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슈퍼맨’이 돼야 한다: 고립 돌봄 사회 We all depend on each other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09), 2023.12.13,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Archi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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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영케어러, 간병, 관계, 고립, 의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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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머리말 2.‘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의 이야기 3.병, 장애라는 ‘낭떠러지’ 4.아픔이 낭떠러지가 되지 않기 위해 : ‘의존’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5.맺음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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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최근 통계청이 ‘인생의 대차대조표(국민이전계정 표시)’를 발표했습니다.(링크) 0세부터 85세까지 그래프를 그려 흑자 구간과 적자 구간을 나눈 것인데요. 이 그래프를 보았다면 누구나 대체로 조금은 뒷목이 서늘하고 아찔한 기분이 들었을 것입니다. 댓글에는 ‘젊었을 때 바짝 벌지 않으면, 적자 구간에 답이 없다’ ‘결국 나이 들면 돈 밖에 의지할 곳이 없다’ 등의 이야기가 적혀있었습니다. 으레 ‘늙음’이나 ‘병’과 관련된 기사의 단골 반응인 ‘아프면 죽어야지’ 등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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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통계청이 발표한 1인당 생애주기 적자 그래프. 인생에서 가장 적자가 큰 시기는 17세로 이후 27세부터 61세까지는 흑자였다가 죽을 때까지 쭉 적자를 유지합니다.(왼쪽) 이런 그래프를 보다보면 마치 산등성이를 혼자 힘으로 넘어야 하는 고독한 이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 통계청, 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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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평범하게 살다가 무난하게 가고 싶을 뿐인데도,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프거나 나이가 들거나 가족이나 본인이 장애를 갖게 되면 ‘힘듦’을 넘어 거의 가족의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되는데요. 그 안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도움을 받기도 어렵고, 오로지 스스로 헤쳐가야 합니다. 병에 걸린 건 개인의 ‘운’이고, 이는 개인 혹은 가족 안에서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문제죠. 마치 전속력으로 뛰다가 발 아래가 푹 꺼지더라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들 제각기 각자도생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궁금해집니다. 과연 이처럼 장애나 질환 등을 오직 ‘슈퍼맨 같은 개인’에게 떠맡기는 사회는 긍정적인 사회일까? 사람들은 각자 최대한 어떻게하면 적자 구간을 줄이고 흑자 구간을 늘릴지만 고민하면 되는 걸까? 물론 국가의 지원 정책이 더 늘어나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오늘 레터에서는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나가노 하루),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유영규 외),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김영옥 외) 등을 지팡이 삼아 ‘돌봄’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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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의 이야기】 엄마 손을 붙잡고 병원에 다녀오던 전철 안이었습니다. 하차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엄마가 ‘나’의 뺨을 때리곤 전철 바닥에 대(大)자로 드러누워버렸습니다. 전철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죠. 여기서 ‘나’는 여덟살 난 꼬마이고,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의 저자 나가노 하루가 직접 겪은 어린 시절의 평범한 일상 풍경입니다. *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는 여덟살 때부터 ‘영케어러’*로서 살아온 저자가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써낸 에세이인데요. *영케어러(young carer) = 질환, 장애 등이 있는 가족을 부양하는 아동·청소년, 국내에선 ’가족돌봄아동‘으로 불리기도 합니다.(링크) 어머니는 저자가 여덟살이던 해 조현병이 발병했고, 주변엔 도움을 줄 만한 친척이 없었습니다. 평소 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가고, 약을 챙기는 등의 ‘일상 돌봄’ 뿐 아니라, 학교 갈 준비를 하는 등의 일은 오직 저자의 몫이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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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 책 표지(왼쪽) ‘영케어러’는 병에 걸린 가족을 돌보느라 학업에 전념할 수 없는 아동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낮은산, 초록우산어린이재단(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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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인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저자가 가져야만 했던 굳센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핵심 문구입니다.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처럼 초탈한 마음으로, ‘모든 일상’을 완벽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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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던 시절의 나는 영원히 살 것만 같은 황금의 몸과 만 년 동안 살아온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신에 가까운 존재라는 의식을 지니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 정도로 만능이 아니면 살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생겨난 생명의 폭발력이었습니다. -나가노 하루,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이하 동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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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생각이 깊고 야무질까?’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예를 들어, 어느날 어머니는 ‘망상’이 심해져 이웃 남자의 집 주변을 어슬렁거립니다. 이 때 저자는 적당히 어머니의 망상에 어울려주면서 능숙하게 무사히 어머니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하죠. 초등학생 밖에 안 된 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조숙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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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망상을 부정하며 “구보타씨는 엄마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폐만 끼친다고. 불법침입은 범죄야”라고 말해본들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엄마에게서 조금 떨어진 주차장의 주차방지턱 위에 앉아 자갈돌을 가지고 놀며 기다렸습니다 […] 그나마 남아 있던 마음은 잘려나가서 버려졌죠. 살기 위해서 […] ”이제 네 시야. 배도 고픈데 집에 가자” […] 나는 엄마에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남아있음을 알았기에 그걸 이용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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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도움이 필요 한 엄마’이기 때문에, 학교 행사 등에서 엄마가 하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리 없습니다. 하루는 운동회 날에도 다른 아이들은 가족과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몰래 교실에서 굶습니다. 하지만 주눅들지 않고, 달리기 대회에서는 당당하게 일등을 거머쥡니다. 실로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같은 대단하고 야무진 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 그런데 이 책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실은 이 책의 진짜 메시지는 “그 어떤 아이도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처럼 살 수 없고, 살아선 안된다”입니다. ‘하루가 참 대단하다’가 아니라요. 저자는 어릴 때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처럼 절박하게 버텼던 탓에, 이후 성장하면서 굉장한 ‘후폭풍’에 시달립니다. 고교 땐 관심을 받기 위해 자해를 하고, 제2형 양극성장애에 시달리고, 내내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자는 “내 인생은 거의 대부분이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 시절의 후유증”이라고까지 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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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나면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 해야돼. 항상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두어야 해 […] 만년동안 살았던 아이의 의식은 그런 것입니다 [...] 지독하게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지금까지 엄마를 돌보느라 자신은 뒷전으로 하고 살아온 것에 대한 청구서가 날아온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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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필요한 질문이 뒤를 잇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가, 위태위태하게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처럼 살게 만들었는가? ‘고립’입니다. 모두가 ‘남의 일’로 바라보았습니다. 저자의 마음 속엔 전철에서의 소외의 기억이 마음 속 깊이 박혀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결코 주변 사람은 나와 가족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처절한 소외와 낙담의 경험이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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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엄마가 전차 안에서 대자로 누워 꼼짝하지 않았을 때 아무도 말을 걸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죠[…]’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가 되는 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서 그 자리를 통제해 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고독한 싸움입니다. 그때 대자로 뻗은 엄마를 안아서 일으키던, 불과 여덟 살이었던 내게 누군가 말을 걸어주었다면 달라졌으리라 생각합니다. 분명 세상을 믿을 수 있었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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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위기는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문제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정상 사회’는 아주 작은 이상함도 용인하지 않았고, 장애인과 사회를 잇는 모든 연결고리를 끊었습니다. 저자는 어머니의 망상이나 이상 행동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예를 들면 망상에 스님이 자주 등장한다든지), 적당히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관점으로는 어딜 가나 엄마는 무조건 ‘관리해야 하는 폭탄’ 같은 존재였고, 이 때문에 저자의 어머니는 증세가 더 심해지고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웃들은 어머니가 중얼거리거나 배회하기만 해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집 앞에 크레졸(소독약)을 놓기도 했고요. 자연히 이런 어머니를 돌보는 하루도 고립되긴 마찬가지였죠. 이 책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어머니가 여행도 가고, 사람도 사귀며 ‘일반인’처럼 활발하게 지냈던 것은 오직 한 사이비종교에 잠깐 몸 담았을 때 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다양한 이유로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망상이나 이상 행동도 수상하게 쳐다보지 않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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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텐교의 창시자는 여성으로, 그 역시 정신장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리텐교 안에서 무척 정중하게 대접받았습니다.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은 엄마를 유일하게 환대해준 곳이었죠. 그 즈음의 엄마는 망상에 빠지는 일도, 환청을 쫓아 여기저기 쏘다니는 일도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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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이 책에서 잠깐 스쳐지나가듯 소개된 이야기였지만, 제게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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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병, 장애라는 ‘낭떠러지’】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를 다 읽고선 마음이 무거워졌는데요. 이 책은 여러 측면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 국내에서도 이슈가 되기 시작하고 있는 ‘영케어러’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의 저자인 조기현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아이의 ‘성장권’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창 ‘돌봄을 받아야 하는’ 나이의 아이가 돌봄 제공자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가혹합니다. 그런데, 왠지 이 책을 덮는 순간 문득 질문 하나가 머리 속을 북적하게 메웠습니다. ‘...그런데, 이미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처럼 살고 있지 않았나? ‘만 년 동안 살았던 어른’이라면 과연 괜찮은 것인가?’ 이는 ‘영케어러’의 문제를 얕잡아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우리 시대엔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들이 ‘만 년 동안 살았던 철인’같은 각오로 모든 경제적, 정신적 돌봄의 책임을 의지할 곳 없이 홀로 - 가족 단위 안에서만 ‘독박’으로 짊어져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던 것입니다.1) * 서울신문의 연재 기획을 모은 책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2019)은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가족의 ‘질병, 장애’가 순식간에 본인은 물론이고 한 가족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를 신산하게 보여준 충격적인 기획입니다. 특히 그간 당사자들의 문제에만 주목이 가곤 했는데, 렌즈를 ‘간병인’에 가져다대면서 우리가 간과했던 간병-가족의 처우 문제에도 사회가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든 소중한 기회가 되었죠. 취재팀은 2006년부터 10년 간 간병살인 관련 판결문을 분석, 인터뷰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 사람의 병, 장애가 가족의 붕괴, 살인으로 이어졌는지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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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책 표지(왼쪽) 이 책을 읽다보면 돌봄이 문제라기보다는 ‘독박 돌봄’이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다양한 경로로 간병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결국 마치 ‘거꾸로 선 피라미드’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 정신적 무게를 홀로 지고 버티다 무너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 루아크, 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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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다양한 직업, 성격, 나이, 소득, 집안환경 등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는데요. 이들의 공통점은 가족 중 누군가 한 명이 병에 걸리면서 그야말로 ‘절망의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병원비로 인해 가계가 기울고, 독박 돌봄으로 인해 가족 중 누군가가 일자리를 잃고, 고립되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악조건의 연속입니다. 마치 낭떠러지에서 허술한 발판을 잘못 밟은 한 사람이 곧장 수백미터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찔해지고 슬프고 답답해집니다. 이 책에 등장한 한 남성은 발달장애인 큰아들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고, 둘째아들은 파혼을 당하고 돌봄으로 인해 힘들던 중 자신마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수십년간 돌봐온 큰아들을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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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이 발생하기 약 1년 전 허씨는 뇌출혈 선고를 받았다 [...] 곧 죽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큰아들은 누가 돌봐야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그때 잘못된 생각이 들었다. 큰아들과 함께 죽는게 모두를 위해 최선이 아닐까 하는 믿음도 생겼다. (2015.8.4. 징역 3년, 집유 5년 선고) -유영규 외,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이하 동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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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비극 진단’에 이어 커다란 분석과 대책을 내놓습니다. 정부의 생활비 병원비 지원, 간병인 휴가제도 도입 등입니다. 당연히 물질적 지원 역시 필수입니다만,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에 이어 이 책에서도 제가 주목해보고 싶은 부분은 ‘고립’이라는 키워드였습니다. 이 책의 설문조사에서는 가족간병인들이 심층 인터뷰 중 언급한 단어들 가운데선 의외로 ‘돈’만큼이나 ‘여가활동’이라든지 ‘일상, 성취(직장, 학교)’ 관련 단어가 높은 비중을 차지했는데요. 간병인들은 돈이 부족한 상황 만큼이나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자신이 일상적인 성취, 관계를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절망을 느꼈습니다. 이 때문에 책에선 간병인 파견을 통해 잠깐이라도 간병 부담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레스핏 케어(Respite Care)’의 필요성이 강조되기도 하죠. 그리고 앞서 간병 문제를 다룬 일본 마이니치신문 기자 시부에 치하루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하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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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가능하면 끝까지 집에서 책임지고 가족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하지만 그것이 독이 돼 간병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듯하다. 간병의 짐을 사회와 타인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또한) 결국 간병 가족들에게 ‘쉴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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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후반부엔 간병인들의 자조 모임, 꽃꽂이 강좌 등이 큰 위안이 되었다고 적혀있습니다.(링크) 저는 이런 대목들을 읽으며 곰곰 생각했습니다. 만약 절망의 끝에 내몰렸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고민을 나누고, 심리적으로라도 지지를 받고, 돌봄 과정에서의 고민을 나누고, 가끔씩 한숨 돌릴 수 있었다면, - 가족 바깥에서도 느슨한 돌봄이 이어졌다면 이렇게까지 간병인들이 극한으로 내몰렸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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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의 가족 간병인 설문조사 속 자주 언급된 단어를 분석한 결과, 직장·일(169), 학교(155), 여가활동(133) 등이 상위를 차지했고 재정적 이슈가 111건으로 5번째 언급 빈도가 높았습니다. 물론 이를 바탕으로 돈이 덜 중요하다!라고 할 순 없겠지만 그만큼 간병인의 ‘일상’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죠 (왼쪽) 마이니치신문사의 간병살인 보도를 묶어 나온 책. 국내에도 <간병살인>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어있습니다.(링크) / 서울신문(링크), Amaz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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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책을 읽고 나면 ‘가족간병’이라는 틀을 깨고, 더 느슨한 돌봄들을 여러겹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어 아픈 채로 살고, 간병하면서도 일상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 “돌봄이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우그러뜨리는 압력이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조기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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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족 돌봄 청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아빠의 아빠가 됐다>(조기현, 2019)에서도 책의 마지막쯤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물론 특수성을 고려한 각별한 지원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이미 우리 사회에선 누가 돌봄을 하든 ‘독박’이 되곤 합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부모나 배우자를 간병하는 중장년층을 보다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하고 탄식했다. 돌봄이라는 책무를 강제로 떠안고 늙고 병든 시부모를 수발하는 며느리에 견주면 내가 돌봄에 관해 말을 꺼내는 일은 한낱 투정일 뿐이었다."(-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p.1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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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아픔이 낭떠러지가 되지 않기 위해선? : ‘고립’ 대신 ‘관계’로】 “인생이란 취약성의 기간이다”- 도나 해러웨이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와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를 읽는 동안, 공통적으로 저는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이 처했던 - 지독한 ‘고립’에 주목했습니다. 이들은 삶에서 ‘탈락’된 사람들처럼 살아가야 했습니다. 단지 본인 혹은 가족이 아프거나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요. 질문은 이어집니다. ‘비록 연결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고립을 해결할 수 있다면 많은 것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링크)의 강연을 엮어낸 책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2020)는 ‘과연 돌봄은 서비스일까?’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건 과연 ‘정책’으로만도 충분한 것일까?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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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책 표지 (왼쪽) 직장에서 과한 업무(over work)를 완벽하게 해내면서도 이를 감당할 수 있을만한 체력을 기르는 것은 ‘능력있는 삶’의 필수 요소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어차피 건강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운동을 하지만, 과연 공적, 사적 ‘과로’가 당연시되는 상황에서 여기에 완벽하게 맞는fitness 사람들은 얼마나 되고 인생에서 몇년동안이나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 봄날의책, Fotol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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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잠깐 제목의 의미에 대해 짧게 짚고 넘어가자면, ‘새벽 세 시’란 사람이 가장 아프고 심산한 시간입니다. 저자들은 우리가 ‘충분히 건강하고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어느정도 각자 비정상, 취약함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 기본 눈금을 가져다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언제든 3일 철야를 하고도 3차까지 회식을 가고도 멀쩡하게 다음날 출근해서 또 야근할 수 있는 몸(물론 운동, 집안일, 육아도 척척!)’을 기본으로 삼을 게 아니라 - ‘언제든 아플 수 있고, 또 어딘가 부족한 상태로도 살아갈 수 있는 몸’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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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리라고 전제하는 사회보다, 모든 사람이 취약함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는 사회가 더 ‘현실적’이다. 그런데도 의존이 이토록 두렵고 위협적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발달과 교육의 기본목표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 몸의 통제를 목표로 하는 다양한 훈육, 예의범절, 의료적 개입은 ‘몸이 없기를 요구하는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김영옥 외,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이하 동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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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효율성을 중시하는 사회는 일꾼을 뽑아 전자처럼 일할 수 있길 바라고, 알아서 평소에 영양제를 먹고 운동을 하며 건강을 챙기고, 다치거나 아파지면 티슈처럼 버려버립니다. 이런 사회에선 누군가를 돌볼만한 여유도 없고, 다치면 오로지 ‘자신’의 책임이고 같은 팀의 ‘민폐’입니다. 하지만 후자를 기본으로 삼으면 우리는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돌볼 수 있고, 조금 부족하더라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평소 내심 ‘아파서 출근을 못하게 되면 조금 면구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깜짝 놀라면서도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이 책의 핵심은, 돌봄은 서비스라기보단 ‘관계’라는 것입니다. 돌봄을 서비스로 본다면, 여전히 돌봄을 뱁새가 물어다주듯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덥석’ 제공해주어야 하는 ‘선물꾸러미’같은 것으로 여기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물론 기본적인 정책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저자들은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 우리가 취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 겸허하게 의존하고 또 지탱해주는 연결된 사회적 분위기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우리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고요. “아이를 키우는 것은 국가의 책임입니다” “치매, 이제 국가가 책임지겠습니다”와 같은 슬로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역시 우리는 알고 있다. 논의를 법제도와 정책에만 맞추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국가에 요구하기’ 외에는 별로 없어진다. 무엇보다 아무리 좋은 법제도도 나 대신 관계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희경,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받기’(<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 저는 앞서 읽었던 책들을 지팡이 삼아 - ‘관계’를 중심에 둔 돌봄 사회가 가능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연습’들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곰곰 궁리해보았습니다.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서요. 1) 돌보는 사람 2) 돌봄을 받는 사람 3) 제3자들 1)돌보는 사람 : 우선 돌보는 사람은 ‘돌보는 연습’과 함께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고 자신도 돌봄을 받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제가 이 책에서 꽤 흥미롭게 읽은 대목이 있습니다. ‘치매 환자와의 소통이 즉흥 코미디improv comedy의 대화법과 비슷하다!’는 아이디어였는데요. 미국의 즉흥코미디언인 캐런 스토비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치매환자 돌봄 가이드북을 보던 중, 그 모든 원칙이 즉흥 연기의 방식과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합니다. 이에 스토비는 즉흥 코미디의 관점에서 치매 환자와 어떻게 소통할지에 대한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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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코미디 수업 입문자에게 처음 소개하는 게임은 “Yes, and(그래요, 그리고)...”로 말을 이어가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 일단 수긍하고 거기에 살을 붙인다. 치매 환자의 현실을 거짓된 것으로 기각하는 대신 거기에 살을 붙여 나가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을 하나의 연극처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제안하는 것이다 [...] 치매가 아니라 그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환자와 주고받는 제스처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조금은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유희적 제스처들이 돌봄의 어려움을 사라지게 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어떤 부분들은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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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했듯 이런 시도가 ‘만능 열쇠’가 될 순 없겠지만, 돌봄에 있어 환자를 존중하고 소통하려는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에서 하루가 어린 시절의 ‘후유증’으로 모든 인간 관계에서 통제 강박을 갖게 되었다는 고백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든 상관없이, 일단 자신이 모든 계획을 세워 컨트롤을 하는 것에 골몰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런 태도는 당연히 삐걱대며 오작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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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 캐런 스토비Karen Stobbe(왼쪽)가 남편과 함께 즉흥코미디 대화 방식을 어떻게 ‘엉뚱한 말’을 하는 치매 환자와의 대화에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역할극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핵심은 'Yes But'이나 'No' 대신, 환자가 자유롭게 이야기를 확장할 수 있는 'Yes and'로 이어가는 것이죠.(왼쪽·영상) 평소 힘들 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의지가 되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취약할 때라고해서 갑자기 이런 능력이 생기진 않을 것입니다. / TEDMED, 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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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돌봄자들 ‘돌보는 연습’과 함께 돌봄자 역시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고, 돌봄을 받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에서 취재 기자로부터 지인의 간병살인 소식을 들은 주변인들은 크게 놀라고 참담해하며 입을 모읍니다. “전혀 몰랐다” “진작에 말했다면 도왔을텐데…” 물론 그 도움이 실질적인 도움이 됐을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받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연구에 따르면 간병자의 종류나 관계와 관계없이 ‘숫자’가 많을수록 간병을 받는 사람의 만족도가 높다고도 합니다. 확실히 주변에서 사정을 알고, 소소하게 지지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많을 수록 부담이 크게 덜어지겠죠.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여성·사회학자 패트리샤 힐 콜린스는 흑인 사회의 ‘돌보기Mothering’를 ‘혈육 어머니’와 ‘또 다른 어머니’의 일로 구분해 - 이웃과 친구들까지로 확장되는 돌봄을 이야기했죠. 모두가 왁자지껄하고 느슨하게 돌보아주는 것입니다. 2) 돌봄을 받는 사람 : 이어서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돌봄을 받는 것에도 연습,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우리는 돌봄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바구니에 들어있는 과자처럼 당연히 받을 수 있는 무언가로 생각하곤 하지만, 결국 당연하게도 ‘관계’입니다. 가족이나 연인, 회사 사람들과도 잘 지내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고, 고마움과 미안함을 잘 표현해야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듯 - 평소부터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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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잘 의존하는 법, 돌봄 '받는' 실력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에노 지즈코는 '장애인에 비해 노인은 돌봄을 받는 데에 있어선 초심자다'라고 말하면서 '능력'으로서의 의존을 강조한 바 있다.” “실제 돌봄의 장면은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며 […] 모두 서로에게 반응하고 서로의 반응을 초대하는 일종의 능력을 발휘할 것이 요구된다 […] 그들은 모두 반응할 수 있는, 혹은 감응할 수 있는 몸이어야 한다는 것을 […] 돌봄을 받는 몸 역시 감응가능한 몸으로 이 관계에 참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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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남에게 의지하고 또 돌봄을 제공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돌봄을 ‘잘 받을’ 수도 없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과연 각자도생·자력갱생의 사회에서, 오직 자신의 힘만 믿고 남을 돌보지 않고 앞만 향해 경쟁적으로 달려왔던 사람이 - 아파졌다고 해서 갑자기 자신의 취약함을 진솔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 평소에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고, 돌봄에 아무런 참여도 하지 않고 - 남에게 전혀 의지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취약해진 상황 자체에 분노와 모멸감을 느끼고, 고마움은 커녕 이를 돌봄자에게 억하심정을 퍼부을 수 있습니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에서 치매에 걸린 한 아버지는 평생 가족들을 매우 사랑했기 때문에, 간병을 받을 때도 큰 사랑을 나누어주었고 그를 돌보는 가족들이 오히려 힘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돌봄자도 환자도 서로 감정을 주고 받는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하고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면 ‘지옥같은’ 간병도 조금은 수월해질 수 있겠죠. 3) 제 3자들(미래의 환자 혹은 돌봄자들) : 그리고 마지막으론, 제3자들 역시, 미래의 환자 혹은 돌봄자로서 돌봄을 주고 받는 연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초고령사회가 오면서, 불과 10년 후 정도만 돼도 우리 주변에는 노인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회가 될 텐데요(링크). 그냥 ‘큰일났다!’하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제각기 고립될 수밖에 없겠죠. 결국은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저자들의 말처럼, 우리 모두가 ‘각자 슈퍼맨’이 아니라 ‘취약해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관계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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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맺음말】 오늘 레터에서는 돌봄을 '관계'의 측면에서 바라보았습니다. 평소 관계 맺음의 연습이 되어있지 않은 사회에서, 누군가 아프다고 해서 갑자기 좋은 돌봄이 바닥에서 뿅, 하고 튀어나올리가 없습니다. 환자든, 간병인이든 고립되고 독립적인 삶을 살지 못할 때 한층 더 우울해집니다.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의 하루가 어머니의 장애보다도, 냉담하게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서 더 큰 공포와 외로움을 느꼈듯이요. 그리고 오늘 레터에서 살펴보았듯, 병과 고립은 필연적인 관계가 아니라 - ‘우리’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 개선 가능한 것입니다.2) * 아픔이, 취약함이 곧 누군가의 삶에 ‘정지 버튼’을 누르는 사회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사회입니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에서 알콜성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는 저자 조기현은 아버지에게 어떤 삶을 살고 싶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미래에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 떠올립니다. 아버지가 병원 밖에서 잘 지낼 수 있는 조건을 상상했다[…]죽지 못해서 살고 있다는 아버지에게 나는 물었다. “움직거리고, 사람들 만나고, 혈액순환 잘되게 술도 한잔 하고, 배부르게 고기 먹고 일하면서 살고 싶지” “아버지의 현재와 나의 미래는 양립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현재는 겨우 관리되고 처리되는 수준이다.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움직거리고, 사람들 만나고[…]살’려면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사고 위험이 없는 안전한 생활환경, 움직이며 살아갈 수 있는 소일거리, 아버지 상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망, 삼시 세끼 먹을 밥 등 기본만 생각해도 쉽지 않다. 거기에 무슨 일이 생기면 열 일 제치고 바로 달려가야 하니, 보호자인 나는 24시간 대기 상태에 있어야 한다[…](예술가로서의 나는) 한 예술 장르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하고 싶다[…]아버지와 나, 아무도 희생당하거나 배제되지 않는 삶은 그저 내 고집 뿐일까?”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 ”아프면 죽어야지”라고 말하는 세상이 아니라, “아파도 괜찮다”고 모두가 말하는 사회. 어린 하루에게 손 내밀어주는 사회, 내가 언젠가는 아플 수 있기 때문에 아픈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 모두가 아프고 남을 돌보아도 삶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봐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분명 각자가 인생의 대차대조표만 들여다보아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관계’를 향한 진솔한 노력은 - 비단 질병 및 간병 문제 외에도 - 이 시대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초석이 되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늙고 아프면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 이 글의 맨 처음에 썼던 문장을 이렇게 고쳐본다. ‘나는 누구를 돌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돌볼 것인가?’ -전희경,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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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물론 앞선 챕터에서도 강조했지만, 이는 개인의 감정적 ‘노오력’만으로 극복 가능하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서로를 잘 돌볼 수 있는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 및 노동 조건 개선도 반드시 선행돼야 하죠. 이에 대해서는 아래 글 속 한문장(‘돌봄은 서비스로 수렴될 수 없다’)에 소개된 낸시 프레이저의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개념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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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나가노 하루, 조지혜 옮김,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 낮은산, 2023.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라는 강렬한 제목이 눈을 사로잡는 책입니다. 책에 대한 별다른 사전 지식 없이 읽었기 때문에 초반 절반정도를 읽을 땐 진심으로 ‘어린 하루가 정말 대견하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고, 그래서인지 그가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일 적의 후유증을 고백한 부분에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변 누구에게서도 도움, 지지를 받을 수 없었던 하루의 상황이, 우리나라도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이 다른 간병 관련 책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점은, (경제적 어려움, 정책적 부분에 비해선) 사회적인 고립이나 이웃으로부터 받은 시선, 소외감에 대한 부분을 꽤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집안의 경제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아버지가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쓰여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는데요. 또한 이 책을 읽다보면 어쩌면 사람들이 하루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시끄럽고 때론 이상하게 행동하는 아이(‘민폐를 일으킬 수도, 안 일으킬 수도 있는 존재’)를 대하는 시선과 굉장히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결국은 아이를 키우기 힘든 사회의 문제까지도 서로 연결된 문제라 볼 수도 있겠죠. 유영규 외,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루아크, 2019. -서울신문이 2018년 연재한 동명 기획( 시리즈 링크)을 바탕으로 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생소했던 간병살인에 대해 주목하고, 더불어 간병인의 정신건강, 처우 등에 대해서도 조명하게 된 계기가 된 기획입니다. 오늘 레터에서는 주로 ‘고립’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 중 간병인의 정신건강, 고립을 다룬 후반부를 위주로 주목해보았습니다. 김영옥 외,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봄날의책, 2020. -돌봄과 나이듦, 아픔에 대한 참신한 시각을 갖게 해주는 좋은 책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한다!라는 조언을 해주기보다는, 돌봄에 대해 커다란 인식의 전환을 하게 해주는 책이죠. 모든 챕터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만, 마지막 챕터(치매이면서도 동네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느슨한 돌봄으로 일상을 유지하는 70대 노인의 경우)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전에 국내 여행을 갔을 때 실수로 시내버스 대신 봉고버스(정거장이 '감나무집 앞' 이런 식인...)를 잘못탄 적이 있었는데요. 버스가 한 바퀴 도는 게 곧 마을 사람들의 안부를 한번씩 묻고 다니는 과정이더라고요. 왜 요새 병원 맨날 다니던 윗집 할머니 안보이시냐는 기사님의 질문에 다른 집 아저씨가 '딸 네 집에 간 모양'이라고 대신 대답해주었습니다.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이매진, 2019. -이 책은 워낙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읽어보신 분들도 계실텐데요. 국내에 ‘돌봄 청년’의 문제를 제기한 책입니다. 저자가 스무살이 되던 해, 미장일을 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진 후 심각한 경제적 문제에 처하게 됐고, 현재와 미래가 갑자기 '멈춤'버튼을 누르듯 멈춰버린 상황을 현실적으로 적어내려가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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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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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아동’들을 찾아서 독서시간: 약 12분 / 글자수: 약 7800자 🖍글 속 한 문장 “성규(18)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아픈 어머니와 갓 태어난 11살 터울 여동생을 위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왔다. 어머니가 환청 등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나서부터는 집 밖 출입조차 부담스러워졌다. 혼자 있기 무서워하는 어머니를 돌보고 그런 어머니 대신 어린 동생도 보살폈다. 결석이 잦아지자 학교에서는 자퇴를 권했다. 지역 사회복지 단체에서 성규 사례를 발견했을 때 이미 성규는 ‘학업 중단자’가 된 이후였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가족돌봄아동’ 문제를 집중 조명한 시사인의 최근 기사입니다. 오늘 레터에서 다루었던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 같은 상황에 있는 국내 아이들의 이야기인데요. 보통 부모에게 병이나 장애가 있는 경우 아동이 직접 다른 형제나 부모를 돌보아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014년 ‘소년소녀가장’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면서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 이처럼 가사를 돌보는 상황에 대한 지원도 상당부분 사각지대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역시 '연결'이 중요한데, 가족돌봄아동들은 보통 자신이 지원 대상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병원이나 이웃 등을 통해 사례가 '발견'되는 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
발달장애 자녀 둔 아버지들의 편지 독서시간: 약 9분 / 글자수: 약 4300자 🖍글 속 한 문장 “유일한 도피처는 안씨의 자동차였다. 그는 “아이를 데리고 피해 있을 수 있는 곳은 그나마 소리가 잘 새지 않는 자동차 뿐이었다”며 “아이 엄마 앞에선 울지 않았지만, 아이와 차에서 30~40분을 함께 있을 때엔 많이 울었다”고 했다[...]세 아버지는 모두 아이들이 남겨질 세상이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변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안씨는 “복지도, 사회 인식도 우리 아이가 자라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게 체감될 때가 있다”며 “더 나아가 아이가 살아가는 데 안전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강씨는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볼 때 단순히 동정하는 게 아니라 이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같은 사회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발달장애 자녀를 둔 아버지들이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 생각들을 나눈 지난 6일 경향신문 인터뷰입니다. 통상 간병 등 지원을 이야기할 때 경제적인 측면 위주로 논의되었지만(물론 여러번 강조했듯 그것도 매우매우 중요하지만) 오늘 레터에서는 ‘관계-연결’에 주목해보았는데요.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감각, 서로 지지해준다는 감각이 고립의 무게를 조금 덜어주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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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서비스’로 수렴될 순 없다 독서시간: 약 3분 / 글자수: 약 1300자 🖍글 속 한 문장 “분명 돌봄을 겪으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도움이 될 정보조차 몰랐으며, 함께 협력할 사람도 없었다던 이들이었다. 스스로 좌충우돌하며 몸으로 배운 지혜였다[...] 우리는 돌봄이 ‘서비스’이기 이전에 ‘관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돌봄을 서비스로 대체할 수 없고,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돌봄도 있기 때문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ㄴ조기현씨가 쓴 칼럼입니다. 칼럼에서 언급된 ‘보편적 돌봄제공자’ 개념에 대해서 짧게 소개하자면,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을 주장하고 있는데요. 간단히 말해, 우리 모두 회사에서 노동하는 것 외에도 집, 마을에서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을 ‘기본’으로 상정하고서 그에 맞는 노동 시간을 정한다는 것이죠.( 링크) 간병인의 ‘시간’과 관련해 경향신문과 올해 진행한 인터뷰 링크도 첨부합니다.( 링크) |
“효자라 부르지 말라” 영케어러의 마음 “청소년기에 부모가 아프다는 것은, 세상이 없어지는 거와 같은 것 같아요. 아픈 가족이 있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쳤냐고 한다면[...]가난했어야 됐고,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인생에서 선택지가 다양할 수가 없었어요. 포기하는 게 너무 일상이었어요[...]주변에서 '야 너 진짜 효녀다, 효자다' 이런 말(많이 듣는데)...짜증도 많이 내는데 나 힘든데. 이런 생각 들고” 👤김스피의 블라블라 돌봄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시리얼의 영상입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누리기를 원했지만, 누릴 수 없었고 - 정부나 언론에서 다뤄지는 많은 '청년' 문제의 당사자로도 호명될 수 없었던 이들의 고충을 들어볼 수 있는 영상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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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차(‘커뮤니티는 여론일까? : ‘눈팅하는 뉴비’의 시대’)에 대한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모아 소개합니다. 편지로 다양한 의견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 버튼을 누르면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읽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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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레터는 어떠셨나요? 아래 ‘💌편지보내기’ 버튼을 눌러서 오늘 레터에 대한 감상이나 질문 등을 보내주세요. 간단한 한줄 감상도 좋고, 연구자님이 떠올리신 독특한 해찰거리도 좋습니다 :) 레터를 통해서 보내주시는 작은 격려와 의견들이 레터를 쓰는 데 큰 힘이 됩니다. 흥미로운 해찰은 레터를 통해 함께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스피아에서 차후 다뤄볼만한 주제나 좋은 콘텐츠 등의 추천도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1.혹시 지난 회차 가운데서 '아, 이 회차에서 이 책(혹은 영화 등)을 다뤘었으면 좋았을텐데, 아깝다!'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지난 회차의 주제에 대한 책이라도 추천해주시면 검토 후 레터에서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신간도 구간도 상관 없습니다. 회차명과 책 이름, 그리고 짤막한 추천 이유를 적어서 아래 '💌편지 보내기' 버튼을 통해 보내주세요. 지난 회차의 레터 내용은 아카이브 페이지(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SNS나 커뮤니티 등을 통해 주변에 레터를 추천해주시면 창작에 큰 힘이 됩니다. 친구에게 레터를 소개해주시려면 '구독하기' 버튼을 눌러 나오는 주소를 복사 붙여넣기 하시면 됩니다. 오늘도 레터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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