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사람 : 김스피 받는 사람 : 연구자님 ‘BGM글쓰기’와 ‘멱살잡는 글쓰기’ [2월의 김스피] |
|
|
2016년이 ‘알파고의 해’였다면, 2023년은 ‘ChatGPT’의 해일까요? ⓒAP연합뉴스 |
|
|
>2월 레터의 비하인드 : ‘BGM글쓰기’와 ‘멱살잡는 글쓰기’ >2월의 해찰 피드 : #스타일에 대하여 #2023,노동의풍경 >지난 편지 해찰 : #알파고가 가져온 변화 |
|
|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튀르키예의 대지진으로인해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었습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부디 현지 주민들과, 구조대의 무사와 안전을 마음 깊이 기원합니다. * 2월엔 ‘낯선 사람과 이야기한다는 것에 대하여(1주차· 💌)’, ‘챗GPT를 인스피아에 쓸 수 있을까?(2주차· 💌)’, ‘AI를 닮았던 인간에 대하여(3주차· 💌)’를 다루었습니다. 지난 8일(2주차) 레터에서 ‘챗GPT’를 다룬 이후에도, 챗GPT는 꾸준히 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TV를 켜도, SNS를 훑어보아도 챗GPT에 대한 이야기가 잔뜩이죠. 2016년이 알파고의 해였다면, 2023년은 후세에 ‘챗GPT의 해’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수많은 전문가분들의 혜안이 담긴 글들만으로도 눈이 빙빙도는 가운데 굳이 어리숙한 저까지 글자를 더할 필요가 있나 싶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저의 삶과도 밀접한 일이기 때문에 자꾸 고개가 돌아가곤 하는 것같습니다. * 지난 2일 칼럼니스트 데이빗 브룩은 뉴욕타임즈 칼럼( 링크)에서 ‘AI의 시대에 인간들이 AI에 비해 우위를 지닐 수 있는 가치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를 골똘히 고민했습니다. 그는 “AI는 우리가 오늘날 하고 있는 많은 정신적 작업을 아웃소싱하는 데 멋진 도구를 제공할 것”이라며 “AI와 관련해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AI가 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이를 통해)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지를 드러낸다는 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만 가능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제시했죠. ‘뚜렷한 개성을 지닌 개인의 목소리, 프레젠테이션하는 기술, 어린아이같은 창의력, 특이한 세계관, 공감, 상황인지...’ 저는 이 칼럼을 읽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최근엔 대체로 AI와 관련해 ‘인간 vs 프레데터’같은 느낌의 글들이 많고, 그 와중에 챗GPT가 못하는 부분에 주목하며 마음을 쓸어내리는 경우가 많은데(‘흥...AI도 아직 인간을 따라오려면 멀었군’) - 오히려 챗GPT가 못하는 부분을, 우리에게 갈 길을 비추어주는 ‘유용한 표지판’으로 생각한 것이 참신했습니다. 수학자 마커스 드 사토이도 책 <창조력 코드>에서 ‘AI는 인간이 AI스러움(지루함)을 버리고 진정 인간답게 만드는 것을 도와준다!’는 역설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했죠. * 그렇다면 문득 생각해봅니다. ‘인간다운’ 글쓰기란 무엇일까요? 벌써부터 제 주변에선 ‘길고 지루한 글’에 대해 “챗GPT로 썼냐”는 얘기가 나오곤 합니다. 이런 글의 특징은, 일단 페이지수는 엄청 많은데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고, 어딘가 그럴듯하긴 한데 기시감으로 가득한 글입니다. 저는 이전 회차에서 이런 글들을 ‘지푸라기로 빵빵하게 가득 찬 베개같은 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었는데요. 뭔가 이런 글을 읽고 있다 보면, 한 시간 동안 학생 얼굴 대신 교실 뒤 사물함을 보며 수학 문제집 정답풀이를 세장씩 읽으시던 학창시절 선생님의 눈빛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오늘의 에세이에서는 ‘BGM 글쓰기’와 ‘멱살잡는 글쓰기’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
|
👤2월 레터의 비하인드 : ‘BGM글쓰기’와 ‘멱살잡는 글쓰기’ |
|
|
“문자의 발명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속 타무스 왕은 문자를 발명한 신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왜냐면 문자를 쓰면 사람들은 굳이 그것을 암기할 필요가 없어져서 잘 까먹고, 상대방의 반응에 대해 즉각 영향을 받는 ‘양방향 소통’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 <파이드로스>·참고) 이 일화는 통상 시대착오의 상징처럼 인용되곤 하는데요. ‘심지어 천하의 소크라테스조차도 처음 문자가 발명됐을 땐 바보상자 취급을 했군!'이라는 식으로요. 하지만 저는 소크라테스의 지적에 일부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읽는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 차원보다는 ‘쓰는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 차원에서요. 강연이나 대화에 비해선, 글을 쓸 땐 읽는 사람의 얼굴을 적극적으로 상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 면전에서 지루한 이야기를 오백시간(?) 동안 하고 있으면 듣는 사람은 꿀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간 무덤덤한 사람이 아니라면, 꿀잠자는 청중을 상대로 혼자 떠들고 싶진 않겠죠. 주눅들어서 다음엔 더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가져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텍스트로 써놓으면 쓰고 싶은 사람 마음대로 일단 채워둘 수 있습니다. 읽는 사람이 자든 말든 알 바 없습니다. * 저는 그닥 훌륭한 기사를 쓰진 못했습니다만, 이런저런 기사를 쓰던 시절 항상 마음 속엔 조금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상당수의 데일리 기사는 굉장히 틀이 잡힌 글쓰기입니다. 대체로 괄호를 열어 도입부를 쓰고 사건을 쓰고, 이에 대한 분석을 몇개 집어넣고, 과거 사례를 넣고, (기사의 취지에 맞는) ‘전문가’ 코멘트를 넣어 괄호를 닫습니다. 이렇게 잘 정돈된 글은 다듬어져서 지면에 잘 실립니다. 매일같이 많은 기사를 써야 하는 시스템에서는 일단 발생 사건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기사에 다양한 관점을 넣거나, 기사를 안 읽는 사람을 대상으로 쓰는 기사를 상상하거나, 전제 자체에 의문을 가지며 취재를 하는 글을 쓰기가 어렵습니다.1) 인터넷 포털 기사 댓글은 나쁜 말이 상당수였지만, 때론 타당한 지적들이 있었습니다. 타당하다는 건 그들의 말이 맞다는 게 아니라 얼마든 처한 상황에 따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길고양이 보호에 관련된 기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기사의 댓글들을 읽을 땐 저는 눈을 감고 이렇게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만약 내가 이 기사를 다양한 의견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목부터 차근차근 읽었다고 한다면, 나는 이 기사를 끝까지 낭독할 수 있었을까? 대번에 “길고양이가 생태를 망치는데 어쩌라고요!” “고양이 울음소리는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어요!”라고 누군가가 훼방을 놓았을거고, 그렇다면 나는 준비해온 ‘빤빤한 원고’를 읽는 대신, 그 논리에 대해 다른 팩트로 반박을 하든, 보완을 하든 논란의 핵심부터 찌르고 들어가야 하지 않았을까? 혹은 아예 이와 관련해서 색다른 관점을 제공할 수 있는 다른 ‘재미난 이야깃거리’(반대자조차도 귀를 기울이면서 들을 수 밖에 없게 되는)를 들려줘야 하지 않았을까?...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혐오자’라고 욕하며 배척하긴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글이 애초에 설득의 도구라고 했을 때, 어차피 이미 살뜰히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글을 쓴다면 글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예전에 <하이프 머신>(시난 아랄, 2022· 링크)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요. 유독 뇌리에 남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운동화를 이미 구입할 사람에게 운동화 광고를 보내는 건’ 성과 지표 (전환율)는 높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론 의미가 없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어차피 홈런볼을 집어먹으려고 했던 김스피에게 ‘홈런볼 드세요!’ 해서 홈런볼을 먹었으니 성공이라는 식입니다. 이렇게 간단히 쓰고보면 깜짝 놀랄만큼 어이가 없는 일인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수많은 기업들은 이런식으로 마케팅 성과를 판단해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글의 영역으로 끌고와보면, 이미 길고양이 보호에 찬성하는 사람들에게만 소구하는 글을 쓰는 건 별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상당수 기사와 글들 역시 이런 대부분 이런 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글들에는 절실함이 없기 때문에 쓰는 사람도 졸면서 쓸 수 있고, 읽는 사람도 졸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일본의 ‘힙합하는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 링크)는 그럴듯한데 사람의 마음을 치는 매력은 없는, 정물같은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사카씨가 지금 이야기한 ‘재미없는 소설’은 한마디로[...]재즈의 명곡, 스탠더드 넘버를 밋밋하게 연주하거나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기 위한 타성으로 음악에 종사하는 스튜디오 뮤지션의 연주음악 같은 것 말이죠. 백화점 가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죠? 비틀스를 무미건조한 오케스트라로 연주한 곡,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분위기를 띄우는 음악 말입니다. 호사카씨가 말하는 ‘재미없는 소설’이란 그런 음악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음악은 들어도 즐겁지 않고, 흥도 나지 않고, 춤을 출수도 없잖아요.”-사사키 아타루, <이 나날의 돌림노래> 저는 이런 종류의 졸리는 글에 사사키 아타루의 말을 빌어 ‘BGM(배경음악)같은 글’이라고 제멋대로 이름 붙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글을 읽고 싶어하면서요. 위에서 말한 ‘BGM같은 글’은 이제 어마어마하게 챗GPT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오히려 챗GPT가 그런 글들을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건, 데이빗 브룩이 말했듯 하나의 ‘희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젠 많은 사람들은 ‘그런 글들은 누구든 만들 수 있구나!’하면서 자신감을 얻을테고, 이런 글들은 급속히 매력을 잃을테니까요. * 최근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었는데, 제일 첫 페이지서부터 걸려 넘어졌습니다. <자기만의 방>은 당시 여학교에서 진행한 강연 원고를 출판한 책인데요. 글 쓰는 여성에겐 ‘자기만의 방(경제적, 정신적 독립)’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궤적이 내용의 주를 이룹니다. 이 강연의 원제는 ‘여성과 픽션’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걸려넘어진 대목을 인용해봅니다. “여성과 픽션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했는데, 자기만의 방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시겠지요? 이제 설명해볼게요. 여성과 픽션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저는 강둑에 앉아서 그 두 낱말의 의미를 생각해보았어요. 단순히 생각하면, 패니 버니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고, 제인 오스틴에 대해서는 그보다 조금 더 길게 이야기 한 다음[…]개스켈 부인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면 충분할 것 같고, 또 보통은 그렇게 하겠지요[…]제게 여성과 픽션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예요. 그래서 저는 원래 주제에 대한 결론을 대신해서, 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자기만의 방과 돈에 대해 지금과 같이 생각하게 되었는지 보여드리려고 해요. 지금의 결론에 이르기까지 저를 이끈 생각의 흐름을 여러분 앞에서 되도록 있는 그대로 자유로이 전개해볼 생각이예요[…]청중이 화자의 한계와 편견과 개성을 지켜보며, 그들 나름대로 결론을 이끌어낼 기회를 제공할 뿐이예요.”-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단순히 생각하면’ 이하의 내용은 그야말로 오늘날 챗GPT가 가장 잘 쓸만한 내용입니다. “챗GPT, 여성과 픽션의 역사에 대해 말해줘”라는 질문에 대해서요. 하지만 <자기만의 방>이 한때 잊혀졌다가,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재발굴 되어 20세기의 100대 고전에 이르기까지 궤적은, 바로 ‘단순히 생각하면’을 과감히 버리고 그 이후 “결론에 이르기까지 저를 이끈 생각의 흐름”을 따라갔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버지니아 울프의 손을 붙잡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때론 맘에 안들어 째려보기도 하고 때론 입을 벌리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한줄 요약’이나 ‘결론’이 뭐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 생각이 타고 가는 궤적이니까요. 그러고보면 제가 지금까지 좋아했던 책들의 공통점은 ‘서문’에서부터 저의 멱살을 확 끌어당겼다는 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독자가 마치 자기 앞에 있는 것처럼 직접 숨가쁘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런 책은 수백년의 세월이 지나도 마찬가지로 어떤 독자든 꿀잠에 빠지지 않게, 멱살을 잡고 이리저리 흔듭니다. 이런 글들은 ‘그럴듯함’의 순간을 비웃듯 뛰어넘는 대목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멱살을 잡히는 글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습니다. 챗GPT가 어쩌면 그런 노정에 일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우려대로 문자의 발명이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진 않았듯이요. 🖍 “예술은 보이는 것을 다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든다.”-파울 클레 |
|
|
Paul Klee, Twittering machine(Die Zwitscher-Maschine), 1922 /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City |
|
|
1)이는 기사 자체의 한계라기보다는, 손이 부족한 상황에서 ‘데일리 기사들’을 양산하다보니 나오는 한계에 가까울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 흔한 전제 자체를 의심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한발 더 들어가 설득할 수 있는 팩트와 논리를 치열하게 고민한 훌륭한 기획기사들도 있습니다. 글속 한문장이나, 해찰 피드에선 주로 이런 반짝이는 기사나 칼럼들을 소개해드리고 있습니다. |
|
|
👤2월의 해찰 피드 : #2023,노동의풍경 #스타일에 대하여 |
|
|
2월 한 달간 SNS에서 특별히 이슈가 되었던 기사, 이슈가 된 사건 등에 대해 생각해볼만한 좋은 칼럼 등을 소개합니다. #스타일에 대하여 보통 어떤 사람이나 현상을 볼 때 '사소한 스타일'보다는 '본질'에 주목하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본질에 대한 평가는 처한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으며, 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단이 마땅찮다고 할 때 과연 스타일을 '사소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또한 어떤 경우엔 겉모습, 스타일의 점진적인 변화가 진정한 변화의 씨앗이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정치와 스타일’과 관련해 해찰할만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
|
|
바보야, 문제는 스타일이야 독서 시간: 약 7분 / 글자수 : 약 3200자
👤글 속 한문장 “긍정평가 이유로는 ‘결단력이 있어서’가 33%로 가장 많았고, 부정평가 이유로는 ‘독단적이고 일방적이어서’가 34%로 가장 많았다. 똑같은 언행이라도 지지자들은 ‘결단’으로 보는 걸 비판자들은 ‘독단’으로 본다는 것이니, ‘결단’과 ‘독단’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걸까? 결단과 독단의 차이는 무엇일까? 없다. 사실상 같은 말이다[...]마키아벨리는 정치가 ‘본질(what is)’의 영역이 아니라 ‘외양(what appears)’의 영역에 속하는 걸로 보았다.“ 정치 지도자의 ‘스타일’에 대해 고찰한 강준만 칼럼입니다. 흔히 어떤 정치인에 대해 말할 때 지지자들은 '겉모습'이 아닌 '알맹이'를 보라고 하지만, 과연 양쪽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으면 알맹이라는 게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며, 결국 스타일도 각자가 쌓아온 습관의 역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때 스타일만큼이나 누군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독서 시간: 약 4분 / 글자수 : 약 1700자 👤글 속 한문장 “수시로 소통해야 하는 상원의원이 자막 생성기에 의존하는 점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지만, 미국 의회는 그 자체가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분위기였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태미 덕워스 상원의원이 당선되자, 상원은 그녀를 위해 경사로를 새로 설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경험도 있었다. 덕워스의 휠체어와 페터만의 자막 생성기를 달리 볼 이유는 없다는 것이고, 동료 의원들은 자신들이 페터만의 자막에 적응하면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치인'하면 어떤 이미지나 스타일이 떠오르시나요?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상은 정장 입은 중년 남성 비장애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최근 미국 정가에선 존 페터만이라는 연방 상원의원이 이슈라고 합니다. 그는 선거 유세 도중 뇌졸중을 겪었는데요. 극적으로 기사회생했지만 토론 시에 자막생성기 등 보조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통상 외견을 부차적인 것 취급하곤 하지만, 현실에선 다른 스타일의 존재가 '드러나 보이는 것'의 힘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
|
#2023,노동의풍경 노동을 다룬 글이나 기사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노동이라는 특정한 카테고리’ 안의 이야기처럼 여겨지지만, 기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진로, 삶의 안정감, 장래희망, 결실, 여가, 노력의 대가, 사회적 지위, 경제적 기반, 예측 가능성, 의식주, 보람, 인간관계 등을 전부 아우르는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 과연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생각이 꼬리를 잇습니다. 노동이 ‘도박’이 되고, 마음과 몸을 다친 사람이 제대로 위로받지 못하는 사회가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한국이 올해 OECD 38개국 가운데 삶 만족도 지수 36위라는 소식( 링크)은, 어쩌면 2023,노동의 풍경에 대한 응답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
|
노동은 도박이 아니다 독서 시간: 약 3분 / 글자수 : 약 1200자
👤글 속 한문장 “고스톱에서 ‘고박’을 쓴 것처럼 보너스는커녕, 1시간 동안 고작 6000원을 손에 쥐었다. 터덜터덜 가게를 나오는데 앱이 5000원짜리 콜을 수락하겠냐고 물었다[...]콜을 거절하면 7000원으로 오른 콜이 올 수도, 3500원으로 하락한 콜이 올 수도 있다. 60초의 제한 시간 동안 삶을 건 도박이 벌어진다. 필 존스는 저서 <노동자 없는 노동>에서 플랫폼 경제와 위탁계약, 건당 임금이 확대되면서 임금이 도박처럼 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웹툰 플랫폼은 작가에게 원고료 대신 최소개런티(MG)라는 이름의 제작비를 선금으로 주는데, 추후 작품 수익이 나지 않으면 몇 배로 갚아야 할 작가의 빚이 된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의 칼럼입니다. 임금이 도박처럼 변하고 있다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혹자는 이에 대해 ‘능력대로 받는다’고 할 수 있지만, 모든 업계가 전반적으로 이렇게 흘러간다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동료의 산재를 눈앞서 본 ‘생존노동자’ 독서 시간: 약 12분 / 글자수 : 약 6900자 👤글 속 한문장 “중대재해 발생 4~5년이 흘렀어도 현장에서 이를 목격한 노동자들은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산재 예방책을 마련하지 않은 회사에 대한 분노보다 스스로 아무것도 못했다는 죄책감과 무기력함이 컸다. 이들은 산재 목격자이면서 동시에 산재로부터 살아남은 생존 노동자다. ‘생존 노동자’들은 인터뷰 중간중간 괴로운 듯 크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때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 전남 장성의 한 골판지 공장에서 일하는 김성철씨는 3년 사이 동료의 산재 사고를 두번이나 목격했습니다. 눈 앞에서 사고 현장을 본 노동자들은 커다란 트라우마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아무 문제 없이 다시 공장을 가동'하는 것에만 주목하는 사회 때문에 이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지도 못합니다. 이번 경향신문-양선희 직업환경의학과 부교수 조사에 따르면 생존노동자의 74%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시리즈 2회는 이쪽( 링크)입니다. |
|
|
노인 지하철 요금과 실버 택배 독서 시간: 약 6분 / 글자수 : 약 2600자
👤글 속 한문장 “이날 기자가 만난 세 명의 노인은 각각 1만1200원, 1만500원, 9100원을 벌었다. 노인 택배원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면 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세 건의 택배 운임 단가를 합치만 4만4000원. 이 중 수수료 30%를 제하면 3만800원이 남았다. 기자가 동행하며 지출한 지하철 요금 총액은 1만1900원. 하루 벌이의 약 40%에 달하는 이만큼이 고령층 무임승차 제도로 떠받치는 임금이었다.“ 고령층 무임승차와 관련해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요. 지하철을 이용해 간단한 물건을 배달하거나 심부름을 하는 ‘실버 택배’를 통해 현실의 한 면을 보여준 동행 르포 기사입니다. |
중대재해법 1주년: 바뀐 것들,바뀔 것들 독서 시간: 약 7분 / 글자수 : 약 3200자 👤글 속 한문장 “(중대재해법 시행 뒤) 안전인력이 많이 늘었다. 언론 보도량이 늘어난 것도 중요한 대목이다. 2020년 미국에서 발표된 논문을 보면 언론 보도 1건이 산업안전감독관이 210번 감독하는 효과를 낸다고 한다.“ 매년 2000여명이 일터에서 사고 혹은 질병으로 숨지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도입된 중대재해법이 실시 1주년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중대재해법 도입 이후 오히려 산재 사망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이 때문에 ‘중대재해법 무용론’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산업안전감독관 출신 강태선 교수에게 질문했습니다. |
|
|
[AI는 붓일까 화가일까? : AI와 창조성] (2022.10.5 발행·링크는 하단 사진) AI와 관련해서 다루었던 회차였습니다. 지난 8월 그림 창작 AI ‘미드저니’로 그린 그림이 수상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었는데요. 당시엔 아직 챗GPT 출시 이전이라 그런지 약간 ‘나와는 먼 일 같다’는 심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일상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당시 다루었던 내용들이 기반이 되어 이번에 챗GPT와 관련된 해찰을 할 때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글 속 한문장’에 실었던 알파고 이후 바둑계의 변화와 관련된 내용은 최근 저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다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은, 이전 레터에서도 썼듯이 - 모두가 “대단한 AI가 대체 무엇을 바꿀까? 무엇을 해낼까?”의 문제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는 와중에,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너무 많지 않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AI에 대한 밝은 전망이 모조리 헛소리라고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AI를 둘러싼 광풍의 일각엔 어떤 중대한 착오가 있는 건 아닐지에 신경이 쓰입니다. 마치 모자에서 뛰쳐나오는 비둘기를 너무 집중해서 보고있다가 마치 그 모자가 비둘기를 품어낸 것처럼 착각하듯이요. 당분간, 아니 어쩌면 평생 - 이런 고민들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속해서 가져가야 할 물음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
|
|
오늘 레터는 여기까지입니다. 레터를 잘 보셨다면 아래 '피드백 남기러 가기'에 간단히 감상이나 의견을 남겨주세요. 오늘도 레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
|
|
인스피아 I khnewsletterkh@gmail.com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