의로 기소된 30대 남성 피고인에 대한 사건이었습니다. 택배 배송 기사인 남성 A씨는 엘리베이터에서 50대 남성을 밀쳐 넘어트렸다가 사망하게 한 혐의를 받습니다.

사건을 살펴보면, 지난 1월 설 연휴 직전에 밀린 배송을 하던 A씨는 상층부에서부터 엘리베이터를 잡아두고 배송하며 내려오던 중이었습니다. 여러 층에 멈춰 서다 드디어 4층에 엘리베이터가 섰습니다. 50대 남성 B씨가 엘리베이터로 들어서면서 욕을 하고 A씨의 짐수레를 발로 찹니다. A씨는 이런 B씨를 양팔로 밀어 넘어트렸습니다. B씨는 넘어지면서 뒤통수가 땅에 부딪혔고 병원에서 수술을 받지만, 며칠 뒤 숨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처벌을 결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배심원들께서는 우리 사회의 정의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만큼 공정하면서도 냉정한 판단을 부탁드립니다.”

검사가 배심원을 바라보면서 진술을 시작했습니다.

검사는 상해치사 혐의로 A씨를 기소했다며 엘리베이터에서 B씨를 밀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을 보여줬습니다. B씨가 짐수레를 발로 차자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A씨가 앞으로 튀어 나가며 B씨를 세게 미는 모습이었습니다. ‘밀었다’는 사실을 글로 볼 때와 영상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행위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검사는 A씨가 B씨를 다치게 하려는 미필적 고의가 있었기 때문에 상해 치사가 적용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변호인도 엘리베이터 영상을 제시했습니다. 대신 검찰과 달리 사건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주민이 열림 버튼을 누르며 A씨의 배송을 기다려 주고, A씨는 복도형 아파트를 전속력으로 뛰어 물품을 배송한 뒤 다시 엘리베이터에 타길 반복합니다. 다른 주민들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B씨가 욕을 하며 카트를 발로 차는 모습을 보이며, A씨가 오히려 위협을 느꼈다는 주장도 제시합니다. 그러면서도 A씨가 범행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시종일관 자백하고 반성해 왔으며, 아파트 입주민은 물론 유족이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썼다는 점을 배심원에게 강조했습니다.

A씨는 자신의 행위로 B씨가 사망한 것은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상해치사가 아닌 ‘폭행치사’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발적으로 딱 한 차례 방어적 행동으로 밀친 것이지 상해를 입히려 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검찰과 피고인 측은 같은 사안을 놓고 반대로 해석이 갈렸습니다.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는 재판부와 배심원의 몫입니다.

양측의 입장을 들은 뒤, 재판부는 쟁점을 정리해줍니다. 이날 사건의 쟁점은 유무죄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해치사나 폭행치사 중 어느 혐의를 적용해야 할 것인지와 어떤 처벌을 내릴지 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재판부는 이어 상해치사냐 폭행치사냐를 다룰 때 ‘상해의 미필적 고의’를 판단해야 한다며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미필적 고의라는 게, 어떤 일이 발생할 위험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라는 법률용어인데 언론에서 너무 쉽게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개념입니다.”

이어 오후에 진행될 절차도 설명합니다. 가장 중요한 과정은 증인 신문이었습니다. 증인으로 사건이 발생한 아파트의 관리소장과 A씨의 아내가 나올 예정이었고, A씨에 대한 피고인 신문이 진행되기로 했습니다.

오전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배심원은 물론 방청석에 앉은 그림자 배심원들도 집중해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럴듯하게 꾸민 사건을 다루는 모의재판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 사건과 그 당사자들에 대해 판단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평결은 다른 배심원을 내 의견으로 끌어들이는 절차가 아닙니다. 평결 전까지 본인 의견 밝히면 안 되고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보고 그러면 안 됩니다.”

재판부는 쟁점 정리를 마친 뒤 배심원에게 마지막으로 주의를 줍니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식사 때 일상생활 관련 이야기 해도 돼요. 어떤 배심원단은 재판 끝나고 계모임이 됐어요. 화기애애하게 보내셔도 돼요.” 너무 긴장하지 말라는 듯 농담도 곁들였습니다.

서두에 소개한 전현수씨는 이런 국민참여재판의 진행 과정이 흥미롭다고 했습니다. 그는 “일반 재판을 방청했을 때는 재판이란 게 꽤 불친절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국민참여재판은 재판 전체를 모두 볼 수 있어서 의미가 있었다”고 했죠.

치열한 법률 공방 보며 고민하는 배심원들

지난 6월 기준으로 취합된 2008년부터 2022년까지의 국민참여재판 관련 현황 통계를 보면, 접수 사건 중 실제 비율은 크게 밑돈다. 2000년부터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신청 후 철회한 비율이 크게 오른 것으로 보인다.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 ‘국민참여재판 성과 분석’.

지난 6월 기준으로 취합된 2008년부터 2022년까지의 국민참여재판 관련 현황 통계를 보면, 접수 사건 중 실제 비율은 크게 밑돈다. 2000년부터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신청 후 철회한 비율이 크게 오른 것으로 보인다.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 ‘국민참여재판 성과 분석’.

오후 재판은 증거 조사로 시작됐습니다. 증거는 CCTV 영상과 경찰과 소방의 활동일지, 병원 진단서, A씨의 신문조서 등이었습니다.

사실 이 재판에서 검찰과 피고인은 대체로 같은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신문 조서를 제시할 때, 검찰은 A씨가 B씨를 밀면 다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취지의 답을 찾아 배심원에게 보여줬습니다. 변호인은 욕설을 하며 엘리베이터로 들어오는 B씨가 공격적인 행동을 해 방어한 것이라는 A씨의 진술을 제시했죠.

경찰과 소방이 작성한 일지를 보면, A씨에게 밀쳐져 뒤로 넘어진 B씨는 머리를 단단한 바닥에 부딪혀 정신을 잃은 듯합니다. A씨가 119에 신고하며 심폐소생술(CPR)을 했죠. 정신을 차린 B씨는 귀가했다가 자세한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는 구급대원 판단에 따라 병원으로 이송됩니다. 이후 뇌출혈 진단을 받고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사망합니다.

이런 사건 이후의 정황에 대해 검찰은 A씨가 B씨에 상해를 입힐 미필적 고의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발생했으며, 법리적으로 보면 폭행에 대한 고의와 상해의 결과만 있으면 상해죄로 처벌이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변호인은 A씨가 B씨를 밀친 직후 CPR을 시행한 점 등을 보면 애초에 다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변호인 측은 또 직접 확보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A씨는 아내와 B씨의 병원을 찾아 사과하고, B씨가 사망한 후에도 장례식장에 가 유가족에게 다시 사과했다고 합니다. 이후 합의금도 내 B씨의 아내로부터 탄원서를 받았습니다. 또 B씨가 살던 아파트 주민들도 A씨의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썼습니다.

이 대목에서 배심원들과 그림자 배심원들이 관심이 모였습니다. 피해자 혹은 그 가족의 합의는 결정적인 참고 요소입니다. 피해를 어느 정도 회복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파트 주민들까지 탄원서를 써줬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었습니다. 아무 관련 없는 택배기사의 상해치사 사건에 탄원서를 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증인신문 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증인으로 나선 아파트 관리소장이 피해자 B씨가 평소 술에 취해 이웃과 갈등을 일으켰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앞서 검찰 측은 모두 진술 과정에서 이 증인 신문에 대해 거론했습니다. “피해자가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였죠. 이 사건의 피해자인 B씨에 대한 진술이 나올 것으로 예상됐던 것입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사람 됨됨이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며 배심원에게 미리 귀띔해주었고, 증인 신문은 예정대로 진행됐습니다.

변호인 측에서는 평소 행실이 바르지 못한 피해자가 공격적인 태도를 먼저 보였을 것이라는 점을 알리면서, 동시에 사건 당시 술에 취했을 가능성도 높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한 차례 밀친 행위가 예상치 못 하게 사망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점을 주장한 것입니다.

검찰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관리소장에게 B씨와 유족의 관계를 묻습니다. B씨는 술에 취해 다툼이 잦아 가족과 불화가 있었다는 증언을 하죠. 유족이 한탄하는 마음으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검찰은 피해자 유족의 탄원서의 진정성이 의심스럽다는 점을 암시하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피해 당사자는 사망했고, 그의 평소 행실은 그가 겪은 피해와 전혀 별개이며, 사이가 좋지 않던 유족의 용서로 피고인의 처벌을 전적으로 감경 해줘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보였습니다.

이후 A씨의 아내와 A씨에 대한 신문이 이어졌습니다. 30대 부부인 두 사람은 넉넉하지 않지만, 오랫동안 성실하게 살아왔고, 코로나19로 힘들게 지내던 중에 의도치 않게 일어난 사건으로 상심이 크고 피해자에게 죄송한 마음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배심원단과 그림자 배심원들은 증거 조사와 증인신문 과정을 바라보면서 때론 고개를 끄덕이고 메모도 하며 집중했습니다. 실제 사건의 당사자가 자리한 현장에서 사건에 대한 법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무게감을 느끼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그림자 배심원으로 참여한 대학생 한재헌씨(26)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모의재판을 체험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사건을 다룬 실제 재판에 들어가게 돼 놀랐다”며 “오늘 사건이 우발적으로 벌어진 것이었는데 실제 사건의 당사자에게 정말 큰 일일 테니 더 신중하게 재판을 보게 됐고, 나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집중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재판은 검사와 변호인의 최종의견, 피고인의 최후진술로 마무리됐습니다. 검사는 피해자가 욕설을 하고 카트를 발로 찬 것 외에는 추가로 위협적인 행동을 한 것이 없는데, 가만히 있는 피해자를 밀어 넘어뜨린 것은 방어적 행동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폭행의 고의만 있어도 상해죄 성립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는 판례를 제시하며 상해치사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A씨에 대해 감경 요인이 다수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할 경우 양형기준에 따라 징역 3년을 구형했습니다.

변호인은 “피고인은 열심히 살아보고자 시작한 택배 일인데 자신 때문에 사건이 이런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피해자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갖고 평생을 죄인으로 살고자 한다”고 입을 열며 피해자의 평소 행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피해자가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고, 피고인이 사건 직후 적절한 구호조치를 시행했으며 유족과 주민들의 탄원을 받은 점 등을 참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판단의 무게

2008년 2월 대구에서 처음 열린 국민참여재판. 연합뉴스

2008년 2월 대구에서 처음 열린 국민참여재판. 연합뉴스

재판이 마친 뒤 배심원단은 따로 모여 평의에 들어갔습니다. 그림자 배심원들도 김유신 공보판사와 함께 이 사건에 대한 모의 평결을 했습니다. 김 판사는 그림자 배심원 한 명 한 명에게 상해치사와 폭행치사 중 어떤 혐의가 적용돼야 할지 묻고, 적절한 양형에 대한 의견도 확인했습니다.

기자는 피고인에 폭행치사를 적용해야 하고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증인신문 과정에서 피해자의 키가 180cm 정도로 건장했고, 피고인이 피해자를 한 차례 밀친 뒤 곧바로 CPR을 시행하는 등 구호행위를 하였다는 점을 보아 다치게 하려거나 다쳐도 상관없다는 상해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상해죄가 아닌 폭행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죠. 폭행범죄로 인해 사망에 이른 경우 여러 감경 사유를 적용하면 처단형의 하한인 1년6개월을 선고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다른 그림자 배심원들도 자신만의 판단 근거를 내세워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림자 배심원 20명의 의견을 종합하면 상해치사가 11명 폭행치사가 9명이었습니다. 19명이 대체로 2년~2년 6개월의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선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실형 의견은 한 명이었습니다. 우발적인 사건이고 구호 조치를 했다는 점은 인절할 수 있지만, 사람이 죽었다는 결과가 중대해 엄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양형 토의를 마친 뒤 그림자 배심원 프로그램은 마무리됐습니다. 수료증과 기념품을 나눠주고 미리 배포했던 사건 관련 자료도 수거합니다. 약 10명의 그림자 배심원이 선고를 확인하기 위해 법원에 남았습니다. 배심원단의 토의가 길어지면서 오후 5시 30분으로 예정됐던 선고 공판은 오후 6시20분쯤 진행됐습니다.

재판부는 A씨에 대한 배심원의 판단을 먼저 알렸습니다. 의견이 처음에는 일치하지 않아 재판부와 함께 토의했고, 상해치사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했습니다. 양형 의견은 그림자 배심원의 의견과 같이 2년~2년 6월의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선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합니다.

재판부는 배심원 평결을 존중한다며 최종적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이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추가로 8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습니다. 피해자의 사망이라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고 상해의 정도가 가볍지 않지만, 피고인이 범죄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으며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다칠 정도까지 예상하고 일을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고, 이후 구호조치를 한 뒤 피해자와 합의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했습니다. 피해자가 먼저 욕설을 하고 도발한 점 등도 참작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그림자 배심원 20명의 판단과 실제 배심원단 평결, 재판부의 선고는 대체로 일치한 셈입니다.

국민참여재판에서 대체로 배심원과 재판부의 판단은 일치합니다. 2008년부터 2022년까지 2894건 중 93.6%에서 평결과 판결이 일치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2008년 국민참여재판 시행 이후 배심원 평결과 재판부 판결이 일치하지 않은 건 모두 186건(6.4%)이었습니다. 대부분 배심원이 무죄 판결했지만, 재판부가 유죄로 판결(170건)한 것이었습니다.

배심원의 평결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1심 재판부의 선고가 항소심에서 다시 뒤집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배심원이 무죄를 평결했던 것을 1심 재판부가 유죄로 판단했는데, 항소심에서 다시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건은 모두 12건이었습니다. 극히 일부인 셈이죠.

이날 재판은 검찰과 피고인 모두 항소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국민참여재판의 항소 비율은 일반 사건인 1심의 형사합의 사건의 항소율(63.0%)에 비해 높은 81.1%나 됩니다. 피고인 항소율(57.7%)은 일반사건 피고인 항소율(52.7%)과 큰 차이 없지만, 검사의 항소는 일반 사건(29.5%)보다 국민참여재판(49.8%)에서 더 많습니다. 검사가 국민참여재판의 결과를 존중하지 않고 항소하는 관행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 이유입니다. 만장일치에 따른 무죄 평결이 나올 경우 검사의 항소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고쳐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국민참여재판의 시행 취지를 살리자는 것인데, 논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의 결과는 검찰에서도 납득할 수 있는 판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날 재판을 마친 뒤 정식 배심원에 선정돼 평결에 참여했던 한 배심원(25)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약 한 달 전 배심원 후보로 선정돼 법정에 출석하라는 등기우편을 받았는데, ‘이게 뭐지’하고 주위에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위에 국민참여재판 배심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어 직접 찾아보았다고 합니다. 군대에 가는 것처럼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 일단 법원에 왔는데 실제 배심원으로 선정돼 재판까지 치르게 된 것이죠.

소감을 묻자 그는 “재판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평결을 할 때는 냉정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배심원 의견을 모두 들었지만 재판부가 실제 어떤 선고를 할지는 몰랐는데, 내 일이 아닌데도 선고를 할 때 무척 떨리고 긴장됐다”고 했습니다. 또 “배심원까지 선정돼 누군가의 사건에 직접 의견을 내는 부담스럽지만 의미 있는 경험이었고, 모든 과정을 마치고 나니 군대 전역했을 때처럼 시원 섭섭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하더군요.

시행 15년이 지난 국민참여재판은 논란도 평가도 다양하지만, 국민들이 직접 사법 절차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장점은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 자리 잡아 갈 수 있을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택배기사가 밀친 주민 사망사건, 배심원의 판결은?
‘다시 읽고 싶은 긴-이야기 코끼리’는 다시 읽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 장문의 내러티브 기사로 소개하는 경향신문 뉴콘텐츠팀의 버티컬 채널입니다. 곳곳에 숨은 이야기를 찾는 이들과 영감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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