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도 않는 남성혐오를 앞세워,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

남성혐오의 상징인 ‘집게손’ 모양을 했다는 일부의 문제 제기로 인해 삭제된 온라인 게임 ‘메이플스토리’ 홍보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남성혐오의 상징인 ‘집게손’ 모양을 했다는 일부의 문제 제기로 인해 삭제된 온라인 게임 ‘메이플스토리’ 홍보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축하한다. 게임사 넥슨코리아(이하 넥슨)는 최근 가상의 게임 세계관을 실제 세계로 확장 및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새 게임의 타이틀은 대안사실 속 페미니스트 때려잡기다.

얼마 전, 온라인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홍보 애니메이션에서 0.1초 만에 지나가는 장면 중 캐릭터의 손가락 모양을 본 일부 예민한 남성 유저들이 해당 장면은 과거 여성주의 사이트 메갈리아에서 남성 성기 크기를 놀리는 ‘집게손’ 사인이라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메이플스토리’를 서비스하는 넥슨은 11월26일 새벽 사과문을 올리며 해당 영상을 비공개 처리했다. 더 나아가 또 다른 자사 인기 게임 ‘던전 앤 파이터’ 홍보 영상에서 비슷한 손 모양이 있는지 초 단위 분석을 통해 전면 검수하겠다고 밝혔다.

이 세계관의 주요 설정은 다음과 같다. 세상엔 남성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악랄한 여성우월주의자들이 존재하며 그들의 이름은 페미니스트다. 이들 페미니스트는 사회 곳곳에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암약하며 세를 확장하고 있다. 지하 컬트 조직으로서의 페미니스트는 남성혐오의 상징인 ‘집게손’ 모양을 세계 곳곳에 은밀히 심어놓으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즐거워한다. 이 세계관 안에서 유저들은 숨어 있는 ‘집게손’의 흔적을 집요하게 찾아내 그걸 만든 페미니스트를 색출해 징벌한다. 실제로 ‘메이플스토리’ 홍보 영상을 만든 외주업체 스튜디오 뿌리 측은 담당 직원 제작물을 삭제하고 직원을 배제하겠다고 사과했다.

이 게임 세계관을 현실 세계와 연결하기 위해선 당위가 필요하다. ‘메이플스토리’의 김창섭 디렉터는 긴급 라이브 방송을 통해 “맹목적으로 타인을 혐오하는 것에 있어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그런 문화를 몰래 드러내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와 ‘메이플스토리’가 얼마나 단호하게 반대하고 있는지 입장을 말씀드리는 것이 오늘 방송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이라 밝혔다. 도덕적으로 타당하며 거대 게임사 디렉터로서의 책임감과 직업윤리까지 돋보이는 발언이다. 다만 하나의 작은 문제가 있다. 그가 단호하게 반대하겠다던 그 모든 일이 그와 일부 남성 유저의 머릿속에서만 벌어진 일이라는 거다.

지난달 28일 한국여성민우회를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경기 성남시 판교 넥슨코리아 사옥 앞에서 게임문화 속 페미니즘 혐오몰이를 규탄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MBC <뉴스데스크> 화면 캡처

지난달 28일 한국여성민우회를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경기 성남시 판교 넥슨코리아 사옥 앞에서 게임문화 속 페미니즘 혐오몰이를 규탄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MBC <뉴스데스크> 화면 캡처

그들의 대안세계는 두 개의 층위로 왜곡되어 있다. 메갈리아는 극우 커뮤니티 일베나 다름없으며 메갈리아로 대표되는 한국의 페미니즘 역시 혐오를 조장하는 차별주의라는 왜곡, 자신들의 눈에 띄는 수상한 엄지와 집게 이미지는 모두 페미니스트들이 몰래 숨겨놓은 혐오표현이라는 왜곡. 첫 번째 왜곡은 거짓말이고 두 번째 왜곡은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주장에 가깝다.

여전히 악마화되는 메갈리아의 소위 ‘과격한 페미니즘’이란 고작 김치녀, 된장녀, 김여사 등 여성혐오 라벨링에 대한 미러링으로서 한남이란 표현을 쓴 정도이며, 그들이 미러링한 여성혐오 라벨링은 일베뿐 아니라 웃대, 오유, 클리앙, 루리웹 등 거의 모든 남초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던 것이다.

오프라인에서 메갈리아가 한 일은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에 대한 추모집회였고, 일베가 한 일은 단식투쟁 중인 세월호 유족 앞에서 폭식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둘을 동일하게 보는 게 온당한가?

게임 홍보 영상 속 손 모양 ‘음모론’
남성 성기 조롱 ‘집게 손’ 사인 항의
일부 예민한 남성, 메갈리아 소환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왜곡으로
여성 일반에 대한 분노·미움 표출
악성민원에 사과한 넥슨도 민폐

수많은 게시판 넘치는 차별·혐오
폐해는 제대로 논의조차 없는 현실
불공정· 불합리하게 설계된 게임
개선하기 위한 패치가 필요하다

반면 암약 중인 메갈리아 일당이 여기저기 ‘집게손’ 상징을 심어놓는다는 음모론은 반박하기 쉽지 않다. 그들의 주장이 타당해서가 아니라 그냥 반증 가능하지 않은 가설이기 때문이다. 신비의 동물 추파카브라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어렵다.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 곳곳에 혐오표현을 남기는 음흉한 페미니스트 집단이라는 상상의 동물도 마찬가지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선 넥슨 직원이 “혼자만의 사상을 은근슬쩍 끼워놓고 (중략) 그거 하나 때문에 관련 유관부서, 담당 인력이 고생”하는 상황에 분노했는데, 손가락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 페미니스트가 공사 구분 못하고 자기 사상을 몰래 표현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가축의 사체가 추파카브라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듯. 하지만 그들은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는 대신, 그런 페미니스트가 없다는 게 증명되지 않았으니 자신들의 믿음이 옳다는 종교적 맹신의 차원으로 퇴행한다.

만약 이 사건이 추파카브라와 네스호의 괴물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라면 차라리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믿는 상상 속 페미니스트에 대한 분노와 미움은 고스란히 현실 속 페미니스트, 그리고 여성 일반을 향한 감시와 폭력이 된다. 논란과 압박이 계속되자 스튜디오 뿌리의 해당 직원은 퇴사를 결정했다.

앞선 사과문에서도 뿌리 측에선 애니메이터가 손동작 하나하나를 컨트롤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설명했지만, 어느 순간 그의 퇴사는 그가 몰래 남성혐오 표식을 남겼다는 증거처럼 받아들여졌다. 자신들의 억측으로 한 여성 노동자의 권리가 침해되었음에도 자신들이 옳으며 승리했다고 환호하는 무리를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별로 가망 없는 시나리오다.

가능한 건 과거 가수 타블로의 학력에 대한 음모론을 믿고 퍼뜨리던 ‘타진요’에 그러했듯 상식의 마지노선을 그어 포위하고 철저한 소수 의견으로 고립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거대 게임사인 넥슨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악성민원에 동조해주며 그들에게 승리의 경험을 안겨주는 중이다. 이것은 단순히 기업과 소비자 간 합의 혹은 거래의 영역이 아니다. 이 승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온갖 시각 매체에서 ‘집게손’의 흔적을 찾아내 여성 창작자를 차별주의자로 몰아 압박하고 밥줄을 끊으려는 게임은 계속될 텐데, 말하자면 넥슨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수많은 현실의 여성들을 이 게임의 NPC로 가져다 바치는 셈이다.

이번 사건을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은 생각 없는 여성 페미니스트 하나가 공적 작업에 자기 사상을 기입했다가 회사와 발주처 모두가 고생한 민폐의 서사로 해석 중이지만, 진실은 넥슨이 유저 일부의 비위를 맞춰준 대신 그 후과를 앞으로 사회 전반이 감당해야 하는 것에 가깝다. 민폐의 주체는 넥슨이다.

악성 소비자로서의 남성 게이머들이 사악한 남성혐오 페미니스트들과의 성전이라는 자기들만의 게임에 빠지고, 국내 굴지의 게임사가 그들의 망상을 유지해줄 세계관을 제공해주는 동안 실제 세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김창섭 디렉터는 “타인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문화와 그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이 사랑하는 ‘메이플스토리’를 유린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비장하게 말했지만, 국내 최대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인 인벤 ‘메이플스토리’ 게시판에선 나이든 여성 비하표현인 닭장(어원은 너무 더러워서 밝히지 않겠다), 여성 월경을 비하한 피싸개에서 파생된 바싸개 따위의 표현을 일상처럼 사용해왔다.

이미 폐쇄되고 없는 메갈리아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이들은 메갈리아가 일베와 동급인 존재이기에 비판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11월 중순 KBS 내부 인사가 ‘짤린 극좌 기자XX들 명단’이라며 실제 인사발령문을 일베에 올려 인증하고 해당 직원들에 대한 비난과 혐오를 유도한 일에 대해선 더없이 조용하다. 엄지와 검지가 달린 손 모양으로부터 조금도 가시적이거나 명시적이지 않은 남성혐오와 차별의 메시지를 읽어내고 난리를 치는 동안 네이버웹툰 <신과 함께 돌아온 기사왕님> 같은 작품에선 “착한 오크는 죽은 오크일 뿐”이라는 대사와 함께 레이시스트로서의 주인공을 코믹하게 연출하고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뿐이다 메모’라는 인종차별 발언이 버젓이 베스트댓글이 되어 게시된다. 존재하지도 않는 남성혐오의 메시지를 읽어내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지만, 정작 남성들이 주도하는 명백히 가시적인 혐오의 폐해는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는 현실. 이토록 불평등하고 불합리하게 설계된 게임을 개선하려면 패치가 필요하다. 우린 그 패치를 페미니즘이라 부르기로 했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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