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피아] 🎓얼룩말 세로의 서사, 사람의 서사

얼룩말 세로의 서사, 사람의 서사

Sero the zebra breaks free from a zoo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81), 2023.4.5,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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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얼룩말, 서사, 이야기, 위험, 과학

1.머리말
2.이야기는 재미 본능이다 : <스토리텔링 애니멀>
3.이야기는 생존 본능이다 : <착각의 쓸모>
4.최상급 서사는 최상급 지옥인가? : “the Story Paradox“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지난달 23일 ‘얼룩말 세로의 동물원 탈출 사건’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일련의 보도에서 제 시선을 끌었던 것은 으레 ‘동물원 탈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따라붙곤 하는 ‘서사’였습니다. 이번 세로 탈출 사건에 얽힌 서사 대강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엄마 아빠를 잃고 슬퍼하던 얼룩말은 고뇌에 빠져 성격이 괴팍해지고 캥거루와도 싸우다. 이윽고 좌절과 비통함을 참지 못한 얼룩말은 대대적인 탈출을 감행하지만, 그에게 있어 바깥 세상은 부조리하고 적대적이다. 곧 붙잡혀 원래 있던 곳으로 귀환한 얼룩말은 조금 삐졌으며, 이 사소한 문제는 향후 짝짓기를 통해 해결될 예정이다...”

만약 여기서 주인공 ‘얼룩말’, ‘캥거루’ 대신 조금만 난해한 이름을 쓰면 비극의 플롯같은 느낌도 들 것 같은데요.

흥미로운 점은, 기실 이 ‘사건’을 모든 수식을 빼고 건조하게 보자면 - 단지 “아프리카에서 자유롭게 무리 생활을 하는 포유류로 태어난 한 그랜트얼룩말이 동물원에서 gps 상으로 수km 이동하다가 3시간만에 본래 위치로 이동한 ‘거취 이동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룩말 거취 이동 현상’이 사람들의 ‘이야기 짓기 욕구’에 의해 순식간에 얼룩무늬 주인공을 가진 한 편의 비극 서사가 되어버린 것이죠. 이를 통해 사람들은 대도시에 난데없이 얼룩말이 돌아다니는 부조리한 장면에 대해 친숙한 서사로 ‘이해’하고 일단 ‘마음 편하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룩말 세로는 ‘동물원의 대스타’가 되었다고 합니다.(링크)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인간에게는요.

얼룩말 세로와 배달 기사가 광진구의 한 주택가에서 마주친 채 둘 다 어리둥절해진 장면(왼쪽)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세로의 탈출 사건을 보도하면서 '엄마 찾아 뛰쳐나왔다' '캥거루와 다퉜다' '삐졌다' 등의 인간 중심적 서사들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사람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소설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우리가 편한대로 많은 이야기를 짓고 빠져들곤 합니다. 얼룩말 세로의 사건에서 알 수 있듯, ‘이야기’는 우리가 어떤 사건, 정치, 나의 삶 등 대부분의 현실을 바라보는 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서사를 통해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고, 어려운 현실을 감내하는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편 서사로 인해 우리는 얼룩말 세로의 사례처럼 자기 중심적으로 세상을 왜곡하고, 고집불통 성채 안에 들어앉는 위험한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시대의 양극화, 음모론 등 주된 문제들이 상당수 ‘이야기탓1)’이라는 지적도 나오죠.

그리고 저는 이번 기회에 ‘세로의 탈출 사건’을 ‘동물권’이란 차원 대신 ‘서사’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왜 서사를 사랑할까요? 서사엔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왜곡의 위험에 주의하면서 ‘이야기하는 동물’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레터에선 조너선 갓셜의 <스토리텔링 애니멀>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그리고 샹커 베단텀 등의 <착각의 쓸모>를 지팡이 삼아 ‘서사’에 대해 해찰해볼까 합니다.

1)오늘 레터에선 ‘서사’라는 단어와 ‘이야기’라는 단어에 의미 차이를 두지 않고, 주로 서사라는 단어를 쓰되 이야기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겠습니다. 조너선 갓셜에 따르면 ‘서사’는 픽션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서술”입니다. 그리고 이 '서사'에는 '투명한 서사'와 '빚어낸 서사'가 있는데, 이중 투명한 서사는 아무런 매력을 갖지 않는 단순 사건의 나열이고, '빚어낸 서사'는 인간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흥미롭게 지어내는 서사를 뜻합니다. 이중 저자를 비롯한 스토리텔링 연구자들이 주목하는 서사는 후자입니다.

【2.이야기는 재미 본능이다 : <스토리텔링 애니멀>】

한 흥미로운 실험을 소개하겠습니다. 1944년 심리학자 프리츠 하이더는 사람들에게 90초짜리 짧은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커다란 세모와 작은 동그라미, 세모와 선 몇개가 왔다갔다 하다가 끝나는” 단순한 영상입니다.

연구진은 114명의 사람들에게 해당 영상을 보여주고 난 뒤 ‘느낌’을 물었는데요.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흥미로웠습니다. “그냥 세모랑 동그라미가 왔다갔다 하네요...”라는 식으로 응답한 사람은 전체 중 단 3명(2.6%)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이 단순한 세모 동그라미의 이동을 한 편의 흥미진진한 영웅, 구출 서사로 읽어냈다고 하죠.

심리학자 프리츠 하이더의 실험. 이쪽을 클릭(영상링크)하시면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왼쪽) 찰스 윌리엄스의 그림 <현대 교육의 장점Advantages of Modern Education>(1825·링크). 한 주부가 부엌에서 냄비가 타는 것도 모른 채 소설책에 몰입하고 있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린 것입니다. 조너선 갓셜은 어떤 이야기에 몰입하면 주변을 까맣게 잊을 정도로 몰두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사과학 연구자인 조너선 갓셜은 <스토리텔링 애니멀>에서 사람을 ‘못말릴 정도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움직이는 세모, 네모 모양에서조차 나도 모르는 사이 스토리를 찾을 정도로요.

그럼 궁금증이 듭니다. 왜 이렇게 우리는 이야기를 사랑할까요?

이에 대해 저자는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이니까!”라고 합니다. 사람은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스스로 의식도 못한 채 푹 빠져들게 되는데요. 마치 벌이 꿀에 이끌리듯요.

이런 경험은 연구자님들도 종종 해보셨을텐데요. 어떤 소설을 읽을 때 처음엔 창문에 붙은 파리도 물끄러미 보고, 손톱도 보고 하다가 - 어느 순간 몰입하기 시작하면 주변을 완전히 잊고 책 속 이야기에만 빠져들게 되는 경험이죠. 소설 뿐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보거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저자는 이처럼 이야기에 빠져드는 본능을 ‘동굴 벽화의 시대’부터 ‘틱톡의 시대’까지 이어지는 인간 고유의 특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재미난 이야기를 꾸며내고 또 들음으로써 복잡한 세상을 쉽고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요는 서사란 단순히 ‘픽션’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는 창문이라는 거죠.

이야기는, 그리고 이야기를 닮은 온갖 활동은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모든 사람의 뇌에는 작은 셜록 홈스가 들어있다. 그의 임무는 지금 관찰되는 것을 '역추리'해서 특정한 결과로 귀결된 원인의 질서 정연한 연쇄를 밝히는 것이다[...]이야기하는 마음은 중대한 진화적 적응이다. 그 덕에 우리는 삶을 일관되고 질서 정연하고 의미 있게 경험한다. 삶이 지독하고 소란스러운 혼란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조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이하 동일)

우리를 끌어당기는 ‘서사’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저자는 국가, 시대를 막론하고 먹히는 서사들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서사의 보편 문법이라고 할만한 것인데요. 바로 서사들은 이런 플롯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이야기 = 인물 + 어려움(말썽) + 탈출 시도

즉, 거꾸로 보자면 이중 하나라도 없는 것은 우리를 흠뻑 빠져들게 하긴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고는 곰곰 떠올려봤습니다. 만약 “둘리는 아침에 양치하고 지하철 타고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길에 치킨맛 과자를 구입했다”라는 A 이야기와, “둘리가 타고 있던 출근길 열차가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라는 B 이야기가 있다면 이중 당연히 B 이야기에 더 귀가 솔깃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죠.(과자를 사서 나오다가 맨홀에 빠지거나 하지 않는다면요) 기사든 광고든 영화든, 모든 이야기에서 말썽이야말로 우리의 시선을 붙드는 핵심 요소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재밌는 연구가 있는데요. 20세기 미국 소설 등장인물의 사망률이 현실에 비해 무려 열 배 이상 높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말썽이 등장하는 순간 긴장하고 숨을 꿀꺽 삼키며 이야기에 빠져든다는 것이겠죠.

우리가 픽션에 끌리는 이유는 픽션이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픽션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협박, 죽음, 절망, 불안, 질풍노도 등은 대부분 지독하게 불쾌하다[…]한 마디로 장르를 불문하고, 곤란한 문제가 없으면 이야기도 없다[...]픽션은 예나 지금이나 종으로서 인류가 성공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과제들에 반응하도록 뇌를 연습시킨다.

저자에 따르면 이처럼 ‘말썽’이 서사의 핵심 요소인 이유는, 서사가 ‘가상 현실 시뮬레이션’을 통해 삶을 대리 체험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말썽이 해소되는 것을 보며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꿈’ 역시 우리의 이야기 본능에서 나온 것인데요. 꿈에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대리 체험하고 해소하는 ‘삶 리허설’을 진행한다는 거죠. 꿈에서 주로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문제 상황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하고요.

한 사람이 등장하고 그가 지닌 문제가 ‘어떤 물건’을 통해 해결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뿌리 깊은 광고 서사입니다. 개비스콘 광고 밈이 '짤 생성기'(링크)까지 생길정도로 인기를 끈 데는 누구나 간편하게 한장짜리 인상적인 압축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겠죠.(왼쪽) 소설 <1984>를 패러디해, 빨간바지를 입은 여성이 달려와 빅브라더의 연설이 송출되는 화면을 도끼로 깨버리는 애플의 전설적인 매킨토시 광고(1984·영상). 제품에 대한 설명 없이 단지 한 영웅이 나타나 독재 권력을 깨부순다는 '서사'만이 담겨있죠.

이야기는 힘이 셉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야기에 각별히 신경을 쏟아왔죠. 특히 누군가를 설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요.

누군가의 마음, 행동을 바꾸기 위해선 반드시 이야기를 장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브랜드나 인물, 정책 등에 매력을 느낀다고 할 때, 실은 거기에 얽힌 ‘서사’에 빠져드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각본 없는 격투 스포츠도 (각본이 짜여진 프로 레슬링과) 비슷한 스토리텔링 관습을 따른다. 권투 프로모터들은 선수에게 강렬한 개성과 흥미진진한 뒷이야기가 없으면 팬들의 관심을 끌 수도, 지갑을 열게 할 수도 없음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기업 임원들은 창조적 이야기꾼이 되라는 조언을 듣는다. 소비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도록 제품과 브랜드에 대해 감동적인 서사를 만들어내라는 것이다. 정치평론가들이 생각하는 대통령 선거는 카리스마있는 정치인들이 이념 대결을 펼치는 장일 뿐 아니라 나라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상충하는 이야기가 경쟁하는 장이기도 하다. 법학자들도 재판을 이야기 경연 대회로 본다. 검사와 변호사는 누가 진정한 주인공인지 가려내기 위해 유죄와 무죄의 서사를 구성한다.

저는 이 대목에서 책을 잠시 펼쳐둔 채 새삼스레 제 주변의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서사’의 렌즈로 떠올려보았습니다. 의외로 굉장히 많은 것들이 이 틀에 들어맞았는데요. 그리고 재밌는 사실은, 제 안에서 뚜렷하게 떠오르는 ‘(한 줄 요약 가능한) 서사’가 바로 내가 그 콘텐츠를 인상깊게 기억하거나 사랑하는 핵심 요인이기도 하다는 것이었죠. 반대로 그런 ‘서사’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것에 대해선 그닥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뿐더러, 기억 속에서 쉽게 잊혀지고 말았죠.

제가 좋아하는 다수의 리얼리티쇼나 오디션 경연 프로그램 등도 실은 ‘현실성’이라든지 ‘능력치’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그 쇼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서사에 매력을 느껴 가슴을 두근대며 TV 앞에 앉았던 것이었고요.2) 스포츠 역시 선수들의 기량 그 자체에 감탄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팬들은 기량 뿐 아니라 선수나 라이벌과 얽힌 ‘서사’ 때문에 그를 더욱 사랑합니다.

기사를 읽을 때도 그 사람의 인터뷰, 사연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지는 글을 좋아했던 이유가, 나는 실은 그 안의 ‘이야기’를 좋아했던거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제 이런 인간의 ‘이야기 덕후적 모먼트’를 자극한 이야기식 기사(내러티브 기사, 뉴저널리즘)의 유행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링크)

이 책을 덮으면서는 ‘이야기가 정말, 상상 이상으로 나의 삶 구석구석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어 깜짝 놀랐고요.

이야기는 우리에게 애착, 몰입의 즐거움 뿐 아니라, 말썽을 대리 해소하는 것을 통해 쾌감도 줍니다. ‘소란한 바깥 세계’를 더 쉽게 이해하게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요.

이어서 이야기는 ‘바깥 세계’ 뿐 아니라,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졌습니다.

2)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특정 출연자의 ‘서사’를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악마의 편집'이라는 악평이 붙곤 하지만, 결국 투덜거리면서도 보게 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3.이야기는 생존 본능이다 : <착각의 쓸모>】

“나는 반갑지 않았던 사람을 만나도 늘 ‘만나서 반가워’라고 말한다. 살고 싶다면,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한다.” - J.D.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재미난 이야기는 ‘인물 + 말썽 + 해결시도’라는 틀거리를 통해 바깥 세상을 잘 이해하게 해주는데요.

여기서 등장인물이 ‘나’가 되면 그 이야기는 결국 나의 삶 그 자체가 됩니다. 우리는 삶의 매 순간순간 말썽에 맞닥뜨리고, 이에 대해 해결을 시도하려는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 다발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심리 치료는 내담자의 트라우마, 상처를 정의해, ‘내가 주인공인 극복 서사’에 편입시켜 의미화해주는 과정이라고 하기도 하고요.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같지만, 실은 매 순간 나의 주변을 ‘서사’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고 있습니다.

영화 <매트릭스>에는 빨간약과 파란약이 나옵니다. 빨간약을 먹을 경우 '고통스런 현실'을 알게 되고, 파란약을 먹을 경우 안온한 상태에 머무르게 되죠. <착각의 쓸모>를 쓴 샹커 베단텀은 사람들은 으레 어느정도는 '자기 나름의 파란약'을 먹은 채 살아가게 되고, 그것이 생존에도 직결된 '쓸모'라고 합니다. 이게 곧 '자기 버전의 서사'겠죠. wikipedia

과학 저널리스트 샹커 베단텀과 빌 메슬러가 쓴 책 <착각의 쓸모>는 ‘착각’에 대한 내용이지만, 그 착각이라는 것이 대체로 사람이 ‘현실’을 ‘다른 방식(감내하기 쉬운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점에서 - 서사에 대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의도된 착각의 대표적인 사례인 ‘플라시보(Placebo·‘기쁘게 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 대해 플라톤은 내과 의사의 ‘말’을 통한 치료 효과를 기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환자에게 ‘약’대신 ‘기쁜 서사’를 심어줌으로써 실질적인 치료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착각을 통해 힘든 세상을 ‘그나마 살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들은 3주 후 굉장히 힘든 수술을 앞둔 환자의 이야기를 소개하는데요. 이 수술 과정은 무척 고통스럽고, 수술 이후에도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때 수술을 앞둔 환자에게 힘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줘야 할까요? 혹은 ‘수술 별로 안 아프대. 빨리 나아서 놀이공원에 가자’라고 말하는 게 나을까요?

생존하기 위해선 어느정도 낙관적인 버전의 서사가 필요한 법입니다. 현실에서 의지할 데 없는 약자일 수록 한층 더요.

심지어 저자들은 착각이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진화해 온 능력이라고 짚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좋은 세상이란 이야기가 없는 세상이며, 우리가 오직 앞에 놓인 사실들만 보아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곳은 우리의 모든 행동에 플라세보 효과가 개입되지 않도록 통제된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뇌가 작동하는 방식, 뇌가 작동하도록 '고안된' 방식을 부정하는 일이다. 진화는 우리의 정신이 이야기와 암시, 상상력과 자기기만에 촉각을 곤두세우도록 만들었다. 수억 년 동안 자연선택을 통해, 이야기를 처리하는 정신의 능력이 유전자를 더 잘 전달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샹커 베단텀 외, <착각의 쓸모>(이하 동일)

또한 UCLA의 심리학자 셸리 테일러는 자애로운 자기기만에 대해 “긍정적 환상”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는데요.

테일러는 1988년 한 실험 결과 이런 긍정적인 환상이 사람의 심리 건강에 필수 요소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반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경향이 있는 냉철한 사람들이 우울증을 겪는 비중이 훨씬 높았다고 하죠.

“정상적인 성인들은 자신에 대해 비현실적이리만큼 긍정적인 관점을 가졌으며, 환경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 역시 과도하게 신뢰했다. 또 자기 미래가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나으리라고 생각했다[...]이에 더해 다소 침울하거나 자기를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런 과도한 환상을 가지지 못한 상태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꽤 흥미로웠는데요. 통상 이런 자기 과신, 착각 성향은 ‘올바른 현실 인식’을 위해 반드시 피해야 할 단점으로 언급되곤 했기 때문이죠.

연장선상에서 저자들이 비중있게 인용하고 있는 사례는 1980년대 버전의 희대의 로맨스 스캠(연애를 가장해 돈을 빼돌리는 사기 수법)에 대한 것입니다. 사기범 일당은 ‘사랑의 교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 가상의 수도원 ‘코다사’에 사는 순결한 여성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 펜팔을 통해 3만여명의 남성들로부터 한 해에 백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얻었습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1997)에서 아들과 함께 나치 수용소에 갖힌 귀도는 아들에게 이것이 모두 탱크를 얻기 위한 흥미진진한 게임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왼쪽) 미, 캐나다 일대에서 1980년대 기승을 부린 로맨스 스캠 사건('사랑의 교회 사건')의 가해자들이 자신들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소식이 1987년 지역 신문에 실렸습니다. IMDB / Newspaper.com

인상깊은 대목은 ‘피해자’들이 범죄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해자를 옹호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죠. 피해자들은 대부분 가족을 잃거나, 기댈 곳 없이 외로운 사람들이었고, 실직을 당하는 등 삶의 어려운 국면에 처해있었습니다. 저자들은 말하죠.

“조셉(피해자)에게 이 관계는 그의 인생에서 존재했던 ‘진짜 관계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의미 있었다.”

실제 로맨스 스캠 가해자 일당의 변호사는 전설적인 ‘산타클로스 변론’을 합니다. 약자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판타지’를 주었으니, 이들은 사기범이 아닌 ‘산타클로스’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증거는 판타지에 대한 증거입니다. 사기에 대한 증거가 아닙니다. 이것은 돈 로리가 회원들을 위해 만든 판타지입니다. 아이들이 산타클로스 판타지를 즐기듯이, 아무 해도 끼치지 않습니다(돈 로리 측의 변호사 변론 中)”

깜짝 놀랄만큼 뻔뻔한 변론인데요. 저는 이 대목에서 약자들의 취약함, 외로움을 파고든 사이비 종교들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백히 이들의 말이 헛소리이지만 - 이를 단지 ‘악마’와 ‘피해자’의 구도로만 보았을 때는 많은 것들을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에게 고된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매력적인 서사’를 제공했고, 이들은 자신의 삶에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반면 현실의 누구도 그들에게 현실적인 위안이나 서사를 줄 수 없었죠. 저자들은 이 책의 말미에서 ‘만들어진 서사’와 그것이 주는 ‘위안’을 종교, 역사(국가)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합니다.

서사가 개인의 삶과 사회에 가진 힘은 너무나도 굉장합니다. 서사는 우리의 지리멸렬하고 고된 삶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실제로 어떤 종류의 고난을 감당할 힘을 주며, 우리가 부조리한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특히 현실에서 더 큰 고통을 갖는 약자의 경우에는요. 이 책을 읽다보면 깜짝 놀랐다가도, 어느 대목에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우리 모두 정신 건강을 위해 열심히 착각을 하며 살자!”라고 외치기엔 역시 찝찝합니다.

결혼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순결한 소녀가 사는 수도원 ‘코다사’는 현존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언젠가는 ‘거친 현실’에 맞닥뜨려야 했을 것이며, 환자는 죽을만큼 힘든 수술에 결국은 맞닥뜨려야 할 것입니다. 착각이 다소의 위안을 줄 순 있다고 해도 밑바닥의 ‘현실’은 분명히 바꿀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간과해선 안되는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 인물로 한 서사’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결국 서로 대화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한 이야기에 주인공이 둘일 순 없으니까요. 특히 서로 적대하는 관계라면요.

그런데 하필 매력적인 이야기의 핵심 요소는 ‘말썽’이고,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은 서로를 (해치워야 할) 대단한 말썽꾼으로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

“사람들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 이야기는 문제가 필요하다. / 문제는 일으켜줄 악당이 필요하다” - 조너선 갓셜,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4.최상급 서사는 최상급 지옥이다 : “Story Paradox“】

위에서 살펴봤듯, 서사에는 매력만큼이나 뜨거운 위험성 또한 존재합니다.

<스토리텔링 애니멀>(2012)을 통해 경쾌한 어조로 ‘이야기의 매력’에 대해 말했던 조너선 갓셜은 약 10년 후 신간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2021·이하 <호모 픽투스>)을 품에 안고 돌아왔습니다. 표정은 훨씬 심각해진 채로요.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의 영어 원제는 <스토리 패러독스The Story Paradox>입니다. 스토리의 매력엔 '역설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죠.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집약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왼쪽) 열렬한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

조너선 갓셜이 <호모 픽투스>에서 강조하는 핵심 메시지는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야기가 ‘필수적 독’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하는데요.

서사는 매력적인만큼 사람들이 현실과 상관 없이 거짓을 찰떡같이 믿게 만들기도 하고, 이 때문에 혐오 및 갈등이 들불 번지듯 사회에 퍼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맛있는 독’을 먹듯, 수많은 해로운 서사들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서사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주된 연장이다. 하지만 위험한 헛소리를 지어내는 주된 연장이기도 하다[...]나는 스토리텔링을 인류의 ‘필수적 독’으로 여긴다. 필수적 독이란 인류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치명적일 수도 있는 성분을 일컫는다[...]가장 시급한 질문은 케케묵은 ”어떻게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가 아니다. ”어떻게 이야기로부터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다.

-조너선 갓셜,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이하 동일)

이처럼 그가 돌연 심각해진 결정적인 계기는, 트럼프의 당선이었는데요.

트럼프 당선은 갓셜에게 있어 굉장히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그 자체가 ‘이야기의 화신’이라고 할만한 사람이었고, 그의 승리는 곧 ‘매력적인 이야기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쉬운 말과 먹혀드는 서사로, 이 시대에 가장 똑똑하게 이야기의 매력을 활용할 줄 아는 ‘천성 이야기꾼’이었습니다.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란 슬로건은 완벽한 서사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서사의 주인공은 ‘트럼프’를 비롯한 지지자들이었고, ‘다시 위대하게’라는 말엔 ‘모든 종류의 문제’가 숨겨져있었으며(예전엔 위대했지만 현재는 위대하지 않다는 말이니까요), ‘만들자’란 말엔 해소를 위한 노력입니다. 즉 영웅의 서사가 이 한 마디 안에 압축되어 있었죠.

음모론도 대부분 비슷한 서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주인공이고 온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로 짜여있으며, 나에 대항하는 것들은 모두 나를 막아서는 ‘말썽’입니다. 저자는 “음모론이 고전적인 문제 구조를 제시하고 좋은 사람과 나쁜 놈을 깔끔하게 나누”기 때문에 ‘매력적인 이야기’라고 말하죠.

2016년 5월 21일, 텍사스주 이슬람포교원 앞에서 '텍사스의 심장'과 '미국무슬림연합' 시위대가 대치한 사건. 텍사스의 심장은 "선한 텍사스 토박이들이 외국 침입자들 때문에 위협에 빠졌다"는 서사를 전파했는데요. 그런데 사실 이 단체의 기원은 러시아 인터넷연구소IRA에서 만들어진 페이스북 '악플 농장'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관련 보도(CNN)

또한 특히 트럼프와 ‘가짜뉴스’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인데요. 가짜뉴스들은 대체로 훨씬 매력적인 말썽이 담겨있는 ‘훌륭한 서사’이기 때문에 오히려 실제 뉴스보다도 6배나 더 많이, 빨리 전파된다고 합니다.(링크)

흥미를 끄는 매력적인 서사만이 중요한 세상에서, 진실이라든지 반성, 타협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서사의 목표는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방법은 세상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모든 서사는 환원주의적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일관성과 질서를 부여하는 서사를 손에 넣은 뒤에는 으레 반맹목적으로 그것을 지킨다. 자신의 특별한 서사를 잃는 것은 중력이 돌연 사라져 의미가 날아가버리는 사태와 같다[...]우리는 서사 거푸집을 이용하여 자신의 진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날조한다.

이 때문에 저자는 오늘날은 ‘탈진실’을 넘어, 아예 진실이 없는 ‘제로 진실’ 시대가 되었다고 절망합니다. 이야기의 매력만이 중요한 시대엔 누구도 진실을 신경쓰지 않게 된 것이죠. 옛날같으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은 ‘입소문’에 그칠 수 있었겠습니다만, 오늘날엔 SNS 때문에 이런 매력적인 가짜 이야기들은 금세 지구 반대편까지 퍼져나갑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좋은 이야기’의 가치를 헤아리고 있는 것이 너무 순진한 태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저자는 ‘더 나은 이야기’가 아닌 ‘과학’을 되찾자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 과학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 이야기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존재 이유기 때문이다[…]과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자아와 이야기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보도록 강제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과학은 이야기가 우리의 삶에서 마구잡이로 날뛰지 못하도록 막아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플라톤은 <국가>에서 “철학과 시는 옛날부터 사이가 나빴”다고 말한다. 이 투쟁의 토대는 제약 없는 서사를 지어내고 싶은 이야기꾼의 욕망과 진실의 벽을 쌓아 그 서사를 제약하고 싶은 철학자의 욕망이다.

이처럼 저자에 따르면, ‘달콤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진실을 바라보기 위해선 - 때론 의도적으로 ‘과학’의 관점에서 억지로라도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서사를 괄호 속에 넣고 보는 태도죠.

어떤 이야기가 너무 매력적일 때, 나도 모르는 사이 푹 빠져 믿어버리고 싶을 때, 그리고 옆 사람에게 빨리 이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 때, 잠깐 눈을 감고 곰곰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 걸까? 이 이야기의 숨은 ‘주인공’은 누구고 ‘말썽’은 대관절 무엇일까? 그 말썽은 진짜 말썽일까? 오히려 이 국면에선 내가 더 말썽에 가까운 게 아닐까? 말썽이 해결된다면 결국 결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것이 바로 그가 <호모 픽투스>에서 간절하게 시도한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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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증오하고 거부하라 / 하지만 이야기꾼을 증오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라. / 그리고 평화와 자신의 영혼을 위해, / 이야기에 말 그대로 반할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자들을 / 경멸하지 말라” - 조너선 갓셜, <호모 픽투스>

【5.맺음말】

오늘의 해찰을 바탕으로, 레터 서두의 얼룩말 세로 이야기로 되돌아가봅니다.

‘얼룩말 세로의 탈출 서사’는, 일단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설령 그 이야기 방식에서 뭔가 좀 꺼림칙함을 느꼈을지라도, 그 ‘서사’ 자체가 ‘잘 다듬어진, 매력적인 이야기’라서 금세 몰입해서 읽고, 또 입에서 입을 타고 전달되기 썩 좋은 서사였다는 점엔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얼핏 전형적인 ‘인물(의인화된 얼룩말)+말썽+해결 시도’의 서사라고 할 만했죠.

하지만 오늘 조너선 갓셜이 제시한 ‘보편문법’에 따라 얼룩말 서사의 탈출 이야기를 분석해보면 금세 갸우뚱해지는 지점이 드러납니다.

주인공이 되는 ‘인물’ 자리에 얼룩말을 둔다면, 말썽은 얼룩말의 말썽이 되어야 할 것이고, 해결 시도도 얼룩말의 해결 시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처음 얼룩말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갈 때, 이 서사의 주된 말썽은 ‘탈출’이었죠. 이 때문에 얼룩말의 복귀 및 ‘스타 등극’이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던 것이겠고요(=문제 해결).

하지만 저는 의아했습니다. 과연 그 서사 속에 진짜 ‘얼룩말의 말썽’이 들어있긴 했을까요? 부모님을 잃어서 슬퍼진 것? 캥거루와의 다툼? 동물원 울타리를 뚫고 광진구 일대를 달릴 자유를 얻고 싶은 갈망? 이처럼 그의 말썽이 무엇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은데, 과연 해결이라는 게 가능했던 걸까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안심되고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면 그 서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저는 오늘 레터를 마무리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서사를 본능적으로 사랑한다는 점, 그리고 서사의 구조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말썽에 맞닥뜨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냉장고에 계란이 없어서 사러 가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나의 아픔을 해결, 소통하기 위해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까지도요.

저는 생각했습니다. 서사가 ‘문제’가 되는 결정적인 지점은, 인물+말썽+해결 시도 중 무언가가 수상해지는 때입니다.

조너선 갓셜이 <호모 픽투스>에서 말한 음모론자들은 엉망진창의 서사를 통해 현실을 왜곡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바라보는 '말썽'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히틀러는 전형적인 영웅서사를 만들어놓고선, 주인공에 자신(게르만 민족), 말썽에 유태인의 존재를 넣었는데 - ‘그의 투쟁’은 여기서부터 이미 수상합니다. 프랑스의 극우주의자 장 마리 르펜은 과거 프랑스의 한 도시에서 지나가던 중동 청년을 극우주의자들이 살해하자, 그는 여기서 ‘말썽’은 극우주의자의 살해라든지 이민자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라 ‘중동 청년이 그곳에 있었던 것’ 그 자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두려운 점은 평소에 별 의심 없이 이런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그 이야기가 때론 그럴듯하게 들리며, 금세 퍼져나가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작용을 막기 위해 조너선 갓셜이 말하는 ‘서사과학’이 필요한 것이겠죠. 어쩌면 여기에 ‘서사 리터러시’라는 말을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현실에 말썽이 존재하지만 - 그들 입장에서의 서사가 없기 때문에 아예 그것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조차 없다는 문제 또한 존재합니다. 인간 중심의 ‘얼룩말 동물원 탈출-귀환 서사’는 있었지만, 정작 세로의 말썽을 다룬 서사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또한, <착각의 쓸모>에서 많은 약자들이 자신의 문제를 설명하는 서사를 갖지 못해, 해결 시도를 낚아채는 사기꾼들의 서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듯요.

헛소리 서사를 물리치는 동시에 우리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진정한 서사를 찾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선천적인 ‘이야기꾼’인 우리를 부정하거나 혹은 모든 이야기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으론 불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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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Logos(논리,실증)와 미토스Mythos(이야기,환상,신화)의 세상. “미토스와 로고스는 서로 얽혀 있으며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이다[…]논리와 합리성, 즉 로고스가 더 나은 세상에 관한 시각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거기에 미토스, 다시 말해 이야기의 세상, 상징과 신화의 역할이 필요하다.” -샹커 베단텀 외, <착각의 쓸모>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조너선 갓셜, 노승영 옮김, 『스토리텔링 애니멀』, 민음사, 2014.

조너선 갓셜, 노승영 옮김,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위즈덤하우스, 2023.

-같은 저자의 책입니다. 전반적으로 읽기 쉽게 쓰여진 서사/과학에 대한 대중서입니다. 다만 레터에서도 말했듯 두 책의 어조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차이가 큰데요. <스토리텔링 애니멀>에서도 서사의 위험성을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음모론, 히틀러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에선 이야기의 매력, 힘을 강조하며 끝났다면, <호모 픽투스>는 끝까지 '이야기의 힘에 대항하는 서사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결론을 맺습니다.

<호모 픽투스>에선 과거 제가 다루기도 했던, 폴 블룸의 <공감의 배신>(💌지난레터:도저히 싫은 사람에게 공감하기)의 메시지가 중요하게 언급, 연결되기도 합니다. "공감이 잔뜩인 오늘날 왜 혐오가 가득한가? 그것은 결국 공감(이야기)이 갖는 본질적 속성 때문이다"라는 식으로요. 함께 읽어봐도 좋을 책입니다.

샹커 베단텀·빌 메슬러, 이한이 옮김, 『착각의 쓸모』, 반니, 2021.

-이 책은 처음엔 착각에 대한 잡다한 읽을거리를 모아둔 책(두 사람은 모두 학자가 아닌 저널리스트이고 착각에 대한 팟캐스트 진행자입니다)이라고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최근 관심사들과 관련해 붙여 해찰해볼만한 대목이 굉장히 많은 책이었습니다.

오늘 레터에선 거의 다루지 않았지만, 이 책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헌신’인데요. 어떤 일에 대한 표면적 가치보다도 내가 거기에 들인 ‘헌신(노력, 비용)’이 만족감을 주는 핵심 요소라는 것이고, 이는 현대 사회에도 메시지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일체의 ‘헌신할 필요’가 사라진 사회가 꼭 개인에게 긍정적일 것인가?에 대해서요. 관련 아이디어에도 관심이 있으시다면 가볍게 읽어볼만합니다.

마크 크레이머 엮음, 최서현 옮김, 『진짜 이야기를 쓰다』, 알렙, 2019.

-이 책의 부제는 '하버드 니먼재단의 논픽션 글쓰기 가이드'입니다. 내러티브 기사를 고민하는 다양한 기자들의 에세이, 취재 및 글쓰기 팁이 모여있습니다. 이 책의 서두(한국어판에 부쳐)에 소개된 문학에 대한 두 상반된 시각이 인상적인데요. “사회과학은 폭력의 논리다. 결코 인간을 구제하지 못한다. 오직 문학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송호근 교수)”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모두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김훈 소설가)”

오늘 레터를 읽고 나서 어떻게 '서사'와 '사실'이 엮여들 수 있을지에 대해 더 고민을 해보고 싶으신 분들, 논픽션 글쓰기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분들, 기자 및 지망생에게 추천합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탈Zoo? 삐졌다? “얼룩말 탓하는 서사”

독서시간: 약 7분 / 글자수: 약 4200자

🖍글 속 한 문장

“동물한테 반항했다, 싸웠다, 심지어는 삐졌다. 데리고 와서 삐졌다.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이게 잘못된 의인화의 전형적인 예라고 생각을 하고요. 이게 예컨대 동물이 무서워서 일상적인 행동을 못하는 상황을 두고 삐졌다. 이렇게 표현을 하면 삐진 주체인 동물을 탓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관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곰 보금자리프로젝트 대표인 최태규 수의사의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입니다. 섬네일을 클릭하면 방송 스크립트로 연결되며, 영상은 이쪽입니다.(영상)

‘의인화’란 결국 인간 입장에서의 서사이며, 이는 당연히 얼룩말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겠죠. 이는 동물-인간 간의 관계 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서사를 공유하는 집단 간에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야기, 스토리텔링의 힘

영상 / EBS 다큐멘터리

🖍글 속 한 문장

“정보와 기술로 가득 찬 디지털 시대. 사람들은 오히려 정보가 아닌 이야기를 욕망한다[...]똑같은 물건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사람들은 어떤 것을 선택하게 될까?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재미있고 나를 자극하는 이야기로 가득한 물건을 선택하게 되지 않을까? 삶을 떠도는 수많은 이야기들[...]우리는 오늘 또 어떤 이야기에 초대를 받게 될까.”

👤김스피의 블라블라

이야기를 소재로 한 EBS의 3부작 다큐멘터리입니다. 위의 섬네일을 누르시면 EBS 공식 유튜브의 조각 영상으로 이동합니다. 전체적인 흐름은, 이야기의 역사와 매력적인 이야기의 조건을 짚어보고,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마케팅, 정치 등의 영역에서 절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지를 살폈습니다. 해당 다큐의 내용은 2011년 책으로도 출간되었습니다.(링크)

얼룩말 세로의 서사, 뻔뻔한 도둑질

독서시간: 약 3분 / 글자수: 약 1400자

🖍글 속 한 문장

인간이 동물에 빗대어 스스로를 설명하는 역사는 유구하다[...]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소통이 쉽지 않은 동물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때로 그에게 매우 인간적인 서사를 부여한다[...]우리가 세로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며칠째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게 뭐가 되었든 세로의 이야기에 씌워놓은 고삐부터 풀어야 할 것 같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얼룩말 세로 서사’와 한 정치인의 세로 관련 비유(링크)에 부친 손희정 문화평론가의 최근 칼럼입니다. 그는 ‘동물의 의인화’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으며, 다만 의인화의 질을 따져봐야한다고 말합니다. 세로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필자의 결론에 공감했습니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도, 이야기의 힘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광고 ‘서사’ 속 이데올로기

독서시간: 약 4분 / 글자수: 약 1800자

🖍글 속 한 문장

“1997년 외환위기 시절 공익광고 <다시 뜁시다> 편은 경제 위기에 대한 원인 규명을 하거나 정부의 책임을 묻기보다는 국민들이 힘을 합해 나라를 구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찾아온 신용대란 시기의 공익광고 <늪>에서는 신용불량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거론하고 개인의 올바른 소비 태도를 일깨운다. 하지만 이면의 정부의 정책 실패의 영향과 자본주의 체제 내의 불합리성은 광고 표면에서 사라진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광고를 ‘서사’ 차원에서 다시보는 것에 대한 글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신화론>에서 인위적이지만 사람들이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을 ‘신화’라고 정의했는데요. 여기엔 광고 속 서사들도 해당하죠. 친숙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서사들을 괄호 안에 넣고 볼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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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차(‘‘중요한 질문’과 ‘사소한 질문’?[3월의 김스피]’)에 대한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모아 소개합니다. 편지로 다양한 의견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 버튼을 누르면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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